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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이었던 1981년 여름 고장에서 '흙빛문학회'를 만들었습니다. 문단 등단 1년 전이었고, 우리 고장은 태안군이 아닌 서산군 태안읍 시절이었지요. 그리고 1983년 1월 <흙빛문학> 창간호를 만들었습니다. 흙빛문학은 대전을 제외한 충남에서는 조치원의 <백수문학>에 이어 두 번째로 탄생한 본격적인 지역문학지였지요.
나는 1985년 제3집을 만들 때 회장을 맡아서 1989년 제10집까지 선장 노릇을 했습니다. 참 고생이 많았지요. 갖가지 기가 막히고 눈물겨운 일들도 많았고….
내가 회장을 할 때는 5집부터 책을 거의 매번 300쪽 이상으로 2천부씩 찍었습니다. 1980년대에 지방문학지가 매번 그런 규모로 만들어진 예는 흔치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하여튼 배포 작업도 참 거창했습니다. 외지로도 수백 권씩을 우송했고, 지역 사람들에게는 내가 직접 자전거에 싣고 다니며 배포를 하곤 했습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 열정과 노고와 슬픔들에 대한 기억들이 되살아나서 이상한 경탄같은 것을 머금게 되곤 합니다.
스스로 장기 집권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개인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싶은 마음으로, 또 이제는 흙빛문학이 완전히 뿌리를 내려서 저절로 굴러갈 수 있는 바퀴도 생기고 날개도 달리게 되었다는 판단으로 1989년 여름 미련 없이 회장직에서 물러났지요.
그 후 흙빛문학회는 네 명의 회장이 교체되는 가운데 15년(도합 22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현재 흙빛문학 제38집을 발간하고 있고, 지방문학의 건실한 견인차로 알차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요.
그런 흙빛문학을 볼 때마다 과거 흙빛문학회를 만들고 갖가지 악조건 속에서 참으로 고생스럽게 '흙빛'을 키운 사람으로서 가슴 뿌듯한 긍지와 보람을 느끼곤 한답니다.
내가 1994년 여름 흙빛문학을 떠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나로서는 다 뜻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리 고장의 지명을 사용하는 새 문학지를 만들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지요.
흙빛문학 탄생 이후 흙빛문학이 안겨 준 자극도 크게 작용해서 충남 도내의 각 고장마다 지역문학지들이 속속 탄생하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2000년의 <금산문학> 탄생을 끝으로 시·군단위 고장에서 종합문예지를 갖고 있지 않는 동네는 하나도 없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각 고장에서 탄생하는 문예지들은 한결같이 그 고장의 현재 지명이나 옛 지명, 또는 대표적인 명물의 이름을 제호로 사용하더군요. 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산의 <서산문학>, 당진의 <나루문학>, 아산의 <설화문화>, 천안의 <천안문학>, 연기의 <연기문학>과 <백수문학>, 금산의 <금산문학>, 공주의 <공주문학>, 부여의 <부여문학>과 <사비문학>, 논산의 <놀뫼문학> <황산문학> <계룡문학>, 서천의 <서림문학>, 보령의 <보령문학>과 <한내문학>, 청양의 <청양문학>, 홍성의 <홍주문학>, 예산의 <예산문학>
이런 각 고장 문예지들의 제호를 보면서 나는 야릇한 허전함과 위기감 같은 것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고장만이 우리 고장의 제호를 사용하는 문예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우리 고장만이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고유 문학지를 갖고 있지 못한 고장으로 남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나는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흙빛문학을 태안문학으로 전환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서산군 태안읍 시절에 처음 만들어진 후 제3집 발간 때부터 내가 회원들의 분포 범위를 서산군 일원으로 확대시켜 버린 탓에 구성원들의 3/2 이상이 서산에 주소를 두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서산 쪽 회원들이 태안문학으로 제호를 변경하는 일에 동의를 해 줄 리는 만무한 일이었습니다.
1989년의 태안군 분리에 대해서도 서산 사람들은 '분군'이라고 부르는데 반해 태안 사람들은 '복군'이라는 표현을 고수하고 있지요. 이미 고려조 때부터 오랜 세월 군(郡)의 지위를 누려오던 태안군이 1914년 일제에 의해 단행된 행정구역통폐합 때 서산군으로 병합된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던 탓에 태안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복군 추진' 운동을 벌여왔지요.
그 노력의 결과로 1989년 드디어 복군이 이루어져서 오늘날 태안군의 양양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아무튼 그런 역사적 사실과 오랜 세월에 걸친 복군 추진 운동의 여파로 태안과 서산 사람들 사이에는 부분적으로 알게 모르게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이 작용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랍니다.
특히 태안의 오랜 토박이인 데다가 과거 청소년 시절부터 운동 선수로 서산 친구들과 많은 대결을 벌인 적이 있는 나로서는 그런 분위기를 거의 숙명적으로 체감할 수밖에 없었지요.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흙빛문학을 태안문학으로 전환하는 일은 아예 처음부터 희망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상당한 연륜과 지명도를 확보하고 있는 흙빛문학은 서산과 태안을 함께 아우르면서 '흙빛'이라는 제호가 명시해 주고 있는 정신적 문화적 가치지향을 추구하는 쪽으로 더욱 확실하게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다듬었지요.
내가 1981년 흙빛문학회를 만들면서 '흙빛'이라는 이름을 창안할 때는 고장의 지명과 관련하는 문제를 미처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흙빛문학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여러 고장들에서 속속 문예지들이 탄생하고, 그 문예지들은 흙빛과 달리 제호부터 자기 고장의 명색이나 이미지를 표방하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거지요.
그리고 나는 그저 우리 문학인들이 문학의 이름으로 추구해야 할 정신적 가치, 그 가치 지향적 관점으로만 '흙빛'이라는 이름을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던 거지요. (이 '흙빛'이라는 이름의 뜻, 그 가치 지향적 세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소개를 드리기로 하죠.)
아무튼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1994년 여름 마침내 흙빛문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즉시 태안문학회를 만드는 일은 보류를 했습니다. 흙빛문학을 떠나자마자 태안문학을 만들면 모양도 좋지 않고 주변의 오해의 소지나 시각도 많으리라는 것을 고려했던 거지요.
그로부터 햇수로 5년 후인 1998년 여름 나는 고장에서 태안문학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태안문학 창간호를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402쪽으로 2천부를 찍었고, 거창한 출판기념회 행사도 가졌지요.
지난 5년 동안 태안문학회장으로서 과거 흙빛문학회장 때처럼 고생고생을 하면서 태안문학을 열 번 만들었고, 회보 여섯 번 발행에 대외적인 큰 행사를 네 번 치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회장직을 물러나려고 합니다. 과거 흙빛문학회장 시절 흙빛문학을 내 손으로 10집까지만 만들고 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공언을 미리 했던 것처럼 태안문학회장을 하면서도 똑같은 공언을 일찍부터 해왔지요. 그리고 태안문학을 10집까지 만들었으니 이만 물러나려는 거지요.
며칠 전에 태안문학회 회원들에게 마지막 제113호 통신을 띄우며 이임 인사를 적었습니다. 그 인사를 적으며 지난 5년 동안의 갖가지 어려웠던 일들을 조금은 반추를 하자니 괜히 가슴이 아릿해지는 것도 같더군요.
그런데 이임 인사를 적은 마지막 통신문을 회원들에게 이메일 전송을 하고 태안문학회 홈피 게시판에다 올려놓는 작업을 하며 옛날의 흙빛문학회장 시절까지 포함하여 잠시 이런저런 회억에 젖을 때였습니다.
우편 집배원이 가져온 우편물 중에 등기 소포가 하나 있었습니다. 퇴침 만한 크기의 그 소포는 대뜸 책일 거라는 직감을 안겨 주었고, 빗물에 젖어 찢겨진 부분을 좀더 젖히고 보니 뜻밖에도 '흙빛문학'이라는 글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 책이 옛날 흙빛문학 초창기 시절의 책이라는 것을 감지하면서 누가 왜 그 책들을 내게 보냈는지 큰 의문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빗물에 다소 젖긴 했지만 포장지에 적힌 수신인 표기는 정확하였습니다. 종종 우편 집배원이 흙빛문학회장에게로 가야 할 반송 우편물 같은 것을 내게로 가져오는 경우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발신인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대전 '대덕연구단지' 우체국의 스티커는 정확하게 붙어 있고 그 딱지에는 '소포/내용문의 끝냄'이라는 글자들이 찍혀 있는데, 발신인의 주소와 이름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끈과 포장지를 풀고 보니 모두 여섯 권이었습니다. 흙빛문학 제4집, 5집, 6집, 7집, 그리고 9집, 15집이었습니다. 나는 우선 반가웠습니다. 15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가 회장 시절에 어렵게 만든 책들이었습니다. 한결같이 나의 고뇌와 노고의 땀방울들이 담뿍 어려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흙빛문학 4집과 5집은 1986년에 만들어진 책들이니 그때를 기준으로 하면 무려 17년 만에 내게로 되돌아온 책들인 셈이었습니다.
맨 밑에 놓여 있는 4집 책의 표지에는 메모지 한 장이 붙어 있더군요. 그리고 그 딱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지요하 선생님.
저희 집 책장 속에 있던 책입니다.
이번에 이사하는 바람에 눈에 띄었습니다.
그냥 버리기에는 좀 죄송한 마음이 들고, 혹시 옛날 자료로 필요하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돌려 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저도 선생님을 잘 모르고, 선생님께서도 저를 모르실 겁니다.
나는 그 순간 고마운 마음이 울컥 들었습니다.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이 언제 어떤 경로로 입수하여 소장하게 되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그 책들을 십 수년의 세월 동안 고이 간직해 왔다는 사실, 이사를 하면서 필요 없는 짐이 된 그 책들을 버리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내게 수고와 비용을 들여 돌려보내 준 그 사실이 생각할수록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몇 년 전의 한가지 일이 냉큼 떠올랐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내게 흙빛문학 창간호를 한 권 가져온 적이 있었지요. 자동차운전학원에 갔다가 우연히 쓰레기 소각장엘 갔더니 '흙빛'이라는 책이 소각 대기 상태 중이어서 내 생각이 나서 주워왔다는 얘기였지요.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한 번은 어머니로부터 좀 심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답니다. 우리 동네 쓰레기 모아놓는 곳에 태안문학 책이 몇 권 버려져 있더라도 했습니다. 그렇게 버려지는 책을 뭐 하러 죽게 고생해서 만들며, 아무리 이웃이라지만 책을 읽지도 않고 함부로 버리는 사람들에게 왜 자꾸 책을 주느냐는 타박이었지요.
그런 일들을 생각하니 옛날의 흙빛문학 책들을 버리지 않고 내게 돌려보내 준 그 누군지 모를 사람이 다시금 좀더 고마워졌습니다. 내가 만든, 내 노고의 소산들인 그 책들은 그 사람의 책장 안에서 십 수년 동안 대접을 잘 받고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사가는 집으로 그 책들을 가져가지 못하고 내게 돌려보내는 것이 적이 미안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의 주소와 이름을 명기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이 그 책들을 계속 지니지 않기로 한 것이 조금 서운하기는 하지만 나는 그가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오로지 그에게 고마워하는 마음만을 지니기로 했답니다. 누군지 모를 그 분이 살림을 넓히기 위해 이사를 했을 것으로 믿어 그 이사를 축하하며, 앞날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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