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217

악인은 지옥으로 (7)

등록 2003.08.29 14:11수정 2003.08.2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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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명불허전이오. 철마당의 부당주인 마선봉신의 봉술이 천하제일이라더니 소생이 오늘 새로 개안(開眼)한 느낌이외다."

이회옥은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지는 않다 판단하였기에 가볍게 포권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호옥접에게 향하고 있었다. 대체 누구냐는 의미를 담고 있는 눈길이었다.


"호호! 서로 처음 보시지요? 소녀가 소개해 드릴게요. 이분은 철마당의 부당주이신 마선봉신이시고, 이분은 의성장의 주인이며 무천의방의 부방주이신 소화타세요."

무천의방의 부방주와 철마당의 부당주는 직위를 비교하기 어려우나 굳이 따지자면 장일정의 지위가 더 높았다. 그렇기에 서둘러 봉을 병기대에 꽂은 이회옥은 다시 정중한 포권을 하였다.

"헛! 이런 실례를…. 처음 뵙겠소이다."
"하하! 분에 넘치게도 동도들이 소화타라 부르고 있소만 실은 허명(虛名)일 뿐이라오."

"핫핫! 무슨 말씀을… 소생도 귀가 있어 들을 소리는 다 들었소이다. 천하에 부방주님만한 의술을 지닌 의원이 없다 들었소이다. 그러니 소화타라 불릴 만하지요."
"하하하! 이거야 원…."

장일정은 겸연쩍다는 듯 손을 내젓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이회옥에게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일정이 의성장에 당도한 것은 점심나절이 지난 직후였다.

아흐레마다 한 번 방문하는 그는 늘 아침 일찍 왔다. 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신 대문가를 서성이던 호옥접은 오전이 다 가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자 이제 영영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소 침울한 상태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게 한 것을 이회옥이었다. 실없는 우스개 소리로 그녀의 기분을 전환시켜준 것이다.

지난번 장일정은 오지 않아 침울해 하자 이회옥은 이유를 물었다. 이에 호옥접이 둘의 관계를 소상히 이야기한 바가 있기에 이회옥이 그녀의 기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후원에서 열심히 무공 수련에 몰두해 있는 이회옥을 위하여 차를 내가던 호옥접은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장일정을 발견함과 동시에 마치 망부석처럼 굳어 버렸다.

남궁혜에게 빼앗겼기에 어쩌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 생각하던 정인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하하하! 접매, 오늘은 좀 늦었지? 하하! 미안, 미안!"

"……!"
"이런, 내가 올 줄 알고 차를 내오던 차였어? 하하, 선견지명이 대단하네.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자."

잠시 후 둘은 서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장일정은 왜 지지난 번에 급히 갔으며, 지난번에는 아예 오지 않았는지를 소상히 설명하였다.

독에 중독되었기에 혹여 중독시킬까 두려워 보고 싶었지만 올 수 없었다는 말에 호옥접은 눈물을 떨구었다. 굳어 있던 여심(女心)이 말 한마디에 스르르 녹은 것이다.

이회옥을 위해 준비했던 차는 장일정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호옥접은 환자 하나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를 하였다. 그러면서 철마당의 부당주인 마선봉신이라고만 이야기하였다. 이회옥의 성명 석 자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

같은 무림천자성 사람이니 그 정도만 이야기해도 알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이회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장일정을 이야기하면서 소화타라고만 하였지 이름은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현재 둘은 서로의 외호만 알뿐 진정한 성명은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생, 염치없지만 부방주께 부탁이 있소이다."
"하하! 접매로부터 대강은 들었소이다. 이마에 새겨진 상처를 없애는 것은 하루 이틀만에 되는 일이 아니외다. 따라서…."

호옥접으로부터 이회옥에 대한 대강의 이야기를 들은 장일정은 그가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듯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요란하게 대문을 두들겼기 때문이다.

쾅쾅쾅! 쾅쾅쾅!
"문을 여시오. 문을 여시오."

급박한 일이 있다는 듯한 사내의 음성에 장일정은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였다는 듯 소리쳤다.

"문은 열려 있소이다. 들어오시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한 떼의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나같이 가슴에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검이 수놓아진 것으로 미루어 정의수호대원이었다.

언뜻 헤아려 보아도 족히 오십여 명은 되는 듯하였다. 이 순간 이회옥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철마당의 부당주이고, 눈앞의 청년은 무천의방의 부방주이다.

따라서 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삼엄한 표정으로 무적검까지 뽑아들었기 때문이다. 하여 웬일인가 싶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선두에 있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살인범은 오라를 받아라!"
"살인범…? 오라…?"

"흥! 살인을 저질러 놓고 도주하면 못 찾을 줄 알았더냐?"
"대체 무슨 소릴…?"

이회옥은 정의수호대원들이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자 이들이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나섰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호옥접과 장일정이 뒤로 물러서게 내버려두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였다.

"흥! 배루난을 모른다고 할 것이냐?"
"허억…!"

정의수호대원들은 살기 등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료를 죽인 살인범과 마주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놈은 증거를 인멸한다고 한 모양이나 감히 우리의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무슨 소릴…?"

찰라의 순간이었지만 이회옥은 증거가 있을리 없다 판단하고 일단은 오리발을 내밀 심산이었다.

"흥! 강호에 정의수호대원을 단 일 초만에 해치울 수 있는 실력자는 많다. 그 가운데 창이나 봉으로 그럴 수 있는 자는 단 둘! 점창파의 전대 장문인인 신창과 철마당 부당주인 마선봉신 뿐이다. 그런데 신창은 이미 작고하였으니 남은 사람은 너!"

"이보시오, 그게 무슨 증거이오?"
"흥! 네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아무런 이유 없이 임지를 이탈할 이유가 없다.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너는 지난 이십칠일간 총단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네가 범인이다."

"이보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릴랑 하지 마시오. 어찌…"
"흥! 죽림의 대나무들 가운데 죽창처럼 베어진 것은 오직 하나. 그 같은 실력을 지닌 사람은 마선봉신 뿐이지."
"……!"

순간 이회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죽인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시신을 발견한 농부가 신고를 하자 무림천자성 외원은 발칵 뒤집혔다. 총단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인이 저질러졌는데 죽은 자가 정의수호대원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일은 무림천자성에 개파대전을 연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모든 시선이 집중된 것이다. 곧 면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이회옥이 범인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여기엔 납득할 만한 여러 이유가 있었다.

현 무림에서 봉이나 창으로 단 일 초만에 정의수호대원을 죽일 능력을 지닌 무인은 이회옥 뿐이기 때문이다. 일 초만에 살해되었다는 것은 죽림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대나무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회옥을 죽이기 위하여 배루난 검을 휘둘렀을 때 많은 대나무들이 베어졌다. 이 가운데 아래 위 두 군데가 베어져 죽창처럼 된 것은 단 하나, 그의 인후부에 박혀 있던 것뿐이다.

면밀히 살펴본 결과 죽창에는 아무런 흠집도 없었다. 이는 병장기와 한번도 격돌하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대나무는 묘한 특성이 있는데 이 물체와 강하게 격돌하게 되면 중간 중간 아주 작은 금이 생기게 된다.

이것은 겉으로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쪼개어 안쪽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대나무의 특성인 강한 탄성 때문에 부러지지 않는 대신 활처럼 휘어지면서 생기는 흔적이다.

그런데 현장에 있던 것에는 이런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일 초만에 죽였다는 것을 금방 추론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회옥을 찾는 자에게는 후한 상금을 준다는 방이 나붙었으나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종적이 묘연했다.

하필이면 살인이 벌어졌던 날 오후에 억수 같은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이회옥의 족적(足蹟) 등 모든 흔적이 사라져 뒤를 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경험 많은 정의수호대원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인근 지역 전부를 샅샅이 수색하도록 하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자칫 미제 사건으로 분류될 찰라에 무천의방의 부방주인 소화타로부터 제보가 있었다. 살인을 저지른 마선봉신이 의성장에 있다는 것이다.

이에 무림천자성에서는 즉각 이백여 정의수호대원들을 출동시켰다. 이회옥이 의천문 앞에서 이십사 명의 대원들을 상대한 전력을 감안한 것이다. 그들 모두는 순찰원 소속이다.

같은 정의수호대원이라 할지라도 순찰원 소속은 다른 대원들보다 강하다. 따라서 이회옥이 제 아무리 날고 긴다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어쩌겠느냐? 순순히 오라를 받겠느냐? 아니면 우리 모두를 상대하겠느냐?"

대원들을 이끌고 온 자가 가볍게 손을 들자 즉각 일백오십여 정의수호대원들이 의성장 담장 위로 올라섰다. 사방 어디든 도주할 길이 없다는 경고의 의미일 것이다.

'젠장! 마음먹고 왔군. 어떻게 하지?'
이회옥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갈등은 그리 길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불가항력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무림천자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도발을 하면 끝장은 본다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면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반드시 복수를 하기에 다른 문파들이 감히 도발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겠느냐고 물었다. 오라를 받겠느냐? 아니면 목숨을 걸 것이냐? 흥! 이번엔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매부리코 청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원들이 일제히 한 발짝씩 다가섰다. 그런 그들에게서 뿜어지는 기도는 전에 상대했던 자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젠장! 길보다 흉이 많은 날이 있다 하더니 오늘이 그런 날인 모양이군.'

승산이 없다 판단한 이회옥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저항의 의사가 없다는 몸짓이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무엇 하느냐? 어서 죄인을 포박하라!"
"존명!"

매부리코 청년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네 명의 청년들이 튀어나와 일순간에 이회옥을 마치 거미줄에 칭칭 감긴 먹이처럼 만들어 놓았다. 움츠리고 뛸 수조차 없게 하기 위하여 관절이란 관절 부위는 모두 묶은 것이다.

잠시 후 이회옥은 총단으로 압송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안타깝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지난 이십칠일 동안 함께 하였던 호옥접의 시선이었다.

또 하나의 시선은 장일정의 시선이었다. 그는 모처럼 무림천자성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이 기분 좋다는 듯 흐뭇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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