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의전당
애써 동서양의 고전과 명멸했던 수많은 로맨스영화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알고있다. '지독한 사랑은 파멸'이라는 쓰지만 엄연한 명제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라는 시집과 산문집 <내가 길이 되어 당신께로> 등을 통해 '사랑'이란 단어만 들어도 눈가가 시큰해지는 사랑지상주의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이정하(41).
최근 독자들과 만난 <마지막이 아닌 것처럼>(명예의전당)은 '슬픈 사랑의 전도사' 이정하의 시 52편과 그 시가 탄생한 배경까지를 덧붙여 묶었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시집과 산문집의 중간형태에 서있는 책. 이번 책을 통해 이정하는 왜 인간의 사랑 속에는 기쁨과 환희보다 절망과 한숨이 더 많이 내포된 것인지를 들려준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낮은 곳에 있고싶었다/낮은 곳이라면 지상의/그 어디라도 좋다/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한 방울도 헛되이/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그래, 네가/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너를 위해 나를/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나의 존재마저 너에게/흠뻑 주고싶다는 뜻이다/너는/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위의 책 중 '낮은 곳으로' 전문).
이정하는 '높은 곳'이 아닌 '낮은 곳', 정염과 열정의 불같은 사랑이 아닌 낮은 곳으로 스스로의 몸을 낮추는 물과 같은 사랑을 노래함으로써 물신(物神)에 흔들리는 21세기의 즉물적 사랑을 꾸짖고 있다. 그 꾸짖음은 사랑으로 인해 수많은 날들을 울고 웃었음에도 여전히 진실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우리를 아프게 매혹한다.
거칠고 엄혹한 군사독재의 시절을 겪은 탓에 우리 시단(詩壇)은 집단에 대한 사랑이 아닌 개인의 사랑을 노래한 작품을 한 수 아래의 것으로 치부한 경험이 없지 않다. 그러나 결국 시의 최고봉은 서정시이며, 그 서정시의 가장 종요로운 밑거름이 사랑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터.
비 내리는 밤. 창가에 서서 쓸쓸히 젖어 가는 어두운 골목길을 내다보며 <마지막이 아닌 것처럼>을 읽노라면 진원지가 불분명한 서러움이 가슴을 죄어온다. 왜 사랑은 이토록이나 쓰고도 슬픈가? 이정하의 책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들려줄까?
멀리 제주에서 서울을 야유하다
- 고정국 시집 <서울은 가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