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동네. 낮에도 극 지방의 백야처럼 어둑어둑하다.전희식
농사가 될 턱이 없다.
사람도 냉기가 만병의 원인이 되듯이 작물도 마찬가지다. 습하고 차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약해진다. 약해지면 벌레가 먹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벌레가 엄청 와글거리고 병도 많아진다. 요즘 한창 수확이 시작되는 때라 하루 햇살이 아쉬운 판에 맨날 비만 뿌려대니 한숨이 절로난다. 어느 음유시인은 익어가는 곡식을 바라보며 가을 해가 한 뼘만 더 늘어나기를 기원했다지만 오늘 나는 햇살이 우리 밭에 한 줌만 뿌려준다면 여한이 없으리라면서 욕심을 대폭 줄여 봤는데 그 마저도 허사가 되었다.
새벽이슬만 많이 와도 축축 늘어지는 들깨가지 고추가지가 날이면 날마다 내리는 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찢어지고 부러지고 쓰러졌다. 난리가 났다. 태풍이 분 것도 아닌데 저 모양이다. 현재 고추 두벌 따기를 했는데 말리다가 다 썩어 버렸다. 마당에 널었다가 처마 밑으로 옮기고 마루로 올렸다가 방으로 다시 들이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하다보니 가위로 잘라 말려도 곰팡이가 스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고추밭은 일찍이 역병이 휩쓸어 버렸고 지금은 탄저병이 창궐하고 있다. 다행이 우리 고추는 아무 병도 없고 다시 빨간 고추가 많이 맺혔지만 고추를 따지 못하고 있다. 차마 건조장에 싣고 가고 싶지는 않아서이다. 단 한 포기도 병이 안 걸렸지만 뻔히 눈 뜨고 고추가 곪아 빠지는 걸 보면서도 고추를 따지 못하니 안절부절이다. 비닐하우스 건조장이라도 하나 만들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