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통해 내가 배운다

아이들은 나를 보고 배운다

등록 2003.09.04 14:06수정 2003.09.0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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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 교사라서 그런지 나는 이웃집 아이들의 말을 예사로 듣지 않는 편이다.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인 민재가 엄마에게 한 말을 민재엄마를 통해 듣고 온 아내에게 우연히 듣게 되었다. 민재엄마의 대수롭지 않은 듯한 태도에 비하면 내가 들은 그 이야기는 사뭇 심각하게 느껴졌다.


"진숙이 엄마, 자기 에미를 보고 도둑놈이니 사기꾼이니 하는 아이를 본 적 있나요?"
"아니, 왜 또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요?"
"글쎄, 우리 민재가 나를 보고 도둑놈이라잖아요."
"그 놈이 막돼먹은 놈이 아닌데 그럴 리가 있나, 무슨 이유가 있겠지. 도대체 왜 그랬대요?"

민재엄마의 얘기인즉 동생인 민재가 형 민영이와는 너무 다르다는 거였다. 쉽게 말하면 형인 민영이는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여전히 말 잘 듣는 아이이고, 동생 민재는 아직 어리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해서 비판적인 발언을 곧잘 한다고 했다.

"내 귀에는 아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고 자랑하는 것 같이 들리는데, 아까 엄마보고 도둑놈이라고 했다는 말은 또 뭔가요?"
아내가 물었더니,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원무과에서 병원비를 깎아달라고 했더니 안된다길래 집에 갈 버스비가 없다고 하고 이천 원을 덜 주면서 억지로 깎았답니다. 그랬더니 글쎄, 민재가 엄마는 사기꾼이라면서 자가용을 몰고 갔는데 무슨 버스비가 필요하냐고 하면서 날 보고 도둑놈 심뽀를 가졌다잖아요?"라고 민재엄마가 말했다.

언젠가 아내에게 해 준 말이 생각이 났다.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을 경험해보면 사랑은 아무리 줘도 지나친 법이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과보호보다는 항상 사랑이 부족한 결손가정에 더 큰 문제가 있는 법이다."

나의 이 말은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는 잘못된 길로 가다가도, 자신을 믿고 사랑을 준 사람을 배신할 수 없어서 바른 길로 되돌아오게 되어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마보이로 자라준 민영이가 문제일까, 부모마저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민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병원비는 절대 할인할 수 없다고만 믿고 그런 거짓말은 엄두도 내지 않는 집사람이 알뜰하지 않아서인가? 이해관계가 얽매인 곳에는 각박한 계산이 앞서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부모가 사는 모습을 보고 진실만을 무기라고 믿고 있는 진숙이가 과연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아이들을 잘못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고 한다. 말 잘 듣는 민영이가 자라서 교과서적이지 않은 사회 현실에 부딪치게 되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자기가 책임지는 훈련이 돼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럽게 의식화될 수 있는 법이다. 신체적인 과보호나 물질적인 과보호보다 민재와 달리 엄마의 행위에 대해 비판할 줄 모르는 민영이야말로 정신적인 우산 속에 갇혀서 저항력 없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복학을 앞두고 있지만 2년 전 진숙이가 교대 휴학을 선언했을 때는 정말 난감했다. 중학교 때 어느 선생님께서 '애들아,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봉화에서 고추 따는 아지매 된대이' 라는 말을 듣고 상처를 받았던 아이가, 교대를 가서 교사가 되는 길을 가고 있는 교대 선배 언니들이 부정행위를 하더라도 학점을 잘 받아서 대도시에 빨리 부임해가야겠다는 소망을 자연스럽게 피력한다거나 최연소 교감이 되겠다는 꿈(?)을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휴학을 결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여행도 하고 책도 읽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그 동안의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은 아닌 것 같다. 결국 부모가 시키는 대로 말 잘 듣던 아이가 자기 정체성을 찾겠다고 독립을 선언한 것에 다름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조금 둘러서 가더라도 올곧은 교사가 될 수만 있다면 결코 늦은 선택이 아닌 것이다. 강신주의 '세계를 놀이터 삼아'라는 책을 읽고 쓴 진숙이의 독자서평을 일부 전함으로써 나를 보고 배우는 아이들을 통해서 나 또한 배우고 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요즈음 내 안의 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동안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 안의 내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 표현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의 자기 (흔히 자아라고도 하고, 본성, 본능, 본질, 이름이야 어쨌든 좋다) 와 얼마나 연결되어 그 목소리를 들어가며, 그것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지… 학교 공부를 죽기보다 하기 싫지만, 대학을 가기 위해서, 혹은 부모님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혹은 친구를 앞지르기 위해서, 혹은 자기도 모르는 이유로 밤낮 없이 공부기계가 되어버리는 학생들….

직장상사, 직장 내 경쟁이 목을 조르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혹은 남들이, 사회가 말하는 성공이란 걸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자기개발이란 이름으로 영어공부를 해야하고, 몇 분이라도 일찍 출근해야하고, 퇴근후 술자리에 빠지면 안 되는 샐러리맨들…. 시야를 꽉 막은, 쳐다볼 곳 하나 없는 빌딩 숲 속에서 자동차가 뿜어내는 매연으로 호흡하며 교통체증 안에서 갑갑해하지만, 뭔가(?)를 이루기 위해 혹은 뒤쳐지지 않기 위해, 혹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절대 떠날 수 없는 터전을 밟고 사는 도시인들….

국가적인 보육시스템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느라, 혹은 가부장적인 남편의 눈치와 요구로, 혹은 사회적인 압박으로 타/의/에 의해 자기의 일을 선택하지 못하고 주부로서만 살아가야 하는 많은 엄마들…. 자기 안의 자기의 목소리는 들으려 하지 않고, 귀기울이지 않으면 점점 그 목소리가 엷어져서 나중엔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조차 잊혀지는 것 같다.-(중략)-

나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인간에겐 자기 안의 목소리가 있고, 그 목소리, 본성을 따라 살고자 하는 욕망과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믿기만 한다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한 중에 세계를 놀이터 삼아 빛나게 살아온, 그리고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아직은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내 모습이지만, 내 안의 내 목소리에 귀기울이려 노력하기 시작한 지금, 충분히 스스로 매력적으로 빛나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갈 내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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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영주고등학교, 선영여고 교사. 한국작가회의 회원. 대경작가회의, 영주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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