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할 나위 없이 강렬한 '예술혼'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에곤 실레의 '일기'를 들여다보자

등록 2003.09.04 23:32수정 2003.09.0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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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생애를 소재로 한 영화 하면 쉽게 떠오르는 것이 36세로 생을 마감한 모딜리아니의 삶을 다룬 <몽파르나스의 등불>(1958)이다.

자크 라벨이 감독한 이 작품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가난 속에서 과음과 방랑을 일삼고 여러 카페를 전전하며 자신의 작품을 팔다가 결국에는 병원에서 숨을 거둔 예술가 모딜리아니의 생애를, 아름다운 아내와 냉혹한 화상을 배경으로 전개시킨 훌륭한 드라마다.


그렇다면 모딜리아니와 거의 동시대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과 그 주변에서 살다가 그보다 2년 앞서 세상을 떠난 에곤 실레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 차이는 <몽파르나스의 등불>과 <에곤 실레>라는 두 영화가 가진 차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모딜리아니와 에곤 실레가 보여 준 삶의 내용 자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저자 구로이 센지는 우연히 보게 된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에 덧붙여 소개된 에곤 실레와 만나게 된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을 더듬기 위해서 그의 정신적 스승이자 벗이었던 클림트에 가려져 있던 그를 요절한 예술가들의 계보 위에 ‘아름답게, 고요하고 편안하게, 서늘할 정도로 완벽하게 휴식하는 세계를 이 세상으로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라고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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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에 서 소개하고 있는 수 십 점의 작품들은 28년이라는 실레의 짧은 생애가 긴장된 공기 속에 조용히 침잠해 있는 ‘내면을 기록한 일기’와 같은 강렬한 인상을 준다.

“무지막지한 선생들은 항상 나의 적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최고의 감정은 종교와 예술이다. 자연은 자연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신이 존재하며, 나는 신을 강렬하게 느낀다. 지극히 강렬하게,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하게.”

1890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도나우 강변의 작은 마을 툴른에서 태어난 실레는 획일화된 김나지움의 ‘생기 없는’ 교육 방식을 못 견뎌하는 신경질적인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공부는 안 하고 그림만 그려 가족들을 걱정시켜 왔던 실레의 회화에 대한 열정은 열여섯 살 때에야 비로소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906년 실레는 빈 미술 아카데미에 합격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 가지 재미있는 비교를 시도하고 있는데, 바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와 에곤 실레와의 비교가 그것이다. 실레보다 1년 먼저 미술 아카데미에 응시하였다가 떨어진 히틀러의 입시 제출작 <산 풍경>을 통해서 저자는 그의 인간 부재 문제를 평가하고 있다. 서로 상이한 삶의 궤적을 그림을 통해 나눠가졌던 동시대의 두 청년은 히틀러가 느낀 시대의 그림자를 실레의 그림에서 찾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을 통해 재평가된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학교 교육을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생각하며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만 몰두해 온 실레는 자신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해줄 최초의 장이 바로 미술 아카데미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지만 그 곳 역시 실레의 염원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에곤 실레는 두 가지 큰 사건을 겪는다. 하나는 그의 예술 인생을 결정하는 계기가 된 구스타프 클림트와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미술 아카데미를 자퇴하여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과의 ‘새로운 예술가 그룹’을 결성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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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레가 만난 것은 화가로서의 클림트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실레를 논할 때 구태의연하게 등장하는 클림트와의 유사성은 그의 작품이 감내해야만 했던 몇몇 논란의 여지를 직접 읽는 이들에게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또, 잘 익은 열매가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에서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경과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음을 실레의 글을 직접 인용해 밝히고 있다.

“모든 새로운 예술가는 본래 자기 혼자서, 자신을 위해서만 창조하며,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창조한다. 그들은 모든 형태를 창조해 내고, 모든 형태를 그려낸다. 예술가는 한 시대를, 그 삶의 일부를 나타낸다. 언제나 존재 속에서의 위대한 한 가지 체험에 의해.”

1910년부터 그가 그린 작품들, 특히 다수의 자화상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을 경우 그의 체액에 젖은 고통에 찬 언어가 열거돼 있는 듯한 인상을 도저히 떨칠 수 없게 된다. 특히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실레 자신의 초상은 직접 성기를 드러내고 있거나 벌거벗은 나신들을 여과 없이 그려낸 것들이 많은 까닭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 절실한 젊은 예술가의 의지가 현현된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다.

실레가 신들린 듯이 연필로, 수채화로, 구아슈로 많은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하는 시기와 클림트의 영향에서 벗어난 시기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대목은 이 책의 빛나는 가치이다. 클림트의 제자라고만 알려져 있는 기존의 상식틀을 과감하게 깨고 저자 구로이 센지가 실레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조명해 나가는 뚝심을 발휘하는 순간도 바로 이 부분부터다.

실레의 정신적 연인이었던 발리를 만났던 일화와 함께 에곤 실레가 미성년 유괴 혐의로 감옥에 갇히게 된 칠흙과도 같은 여백을 메우기 위한 몸부림을 직접 확인해나가는 순간 다른 화가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독특한 향기가 나기 시작한다.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은 죽을 때까지 구부린 왼손을 머리 뒤에 깔고, 오른손은 수염 난 뺨에 가볍게 댄 모습이 아주 짧은 순간 상쾌한 오수를 즐기는 듯 ‘소풍 떠나는’ 늙은 시인처럼 조용하게 삶의 소묘를 그렸던 화가 에곤 실레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일기이다.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구로이 센지 지음, 김은주 옮김,
다빈치,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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