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하지만 실레가 만난 것은 화가로서의 클림트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실레를 논할 때 구태의연하게 등장하는 클림트와의 유사성은 그의 작품이 감내해야만 했던 몇몇 논란의 여지를 직접 읽는 이들에게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또, 잘 익은 열매가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에서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경과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음을 실레의 글을 직접 인용해 밝히고 있다.
“모든 새로운 예술가는 본래 자기 혼자서, 자신을 위해서만 창조하며,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창조한다. 그들은 모든 형태를 창조해 내고, 모든 형태를 그려낸다. 예술가는 한 시대를, 그 삶의 일부를 나타낸다. 언제나 존재 속에서의 위대한 한 가지 체험에 의해.”
1910년부터 그가 그린 작품들, 특히 다수의 자화상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을 경우 그의 체액에 젖은 고통에 찬 언어가 열거돼 있는 듯한 인상을 도저히 떨칠 수 없게 된다. 특히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실레 자신의 초상은 직접 성기를 드러내고 있거나 벌거벗은 나신들을 여과 없이 그려낸 것들이 많은 까닭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 절실한 젊은 예술가의 의지가 현현된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다.
실레가 신들린 듯이 연필로, 수채화로, 구아슈로 많은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하는 시기와 클림트의 영향에서 벗어난 시기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대목은 이 책의 빛나는 가치이다. 클림트의 제자라고만 알려져 있는 기존의 상식틀을 과감하게 깨고 저자 구로이 센지가 실레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조명해 나가는 뚝심을 발휘하는 순간도 바로 이 부분부터다.
실레의 정신적 연인이었던 발리를 만났던 일화와 함께 에곤 실레가 미성년 유괴 혐의로 감옥에 갇히게 된 칠흙과도 같은 여백을 메우기 위한 몸부림을 직접 확인해나가는 순간 다른 화가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독특한 향기가 나기 시작한다.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은 죽을 때까지 구부린 왼손을 머리 뒤에 깔고, 오른손은 수염 난 뺨에 가볍게 댄 모습이 아주 짧은 순간 상쾌한 오수를 즐기는 듯 ‘소풍 떠나는’ 늙은 시인처럼 조용하게 삶의 소묘를 그렸던 화가 에곤 실레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일기이다.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구로이 센지 지음, 김은주 옮김,
다빈치,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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