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 우는 소리를 들은 적 있나요?

한반도 마지막 성당 홍도공소의 어떤 만남

등록 2003.09.06 04:37수정 2003.09.1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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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뭍에서 가장 먼 마지막 성당 홍도공소
115㎞ 뭍에서 가장 먼 마지막 성당 홍도공소김대호
당신 가고 나서
뒤돌아서니
어디 발 디딜 땅
한 곳 없습니다.
<김용택 詩 땅>


섬이 우는 소리를 들은 적 있습니까?
뭍을 떠나 115㎞.
바다의 끝을 보고서야 만난 섬 홍도, 거기서도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이 나라의 마지막 성당에서 밤바다를 본 적이 있습니다.


밤바다를 받아 안은 섬은 형체도 소리도 없는 공명(共鳴)으로 사람의 뼛속으로 스며들어 웁니다. 박용택 선생님이 '봄밤'이라는 시를 통해 그리 말씀 하셨지요. '말이 되지 않는…말로는 나오지 않는 그리움이 있는 줄 이제야 알겠다'고 말입니다. 그리움에 사무쳐 토해 낸 피가 제 몸뚱이(바위)를 붉게 뒤덮어도 성이 안차 저리도 날이 새도록 가슴 에이게 울어대는 것이 홍도(紅島)입니다.

성모상 사이로 보이는 홍도 앞 바다
성모상 사이로 보이는 홍도 앞 바다김대호
신새벽, 마흔 한살 어미는 큰누이가 보름날밤을 지새워 만든 발장(재래식 김을 건조하는 기구)을 한 짐 머리에 이고 산 너머 대덕으로 장보러 가고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보튼 젖을 찾던 일곱 살 아이는 문득 스친 허무함에 깨어 섧게 울었죠.

'우리 대호 야물제(씩씩하지) 엄마가 대덕장서 끔(껌) 사가꼬(사 가지고) 온다고 해쓴께 고만 울어라.'

스므살의 큰누이가 쇠죽 아궁이에 묻어 둔 고구마를 손에 쥐어주고서야 이미 콧물로 범벅이 된 옷소매로 눈물을 훔칩니다.

해가 앞산 바위 가랑이를 걸치면 온다는 큰누이의 말대답을 열댓번 듣고서야 어머니는 신작로 끝 아지랑이를 타고 (지금은 저수지에 잠긴)초등학교 앞 실개천을 건너십니다.

아직 여물지 못한 달리기에 엊그제 술래잡기하다 깨진 무릎이 성할 리 없지만 깨알같던 어머니는 금세 산더미가 되어 어린 아들을 보듬습니다.


나는 아직도 땀방울 송골송골한 콧날위로 흐르던 어머니의 오진 미소와 기다림의 보답으로 짐 보퉁이에서 꺼내주시던 눈깔사탕의 단맛을 잊지 못합니다.

홍도는 길도 온통 붉은색이다.
홍도는 길도 온통 붉은색이다.김대호
그때부터 세상은 더이상 커지지를 못하고 한없이 작아져 지금은 돋보기로도 볼 수 없을 만큼 작아져 버렸지요. 철이 들고 내게 어미 품처럼 한나절을 참지 못할 그리운 것이 있었던가 생각해 봅니다.


홍도성당엔 신부님이 없습니다. 신유박해로 흑산도로 귀향 온 자산 정약전 선생이 200여년 전 남기고 간 흑산도 성당에서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교인들을 위해 1주일에 한번 미사를 집전하러 올뿐입니다.
텅 빈 예배당 성모상 사이로 간간이 흐르는 어선의 희미한 불빛과 취기 오른 50대 가장의 것으로 보이는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는 오열처럼 벌써 서너 번은 반복됩니다.

내가 녀석을 처음 만난 건 섬 도(島)자 대신 길 도(道)자를 쓰는 제주도(濟州道)를 제외하고 가장 먼 곳에 있다는 홍도성당에서 였습니다.

녀석은 홍도섬이 밤마다 소리내어 운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녀석은 신 오른 단골래(무당)의 무딘 발바닥을 가르고도 남을 만치 날 세운 작두 날처럼 세상에 덤비는 녀석이었습니다.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말 못하는 내 가슴은 이 밤도 울어야 하나' 음정박자가 사라진 녀석의 '꿈속의 사랑(가수 이승재의 노래)'은 질긴 파도 소리에 포말로 부서졌습니다.

가을이 스며들기 시작한 홍도등대
가을이 스며들기 시작한 홍도등대김대호
'세월이 흐르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는 나의 공식화된 충고에 녀석은 코웃음치며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랑은 그것이 나락이라도 어쩔 수 없어 끝을 보아야 하는 운명 같은 것이라'고 했죠.

나의 섬은 여태까지 진짜 사랑을 담을 심장을 달고 나오지 못하고도 살아있는 배냇병신 섬이거나 사랑을 잃는 게 두려워 사랑을 밀어내고 뭍으로 향하는 모든 통로를 닫아버린 청맹과니 섬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적을 가르는 공허한 파도소리만을 듣고 섬의 울음을 들었다고 거짓말하던 나는 어느 날 날선 면도날에 베이는 듯한 아픔 뒤끝에 가슴을 온통 헤집고서야 온통 붉게 피멍든 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트리나 폴러스('꽃들에게 희망을'의 저자)는 자고 나면 하늘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생기는 줄무늬애벌레들의 하늘기둥을 몇 번이나 허물고서야 노랑무늬애벌레처럼 변태(變態) 할 수 있었을까요?

어렵게 발견하고도 섬을 끄집어 내지 못한 내게 사랑은 여전히 허물을 벗지 못한 애벌레입니다.

애국가가 울릴 때 TV에 등장했던 기암괴석
애국가가 울릴 때 TV에 등장했던 기암괴석김대호
시간이 흐르고 더 이상 그 사람의 얼굴이 꿈속에서도 기억나지 않을 때 홀로 홍도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홍도성당의 종소리는 가슴속에 누구에게도 말못할 가슴 애린 사랑을 간직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익숙했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부재(不在)하게 됐을 때의 허무함을 아는 사람들이면 더더욱 좋겠지요.

섬의 울음이 첨탑 속으로 스며들면 무쇠 종은 형체도 소리도 없이 '뎅뎅' 울려 퍼지고 그 공명을 타고 나의 좌심실 어디쯤 똬리를 틀고 숨어 있다가 문득문득 바늘이 되어 심장을 찌르던 그 사람이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동백꽃이며 산에피(원추리)가 지고 딱 한달 뒤 붉게 농익은 가을이 오면 나는 다시 홍도섬을 찾아 성당 첨탑 밑에 앉아있을 녀석을 만나려고 합니다.

가을이 오기 전에 섬은 아마도 내 가슴속서 나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선들이 쉬어가는 홍도 앞바다 전경
어선들이 쉬어가는 홍도 앞바다 전경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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