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주변을 온통 포위한 이름모를 들꽃김대호
또한 중국 당나라와 교역이 이뤄진 영암군 당포(唐浦)와 마찬가지로 이곳 포구인접 마을 이름이 당전(唐前)이고 보면 이곳에도 청자와 관련해 당나라로 나아가던 포구가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발견된 4백여기의 옛 가마터 중 188기가 강진군 일대에 집중돼 있고 그 규모가 대구면 일대에만 모두 18만여평 규모에 퍼져 있는 것으로 볼 때 가히 청자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현존하는 국내 국보와 보물급 중 80%가 용운리 일대에서 만들어 졌고 나라가 외세에 유린당하던 시절 일본과 프랑스 등 세계 곳곳으로 도둑질 당한 명품청자의 대부분도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껴묻거리(부장품) 도굴현장을 보았다는 김모씨(남·71)는 “죽창으로 쑤셔서 ‘텅텅’ 소리가 나먼 거그가 독널장(석관묘)이여 거그를 쇠꼬챙이로 쑤시먼 새금파리(사기그릇의 파편 여기서는 청자 파편)가 묻어 나오면 십중팔구 청자가 묻혀 있제. 그때 쌀 한말 값으로 팔려 나간 것이 지금은 수억원이 넘는다고 하드마. 일본으로 많이 물건너 가브럿제” 라고 증언한다.
중앙정부인 경주와 개성에서 천리길을 넘는 이곳 강진에서 부와 권력의 상징인 청기와 등 고급청자가 구워졌다는 것은 신라 말 이곳에 터를 잡은 이들이 중앙권력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이후 장보고대사가 암살되고 청해진이 폐허로 변하면서 대륙을 호령하고자 했던 발해의 꿈이 그러했듯이 대양을 경영하고자 했던 해상왕국의 꿈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억겁(億劫)의 세월을 기다려온 미륵세상에 대한 동경을 영원토록 잊지 말자고 상사화를 탱화에 담았듯이 대양을 지배한 해상왕국에 대한 그리움과 죽어간 이들의 원혼을 천년동안 간직하고자 상감을 새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