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16)-지리산 실상사

농사꾼처럼 거무튀튀한 약사여래 부처님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등록 2003.09.08 15:52수정 2003.09.08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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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실상사로 들어가는 입구엔 석장승이 있다. 왕방울 만한 눈이 툭 불거지고 큼지막한 코가 해학적이다.

실상사로 들어가는 입구엔 석장승이 있다. 왕방울 만한 눈이 툭 불거지고 큼지막한 코가 해학적이다. ⓒ 임윤수

지리산엔 그 이름에 걸맞게 산자락과 골짜기에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사찰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화엄사와 천은사 그리고 칠불사, 쌍계사, 대원사, 영원사, 벽송사, 연곡사 등 대개의 절들은 지리산 계곡에 터를 잡고 있으나 실상사는 지리산이 펼친 넓은 들판 한 가운데 기둥을 내려 천년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실상사를 찾게 되면 지금껏 절에서 느끼던 정적인 느낌이 싹 달라진다. 어느 절에서도 볼 수 없던 대자보가 보이고 기아에 허덕이는 북녘 아이들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역동적 감흥이 시작된다.


내용이야 그때 그때 달라지겠지만 종단과 스님들 자신을 꾸짖는 내용의 글로부터 환경에 대한 관심과 경각심을 환기시키는 글들도 있다. 종단 내에 벌어졌던 일련의 일들에 대하여 신랄하게 꾸짖는 준엄한 내용도 있다. 너무 직설적이며 솔직한 표현이 꾸짖음이기보다는 자아비판적 고행의 표현으로 가슴에 다가왔다.

동족이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북녘아이들의 피골상접한 사진은 맛 타령에 입맛 타령을 달고 다니던, 허구와 허영에 찬 세 치 혀의 간사스러움과 입으로만 나발거리며 보시를 게을리한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

a 일주문이라도 대신하려는 듯 소박하게 만들어진 문틀형태의 안내판이 길손을 맞이하고 있다.

일주문이라도 대신하려는 듯 소박하게 만들어진 문틀형태의 안내판이 길손을 맞이하고 있다. ⓒ 임윤수

오늘날 실상사 하면 '인드라망'을 연상하게 한다. 인드라망(因多羅萬)이란 '제석천의 궁전을 장엄하는 그물 망'을 뜻하는 말로 '만물이 모두 상관관계를 갖고 연결돼 있다'는 연기적 세계관을 의미한다고 한다.

인간들이 아무리 제 잘났다 날뛰어도 연기적 관계는 벗어나지 못함을 일깨워주는 큰 가르침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실상사에서는 생명체의 귀함을 일깨우는 이런저런 행사가 많이 열리는 듯하다.

실상사 천왕문으로 들어서는 분위기는 여느 사회단체의 역동적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천년 고찰이라고 하지만 대자보와 전시물에선 정의를 부르짖고 있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의 당찬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얼마 전 '새만금 갯벌을 살리겠다'고, '일체중생의 평화'를 부르짖으며 부안 새만금 갯벌부터 800리 서울까지 아스팔트길에 골수 같은 땀 흩뿌리며 삼보일배를 하였던 수경스님이 이 실상사 스님이다.

많고 많은 다른 스님들에 앞서 수경스님이 삼보일배에 앞장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산선문의 맏형이라는 실상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a 저만치 천왕문이 보인다. 여느 절들과는 달리 벽면에 자연풍경을 그려 넣은 것이 인상적이다.

저만치 천왕문이 보인다. 여느 절들과는 달리 벽면에 자연풍경을 그려 넣은 것이 인상적이다. ⓒ 임윤수

실상사를 상징하는 말들은 꽤나 다양하다. 그 중 우선 구산선문(九山禪問)이란 말을 떠올리면 틀림없을 듯하다. 구산선문은 귀족과 왕실에 결탁하여 타락한 교종불교에 반기를 들고 9세기에 접어들면서 신진 지식인들에 의해 수용된 아홉 산에 뿌리를 내린 선종불교의 상징적 사찰들이다.

선문이란 달마대사가 갈대 잎을 타고 중국으로 건너온 이래 꽃피운 선법(禪法)을 신라의 젊은 스님들이 배워 와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선법이란 참신하고 개혁적인 신사조운동이었다. 인과율에 의한 기존의 교종불교는 사람의 운명이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적 인식이었다. 선종의 사상은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의식을 제공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움을 시작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어려움이 전제된다. 현실의 정치에서 기득권자들과 개혁세력들의 갈등쯤은 아무 것도 아닐 만큼 그 어려움은 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그 분야가 삶의 가치를 가늠하는 종교분야임에 더 했으리라 짐작된다.

a 천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석등과 석탑이 보이고 그 뒤로 고색창연한 보광전이 보인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석등과 석탑이 보이고 그 뒤로 고색창연한 보광전이 보인다. ⓒ 임윤수

장흥 보림사의 가지산문(도의), 남원 실상사의 실상산문(홍척), 곡성 태안사의 동리산문(혜철), 강릉 굴산사의 사굴산문(범일), 창원 봉림사의 봉림산문(현욱), 영월 흥법사의 사자산문(도윤), 문경 봉암사의 희양산문(지증), 보령 성주사의 성주산문(무염), 해주 광조사의 수미산문(이엄)가 이른바 구산선문 사찰이며 괄호 안이 그 창시자들이다.

이 구산선문 중에서도 지리산 실상사가 최초로 문을 연 선문이다.

실상사는 창건 배경부터가 불의에 항거한 사회운동이며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참여정신에 있는 듯하다. 그런 역사가 인드라망을 강조하게 되고 수경스님이 삼보일배에 앞장서도록 한 배경이 된 듯하다.

지리산을 들어서는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마천 방면으로 가다보면 만수천(萬壽川)변을 따르게 된다.

만수천과 뱀사골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 산내면 면소재지, 즉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가다보면 나타나는 삼거리 부근이다. 이 삼거리에서 고개를 동쪽을 돌리면 손끝 대신 눈 끝에 천왕봉이 와 닿는다. 그 아래로 산내면 입석리 들판이 넓게 펼쳐지는데 그곳에 실상사가 자리잡고 있다.

a 보광전 우측 뚝 떨어진 곳에 약사전이 있다.

보광전 우측 뚝 떨어진 곳에 약사전이 있다. ⓒ 임윤수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동으로는 천왕봉과 눈 맞추고 남쪽으론 반야봉을 의지하고 있다. 서쪽이 심원 달궁이며 북쪽으로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길지에 터를 잡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찰 대부분은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천왕봉을 어머니의 가슴이라고 한다면 실상사가 있는 들판은 어머니가 두른 행주치마의 가운데쯤에 해당한다.

뭔가를 따뜻하게 보관하고자 할 때 어머니들은 행주치마 가운데 그것을 싸서 옮겼다. 행주치마의 가운데는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이며 사랑의 자리이다. 지리산의 기가 머금고 혈이 맺히는 그 자리에 실상사가 있다.

실상사는 서기 828년인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에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서 유학하며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을 배운 뒤 귀국하여 2년 동안 전국의 산을 다니다 현재의 터에 정착하여 창건했다고 한다.

a 약사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거무튀튀한 색깔에 투박한 형상으로 농사꾼 부모님처럼 푸근한 느낌을 준다. 지리산의 기가 일본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하여 땅바닥에 그냥 모셔진 부처님이란다.

약사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거무튀튀한 색깔에 투박한 형상으로 농사꾼 부모님처럼 푸근한 느낌을 준다. 지리산의 기가 일본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하여 땅바닥에 그냥 모셔진 부처님이란다. ⓒ 임윤수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가 고향인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자신의 고향에 절을 세우니 이가 곧 구산선문 최초의 절이 되었다. 당시의 임금인 흥덕왕은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려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 선강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고 한다.

실상사는 창건 이후 여러 차례 화재에 의한 전소와 중수 복원이 반복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6·25 때도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말못할 수난을 겪었지만 다행스럽게 사찰이 전화되는 등의 불상사는 없었다고 한다.

실상사의 호국정신은 선종의 출현이 그러하고 인드라망의 기본이 그러하듯 민족의 암울한 시기였던 일제침략시기와도 무관하지 않음을 약사전을 지키고 있는 보살님의 안내에서 들을 수 있다.

약사전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령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a 경내에 있는 소나무 사이로 보광전과 약사전 그리고 명부전이 보인다.

경내에 있는 소나무 사이로 보광전과 약사전 그리고 명부전이 보인다. ⓒ 임윤수

실상사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도 전해지고 있다 한다. 이러한 구전을 증명이라도 하듯 실상사 보광전에 있는 범종에는 일본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고 예불을 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게 된다고 한다.

스님들과 일반인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가고 있다.

만수천 다리를 건너 논두렁 같은 진입로를 따라 걷다보면 일주문 없이 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정면에 석등과 양쪽에 선 석탑이 보이고 뒤로 고색창연한 본전이 보이는데 이 본전은 보광전이다.

보광전 우측 저만치에 또 하나의 전각이 있으니 이가 바로 약사전이다. 약사전과 보광전 중간쯤에 직각으로 배치된 전각은 명부전(지장전)이다.

a 맞배지붕 형태의 오래된 건물이 시선을 편안하게 해 준다.

맞배지붕 형태의 오래된 건물이 시선을 편안하게 해 준다. ⓒ 임윤수

약사전에는 여느 절들의 금색 찬란한 부처님들과는 달리 거무튀튀한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경배스러워 거리감조차 생기는 여타의 부처님과는 달리 방금 밖에서 농사짓고 들어와서 쉬고 있는 투박한 농사꾼 부모와 같은 편한 느낌이다.

실상사가 귀족과 왕실에 결탁하여 타락한 교종불교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선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런 친근한 모습의 불상이 제격에 어울릴 듯 하다. 대개의 불상들은 높은 좌대에 모셔진 것이 일반이지만 약사여래 불상은 그렇지 않다. 백두대간의 좋은 기가 일본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맨 바닥에 꾹 눌러앉아 계신 모습이다.

천왕문을 들어선 우측 바로 앞에는 범종각이 있으며 보광전 좌측엔 커다란 소나무가 있고 그 뒤쪽으로 칠성각도 있다.

경내 좌측으로 요사채가 있으며 요사채와 뒷간사이를 따라 올라가면 연꽃 가득한 방죽이 나온다. 그곳에서 몇 걸음 더 걷게되면 극락전으로 들어서게 되며 주변에는 이런저런 보물들이 즐비하다.

a 연지를 지나 찾게되는 극락전은 작고 아담하다. 극락전 주변은 온통 보고(寶庫)다.

연지를 지나 찾게되는 극락전은 작고 아담하다. 극락전 주변은 온통 보고(寶庫)다. ⓒ 임윤수

천왕문과 저만큼 안쪽에 있는 석등과의 사이엔 실상사 규모를 고증이라도 하려는 듯 발굴을 한 상태로 주춧돌이 여기저기 보인다.

요즘 실상사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은 '생명공동체' 아닌가 모르겠다. 생명공동체란 '일체중생의 평화'를 달리 표현한 것이며 실천이리라. 실상사에는 다른 곳에서 '해우소'로 표기한 화장실을 알리는 '뒷간'이란 푯말도 볼 수 있다.

뒷간은 단순히 생리적 배설만을 해결하는 공간이 아니다. 뒷간이란 농약과 화학비료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생명의 먹거리를 키워내는 소중한 거름이 만들어지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쌀을 비롯한 온갖 채소들은 똥과 오줌이 형태를 달리 한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한다.

냄새가 나지만 땅을 살리고 먹거리를 풍부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똥부터 대접하자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깨끗해 보이지만 하천과 강을 오염시키는 수세식 화장실을 거부하고 냄새 퀴퀴하지만 내면적 삶을 풍부하게 해줄 뒷간을 고집하는 그 정신이 바로 선문의 자존심이며 실천인 듯하다.

a 재래식 화장실인 실상사 뒷간의 모습으로, 실상사에서는 이곳에서 거름을 생산하여 논과 밭에 뿌려줌으로 먹거리로 돌려 받는다.

재래식 화장실인 실상사 뒷간의 모습으로, 실상사에서는 이곳에서 거름을 생산하여 논과 밭에 뿌려줌으로 먹거리로 돌려 받는다. ⓒ 임윤수

실상사 뒷간에서 맞게되는 똥 냄새는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무형의 가르침이며 설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상사 여기저기에 산재한 십수 점의 보물과 유형문화재들이 실상사의 오랜 역사를 고증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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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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