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바퀴에 감기는 햇살

<호주여행기4>퍼스-로트네스트 아일랜드, 2002년 12월 22일 일요일

등록 2003.09.09 00:51수정 2003.09.13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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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 이진

전철을 타고 퍼스역에서 프리멘틀(Fremantle)로 가는 길, 창밖으로 별장같은 이쁜집들이 드문드문 잔디밭에 한두 개씩 놓여있다. 노스프리멘틀(North Fremantle)쯤에 왔을 때 바다가 나타났다.

곧 프리멘틀이다. 수출입을 하는 무역항이라 그런지 낡은 컨테이너 박스가 겹겹이 있어 바다가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배를 타고 30분 정도를 가면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다. 가는 길에 고래가 멀리서 온 나를 구경하러 오지 않을까 하여 바다를 응시했다.

관광안내소에서 무료안내지를 챙기고 투어버스 대신 자전거를 대여했다. 기어가 있는 것은 20A$, 기어가 없는 것은 15A$, 바구니를 달면 2A$이 추가되었다.

이제 달린다. 사람은 있는 듯 없는 듯 심심하지 않다. 길이 참 좋다. 무엇보다도 코스가 맘에 든다. 힘들여 올라가면 다음엔 쉽게 내려올 수 있는 완만한 굴곡의 반복이다. 평탄한 길을 달린다 싶으면 어느새 페달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어느덧 언덕의 중반을 지난다. 지나다 보니 철로가 있는데 그의 역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자전거를 세우고 바닷가로 내려간다. 발이 시원하다. 그늘에 누워 책을 편다. 머리 위로 자전거가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아 책을 보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음악을 들으려다가 가방에 넣어 버린다. 그 어떤 목소리 보다도 그 어떤 연주보다도 조금씩 밀려와서 나를 적시는 이 물소리가 좋다. 물가로 발을 뻗고 엎어져서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를 읽는다. 일정한 리듬으로 밀물이 다가와 내 발등을 간지럽힌다. 물장구를 쳐본다.

a 쿼카

쿼카 ⓒ 이진

다시 달리다가 섰다. 쿼카(Quokkas)가 앞에 나타났다.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는 원주민어로 쥐들이 사는 섬이다. 쥐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캥거루처럼 아기주머니가 있어 새끼를 넣고 콩콩 뛰어다닌다. 이 동물이 바로 쿼카다. 바구니 앞으로 다가오더니 빤히 올려다본다. 포테토칩을 주자 얼른 받아먹는다.

또 다시 달린다. 자전거의 감기는 햇살을 받는 오늘, 밝아지고 밝아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깨끗하고 투명한 바람. 건조해서인지 훗훗함도 없고 자유롭다.


바다 위엔 뱃길이 나고 나는 뒤를 돌아본다. 점점 우리와 하나였던 로트네스트 아일랜드가 멀어진다. 한적하고 아늑하던 그 곳에 노을이 진다. 배는 멀어지고 노을은 나를 따라온다. 저기 로트네스트 아일랜드가 일몰 속으로 사라진다.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

전철안까지 일몰의 장관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차츰차츰 꿈 속으로의 여행을 시작하였다. 다시, 페달을 밟는다.

내일 우리는 애들레이드(Adelaide)로 떠난다. 타쿠미와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어제 우리나라 재래시장 같은 수비아코(Subiaco)에서 사 온 닭다리 6개로 닭볶음을 하기로 했다. 수비아코에는 무지 큰 닭다리도 있었다. 마치 타조 다리 같다. 도저히 닭다리같지 않았다. 암튼 닭하고 감자, 당근, 양파 그리고 서양배를 샀다. 고운연두색인데 예뻤다. 우리나라 배와는 달랐다.

집에서 가져간 김치와 닭볶음이 전부였다. 우리는 처음엔 포크로 닭다리를 뜯다가 결국엔 다리를 잡고 뜯어 먹었다. 그가 후식으로 일본과자와 녹차를 대접했다. 일본과자는 우리나라 쌀과자랑 맛이 비슷했다. 그렇게 먹고도 아쉬워서 그가 럼주를 들고 나왔다. 럼앤코크(Rum & Coke)를 마시며 우리는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그는 28살이고 펀드메니저가 되고싶다고 했다. 웃고 떠드는 중에 이런 얘기도 했다. 누나가 있는데 한 번 결혼 했었다고. 그리고 자신은 별로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지니는 결혼해서 알콩달콩 살고싶다며 나와 타꾸미를 타박했다. 또 그는 친구들이랑 커피숍이나 케이크하우스에 가서 예쁘고 맛있는 케이크 먹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친구들과 리스닝(listening)도 하고 스피킹(speaking)도하고.


우리 테이블에 지금 놓여있는 것은 럼주와 콜라와 레몬 그리고 타꾸미가 사다놓은 아주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뿐이다. 저녁준비 때부터 켜 놓은 TV에서는 요즘 호주에서 인기가 가장 좋다는 샤키라(Shakira)가 나와 오브젝션(objection)을 부른다.

a Rottnestisland의 일몰

Rottnestisland의 일몰 ⓒ 이진

음악에 관심이 많단다. 음악듣는 거 좋아한다고 했더니 장르를 묻고 자기가 틀어주겠다며 CD를 가지고 나오는데 엄청나다. 그는 레게를 좋아한단다. 우린 TV를 끄고 잠시 비틀즈를 듣고, 레게를 듣고 하다가 아까 TV에서 노래한 샤키라는 스페인 사람이라 그런지 발음이 별로라며 웃었다.


그는 대화 중간에 이런 말도 했다. 어쩌다가 그가 우리나라 옷을 사입었었는데 너무 질이 안좋아서 이제는 사입지 않는다고. 일본에도 우리나라 상품이 많이 들어간 모양이다. 중요한 건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우리상품이 거의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상품정도였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했지만. 그때 그 이야기를 하던 그의 떫떠름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께 편지를 쓴다. '낼이면 이 곳을 떠나야 합니다. 연초에 시드니에서 하는 불꽃놀이를 보려면 지금 떠나야 합니다. 시티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다시 시간을 내서 들르기로 하고 접습니다. 그게 언제쯤이 될까요? 지니는 여기서 살고 싶다고 합니다. 내일은 인디안퍼시픽을 타고 애들레이드로 갑니다. 그곳은 와이너리(Winery)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리고 유형지가 아닌 최초로 이민자를 위해 만든 도시이기도 하구요. 아버지 저 이제 잘래요. 내일 뵐 게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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