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을 향해 노래하는 야인(野人), 김훈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생각의 나무, 2003)

등록 2003.09.13 13:03수정 2003.09.1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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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칼은 어떻게 만드는 거야?" "손을 보고 만드는 거야. 손을 들여다보고 손하고 비슷하게 만드는 거지. 손이 할 일을 돌이 대신하는 거다." "손이 할 일이 뭐야?" "마음이 할 일을 대신하는 거다. 너도 무언가를 깎거나 자르거나 다듬고 싶을 때가 있지? 그게 사는 거란다. 그러니까 돌칼은 뾰족하고 날카로워지는 거지." ­- 김훈,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 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 -김훈, <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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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 생각의나무

김훈은 첫 번째 세설(世說)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밥은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윤기 흐르는 낱알들이 입 속에서 개별적으로 씹히면서도 전체로서의 조화를 이룬다. 이게 목구멍을 넘어갈 때 느껴지는 그 비릿하고도 매끄러운 촉감, 이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이것이 인륜의 기초이며 사유의 토대인 것이다"(219쪽).

김훈의 두 번째 세설 역시 그 삶의 토대를 다룬다. 그런데 첫 번째 세설이 밥벌이의 정당성을 얘기했다면, 두 번째 세설은 그것의 지겨움을 얘기한다. 그가 조금 더 나이를 먹었다는 것일 수 있고 아직도 노동을 떠들어대는 사회에 대한 반항일 수도 있다.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일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37쪽). 지겹지만 그 지겨움을 떨쳐버릴 수 없는 삶,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밥벌이라는 그 늪, 김훈은 그 삶을 노래한다.

글쓴이소개

1948년 서울 출생. 오랫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지은 책으로는 독서 에세이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선택과 옹호>, 여행 산문집 <문학기행 1, 2>(공저), <풍경과 상처>, <자전거 여행>, <원형의 섬 진도>, 시론집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장편소설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등이 있다. <칼의 노래>로 200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두 번째 세설의 또 다른 화두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아날로그 인간이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시대에 원고지에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글을 쓰는 그의 자세는 아날로그의 삶을 대표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을 뒤처짐이라 여기고 허겁지겁 시대를 뒤따라가려 하지만 김훈은 그러지 않는다. 그는 문명의 자리를 내놓고 시대의 뒤전으로 밀려났지만 여전히 "아날로그가 끌고 나가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고난과 희망에 대하여"(16쪽) 말한다. 그는 여전히 자연과 몸, 그 속에 끼여있는 인간의 삶을 다룬다.

김훈은 세상의 모든 것을, 심지어 디지털의 산물까지도 아날로그의 원고지 속으로 끌어들여 얘기한다. 아무리 추상적인 것도 그의 원고지 속에선 구체적이고 끈끈한 삶의 느낌으로 다시 태어난다. 가장 추상적인 돈마저도 그의 글에선 이퇴계의 초상으로 구체화된다. 그래서 세상을 사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그의 글을 좋아할 수 있고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글과 나 사이의 거리를 잃어버리기 쉽다. 구체적인 얘기로 나라는 또 다른 구체적인 삶을 헤집고 들어올 수 있는 글의 보편성, 김훈의 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세상을 말하는 글은 자칫 어떤 한 이념의 편에 서기 쉽다. 그래야만 살아남는 시대아닌가. 하지만 김훈은 어떤 이념의 편에 서려 하지 않는다. "이념이란 대체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현실 속에서 작동되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나는 그런 질문을 괴로워할 뿐, 거기에 대답하지 못한다"(118쪽). 그러면서 그는 어느 한 편에 서는 것보다 어느 이념도 자유로울 수 없는 보편성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 삶의 보편성을 가지고 이념을 질타한다.


페미니즘의 시대에도 여전히 그는 남자를 얘기하고 남자로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드러낸다. 그는 40∼50대 남자들이 같은 나이 또래 여자들보다 3배나 더 많이 죽는다는 현실을 보며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남자의 '특권'을 이 사회에 반납하고 싶다. 그리고 마누라보다 오래 살아서, 내 마누라가 죽을 때 마누라를 이 세상의 가장자리까지 배웅해 주고 싶다"(44쪽). 논리로 반박할 수 있지만 반박하려면 어느새 삶으로 다가와 그것을 어렵게 하는 것이 김훈의 얘기이다.

이념의 시대, 논쟁의 시대를 살면서 어느 한 편에 다리를 걸치지 않기란 어렵다. 그래서 그는 머물지 못하고 항상 떠돈다. 슬쩍 어느 한 편인양 거짓을 떨 수 있지만 그는 그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직장에서 불화가 생기면 구태여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그냥 내가 떠난다. 불화를 유지하고 불화인 상태로 있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고 생각했다"(256쪽). 그는 주체의 삶이 아니라 야인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의 글은 편향되어 있다. 그런데 그 편향은 이념이나 인물이 아니라 군중, 대중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김훈의 그런 편향은 대중성을 가진다. 그는 가르치려 들거나 자기를 따르라고 설득하지 않는다.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을 대중의 가슴에 와 닿는 보편적인 언어로 풀어낼 뿐이다.

편향되어 있으나 편향되지 않은 글, 그것이 김훈의 글이 가진 힘이다. 논리로 대중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가슴으로 다가가는 노래, 그 비루하고 끈적끈적한 삶을 벗어나려 하지 않고 그 속에서 더 높은 것을 꿈꾸는 야인, 그것이 김훈의 매력이다.

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생각의나무,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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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어서 가입을 했습니다.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거창한(?) 호칭은 싫어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지라 주로 책동네에 글을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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