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가 남긴 상처들을 보듬다

새록새록 새순이 돋아나기를 소망합니다

등록 2003.09.13 17:43수정 2003.09.13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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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태풍이 오기 전날 작은 텃밭의 풍경입니다.

태풍이 오기 전날 작은 텃밭의 풍경입니다. ⓒ 김민수


태풍이 오기 전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작은 텃밭을 사진으로 담아보았습니다. 풍성한 토란잎과 호박순, 그리고 뒤로 보이는 풍성한 검은콩이 가을햇살만 잘 비춰준다면 풍성하게 익어갈 듯합니다.


풍년인지 아닌지는 거둬봐야 안다고 했는데 거반 다 된 농사인데 14호 태풍 '매미'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맞길 수밖에…

그리고 태풍이 제주에 상륙한 날 아침부터 퍼붓기 시작하는 폭우와 강풍으로 감히 밖을 내다 볼 엄두조차 내질 못했습니다. 비가 너무 오니 여기저기에서 빗물이 새고, 태풍에 돌담도 무너지고, 교회 유리창도 몇 장 깨졌습니다.

갑자기 지붕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만 교육관 지붕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뻥뚤린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왜 그리도 야속하던지, 바람 앞에서 인간이 이렇게 나약할 수밖에 없는지 쏟아지는 비를 온 몸으로 맞으며 속타는 마음을 식혔습니다.

마당에 있던 팽나무 가지도 찢어지고,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이 아우성을 칩니다.


이젠 그만 태풍이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입니다.

a 정전으로 태풍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정전으로 태풍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 김민수


정전으로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 무엇인지를 실감하는 순간입니다. 아이들은 마냥 촛불을 켜고 밤을 맞이하는 것이 신나는가 봅니다.

"애들아, 저 촛불을 봐라. 어두울 때 빛이 없다면 어떻겠니? 너희들에게 '빛이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실감나니?"


창틈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옵니다. 틈새가 잘 맞지 않는 창문이 덜그럭거리다 깨어질 듯 울어댑니다. 종이를 껴서 덜그럭거림을 멈추게 하고는 더 이상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저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a 다 찢겨진 토란이파리가 태풍의 위력을 실감나게 합니다.

다 찢겨진 토란이파리가 태풍의 위력을 실감나게 합니다. ⓒ 김민수


그렇게 불면의 밤을 보내고 다음날 새벽에 마당에 섰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한 날씨, 그러나 작은 텃밭과 교회 주변은 마치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른 듯 합니다.

풍성하던 토란잎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어제까지만 해도 풍성하던 배롱나무의 꽃도 하나 남질 않았습니다.

a 속을 채워가던 콩들이 전부 누워버렸습니다.

속을 채워가던 콩들이 전부 누워버렸습니다. ⓒ 김민수


검은콩은 콩대로 이파리를 잃고 다 누워버렸습니다. '거둬봐야 한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입니다. 토란은 대에 초점을 맞추고 키웠으니 아직 토란이 여물지 않았어도 캐면 될 터이지만 콩은 아직 막 알이 들어가는 때인데 이파리까지 다 잃었으니 세운다고 해도 광합성작용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오기가 나대요.

'그래, 태풍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쓰러진 콩을 하나하나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쓰러진 콩을 세우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하나 세우며 콩의 생명력을 믿기로 했습니다. 세운들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해도 나는 그냥 둘 수가 없습니다.

나는 농부는 아닙니다. 작은 텃밭이나 아기자기 가꾸는 사이비농부입니다. 그러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쓰러진 콩을 세우며 농민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 나는 농부입니다.

'이놈들아, 살아야 한다. 너희들이 살아야 자식놈들 교육을 시키지. 이놈들아, 살아야 해. 그래야 마누라 병원비도 낸단 말이다. 이놈들아, 죽으면 안 된다. 너희들 죽으면 내 희망도 죽는단 말이야.'

쓰러지고 상처 난 농작물을 대하는 농부들의 심정이 마음 한 켠에 싸하고 다가옵니다.

a 감자의 싹도 태풍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감자의 싹도 태풍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 김민수


감자싹이 났다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허망하게 부러져 버렸습니다. 태풍이 오기 전의 날씨도 계속 비가 오락가락했기에 감자가 웃자랐고, 웃자란 감자싹은 똑똑 부러졌습니다.

그렇게 대가 부러지면 안 된다고 하네요. 심은지 얼마 안 된 감자들은 흙을 모두 빼앗겨 맨살을 드러냈고, 감자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분들이 허탈해하는 소리를 들으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감자는 반타작입니다. 오히려 싹을 내지 않아 애를 태우게 하던 것들이 효자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a 대파의 줄기도 모두 꺾여 버렸습니다.

대파의 줄기도 모두 꺾여 버렸습니다. ⓒ 김민수


대파도 다 쓰러져서 어느 새 골아서 뿌리까지 썩으려고 합니다. 전문적인 농사지식은 없지만 저대로 놓으면 다 썩을 것이 분명하니 몽땅 뽑아서 꺾어진 줄기를 따내고 다시 심습니다.

이렇게 태풍으로 상처를 입은 작은 텃밭에서 씨름한 시간은 대략 8시간입니다. 뙤약볕에서 쉬지 않고 일했더니 손에는 물집이 잡히고 온 몸이 뻐근합니다.

그러니 새벽 동틀 때부터 해질녘까지 종일 밭에서 일하는 분들은 얼마나 힘드실까 생각도 하게 되고, 그렇게 힘들여 지은 농사가 태풍 한번에 이렇게 수포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아직도 작은 텃밭은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다시금 상처를 딛고 푸른 생명력을 끈질기게 이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쓰러졌던 검은콩에서도, 고추나무에서도, 갈갈이 찢긴 호박줄기에서도, 몸뚱아리만 남은 대파에서도, 새순이 부러진 감자에서도 다시금 새순이 새록새록 돋아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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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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