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 '부탁한' 미국에 끌려가지 말아야

[긴급점검] 파병 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 (상)

등록 2003.09.15 09:35수정 2003.09.15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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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미국이 한국 등 동맹국 및 우방국들에게 파병 및 이라크 재건 비용 분담을 요청하고 나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국제동향과 국민 여론, 정치권의 반응 등을 종합해 신중히 대응한다는 입장이다.

집권 이후 최대 위기에 직면한 부시 행정부는 그동안 철저히 무시해온 유엔에 결의안 상정을 추진하는 한편, 동맹·우방국들에게도 파병 및 전후 비용 분담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등 나토 동맹국들은 물론이고 인도, 파키스탄, 터키 등 '신흥 동맹국'들과 얼마 전 자위대 해외파견법을 통과시킨 일본조차도 국내 여론을 의식해 파병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

이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상대적으로 압력이 쉽게 통해온 한국에 대해서 파병 압력을 높이고 있다. 특히 부시 행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약점을 잡을 수 있는 한미간의 현안들이 산적하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들 것이다.

실제로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북한 핵문제, 경제 문제, 주한미군 재배치를 비롯한 한미동맹 재조정 등 만만치 않은 현안들이 있어, 파병 문제에 대해 노무현 정부로서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노무현 정부와 지지기반 사이의 최초 충돌 계기가 지난 3월말 파병 논란이었다는 점과 이번에는 인명 피해 우려가 높은 전투병 파병을 요청받았다는 점은 노무현 정부가 또 다시 대단히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을 만났다는 것을 말해준다.

더구나 최근 통일·외교·안보문제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격화되어왔고,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분당 및 신당 창당, 그리고 한나라당의 세대교체 논란까지 겹쳐 있어, 파병 문제를 둘러싸고 자칫 극심한 국론분열 양상까지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파병 논란이 또 다시 한국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기지 않고, 토론 문화 및 정책결정과정을 성숙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권과 언론, 그리고 시민사회의 자세와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지난번 파병 논란의 교훈을 되새기는 일이 필요하다.

우선 노무현 정부와 국회는 지난번처럼 여론 한 번 제대로 묻지 않고 밀어붙이기식으로 파병을 추진하는 일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일단 정부가 미국의 파병 요청에 대해 지난번과 달리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언론 역시 생산적인 토론과 합리적인 대안이 도출될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 제공과 정책 대안 제시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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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침략전쟁의 교훈

우리가 또 다시 다가온 파병 문제를 슬기롭게 풀기 위해서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과 이 과정에서 불거진 3월말-4월초 한국군 파병 논란의 교훈을 추출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일단 전제되어야 할 것은 더 이상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정당화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핵심적인 매파들은 이미 집권 전부터 이라크 침공을 계획해왔고, 9.11 테러 사건이후 후세인 정권을 알-카에다와 연계시키려했다가 실패하자 대량살상무기 문제를 들고 나왔으며, 대량살상무기 정보를 왜곡한 것이 드러나자 후세인 정권으로부터 이라크 국민 해방과 민주주의 건설을 침공 구실로 내세웠다.

이러한 명분으로 한 주권국가를 침공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국제법을 위반한 것일 뿐만 아니라, 후세인의 강압통치라는 '악'이 미국의 식민통치라는 '더 큰 악'으로 대체되었을 뿐, 지금 이라크 땅에서는 생필품 부족과 유혈충돌로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전쟁의 명분을 사후적으로나마 획득하고자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흔적을 찾아내고자 했던 미국이 결국 발견한 것은 침공을 정당화시키고자 한 신보수주의자(Neo-con)들의 정보 조작이었고, 이는 명분과 도덕성에 있어서 부시 행정부를 무장해제 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명분을 찾을 수 없었던 전쟁에 애써 명분을 부여하고자 했던, 역사상 가장 더러운 전쟁이 바로 이번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인 것이다.

지난 3월말 이라크 파병 논란 당시, 국내의 일부 안보전문가들은 부시 행정부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추종하면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 정당성을 주장했었다. 특히 이들은 '사후적으로나마' 미국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면 침공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대담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미국이 찾아낸 것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가 아니라, 자신의 정보 조작이라는 것이 확인된 지금, 이들 일부 안보전문가들이 어떠한 자기반성을 할지 지켜볼 일이다.

또 한가지. 3월말 당시 파병 찬성론자들이 펼친 핵심적인 논지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슈퍼파워에 편승하는 것이 살길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제국에 버금가는 강대국이 출현할 것이고, 안보와 경제에 있어서 미국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한국으로서는 '편승' 이외의 길은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초라해지고 있는 '제국 미국'과 '제왕 부시', 그리고 '푸들 블레어'는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져들면서 나라 안팎으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대미 '편승'의 강력한 논거의 설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파병 때 말한 '국익'은 어디 갔는가?

지난 3월 이라크 파병 논란이 우리에게 준 던져준 가장 큰 과제는 '도대체 국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노무현 정부를 비롯한 파병 찬성론자는 '명분'이 약해도 '국익' 차원에서 파병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국민들을 설득하려고 했고, 이는 상당 부분 효과가 있었다. 여론조사 결과들을 보면 약 80%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면서도, 파병 찬성은 반대보다 높은 50%에 육박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파병 논란 때, 정부와 언론이 파병 반대는 '명분론'으로, 파병 찬성은 '현실론·국익론'으로 몰고간 것도 받아들일 수 없지만, 정부 스스로가 내세운 국익론의 근거도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북핵 문제'라고 편협하게 표현되어온 북-미간의 대결과 경제 불안은 안보와 경제에 있어서 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미국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다는 핵심적인 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라크 파병 결정 이후 우리가 목도한 것은 이라크 파병과 한국의 안보·경제 문제 사이에는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이라크 파병 결정 직후 미국은 베이징 3자 회담의 '긍정적인' 측면은 애써 무시하고 '핵무기 보유' 등 북한측의 강경 발언만 공개함으로써 5-6월 위기의 중대한 요인을 제공했다.

베이징 3자회담에서 북한은 자신의 핵폐기 과정과 미국의 대북한 안전보장 문제를 동시적으로 진행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 '대담한 제안'을 내놓았지만, 부시 행정부는 이를 폄하하고 북측의 강경 발언만을 공개하면서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구상(PSI)' 추진, 한국과 일본에게 대북강경책 수용 압력 행사, 유엔안보리의 결의안 추진, 주한미군 전력 증강 등 강경 일변도로 흐른 바 있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정부는 이라크전 파병과 뒤이은 5월 방미외교가 외평채 환율 안정화 등 경제신인도 회복에 기여했다고 주장했지만, 곧이어 나온 하이닉스 반도체에 대한 미국의 보복관세 부과로 한국경제는 직격탄을 맞고 말았다. 그리고 갈수록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현실은 대미관계에 있어서 외교안보문제를 지나치게 경제와 연관시킨 정부의 짧고도 조급한 안목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정부를 비롯한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이라크 파병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한국의 대외신인도를 하락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수많은 반전(反戰) 국가들의 신용등급이 하락되었다는 사례가 없다는 점을 비춰볼 때, 이 역시 지나친 자기검열이라고 할 수 있다.

부시 행정부가 갈등관계에 있는 금융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신용평가사에게 '감 놔라 대추 놔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외교상의 문제를 근거로 한국의 신용등급을 하락시키면, 한국의 경제신인도 하락 못지 않게 해당 신용평가사의 신인도부터 타격받게 될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동아시아를 강타한 IMF 위기 이후 많은 나라에서 미국 신용평가사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부탁한' 미국에게 끌려가지 말아야

이번에도 우려되는 것은,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고 실체도 불명확한 '국익론'과 '현실론'을 앞세워 미국의 한국군 전투병 파병 요청을 정부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특히 전례에 비춰볼 때, '부탁받은 한국'이 '부탁한 미국'에게 끌려가는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도 높다.

우선 노무현 정부로서는 전투병 파병 여부가 어렵게 성사된 6자 회담 분위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심할 것이다. 지난 3월 파병 때 정부가 내세운 논리를 적용하면, '이라크 파병→한미동맹 및 공조체계 강화→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나올 것 같지만, 이는 대단히 위험한 논리이다.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이라크 파병이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기여했다는 어떠한 근거도 찾기 어려울 뿐더러, 거시적인 차원에서 볼 때 미국의 네오콘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대북정책을 비롯한 미국의 대외정책이 '유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9.11 테러이후 독주하던 '네오콘'이 무리한 대외정책 수행으로 발목을 잡혔다는데 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초강경으로 흘렀던 시점이 네오콘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이라크 침공을 전후한 때였고, 최근 조금이나마 유화되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라크 계획 차질로 네오콘의 영향력이 약화된 데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미국의 이라크 점령을 정당화시켜주는 파병은 네오콘에게 재기의 기회를 줄 우려가 있다. 일본 등 파병 요청을 받은 국가들이 국내 여론과 함께 다른 국가들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파병 결정이 '파병의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는데 일조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대목이다.

오히려 파병을 비롯한 이라크 문제는 미국의 관점이 아닌, 이라크의 비극을 어떻게 하면 끝낼 수 있을지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한국 역시 미국의 침략전쟁 동조자로 나섰던 만큼, 오늘날 이라크 비극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따라서 한국의 역할은 이라크인의 고통을 줄이면서 미국을 위한 민주주의가 아닌 이라크인을 위한 민주주의가 이라크에 조속히 정착되는데 일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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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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