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4일 저녁 1차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 당시 국회앞에서 500여명의 시민들이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 한국군 파병'을 반대하는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오마이뉴스 이종호
미국이 요청한 한국군 전투병 파병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정치권에서 유엔 결의를 거친 다국적군 형태의 파병은 추진할 수 있다는 의견이 연일 나오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채택을 추진하고 있는 유엔 결의안과 이에 바탕을 둔 다국적군은 '유엔의 고깔은 쓰되 미국의 기득권은 유지하겠다'는 내용이어서 이를 근거로 파병을 추진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다.
즉, 유엔이 미국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유엔 결의안과 다국적군 구성으로는 미국의 침략전쟁 및 강압적인 점령에 국제적인 정당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유혈사태로 얼룩지고 있는 이라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부시 행정부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으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를 상대해왔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를 철저하게 무시해온 부시 행정부가 유엔과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한 것은, 이라크 반미 세력의 격렬한 저항으로 미군 등 사망자가 속출하고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전후 비용이 폭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년 11월로 예정된 재선에서도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유엔 결의안을 통과시켜 유엔의 고깔을 쓰고 이라크 점령을 마무리하되 미국이 치르고 있는 인적, 물적 부담을 줄인다는 복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어떠한 형태이든 유엔을 통해 다국적군을 구성하고 한국 등 동맹 및 우방국들의 군대를 여기에 포함시키고자 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무력에 의한 이라크 통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병력 파병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러나 지난 5월 1일 전쟁 승리 선언이후 미군 사망자 수가 전시 때를 능가하고, 미영 연합군과 이라크 반미 세력간의 유혈충돌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군의 추가 파병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따르는 일이다.
미국 정치가 본격적인 대선전에 진입하고 있고, 경기침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추가적인 미군 파병은 '정치적 자살골'이 될 것임을 부시 행정부는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왜 미국은 유엔의 고깔을 쓰려고 하는가?
이에 따라 부시 대통령은 지난 5월 1일 전쟁 승리를 선언하면서 보였던 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9월 7일 대국민 연설에서는 870억달러에 달하는 '테러와의 전쟁' 추가 비용 지출을 의회에 요청하고, 유엔과 다른 나라들에게도 이라크 재건 계획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게 된 것이다.
부시 행정부 추진하고 있는 다국적군은 어떠한 형태이든 '유엔'의 고깔을 씌우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현재 이라크 주둔 미군을 13만명 수준으로 '동결'시키고 추가 병력은 유엔 다국적군의 모양새를 갖춘 동맹·우방국 군대로 채운다는 계획을 세우고 적극적인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라크 주둔 연합군의 지휘체계도 재조정해 성조기를 유엔기로 대체하거나, 미군과 유엔군이 '병립형'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러나 설사 미군이 유엔평화유지군으로 통합되더라도, 사령관을 미군으로 임명함으로써 유엔군을 '펜타곤'의 영향력하에 묶어두려고 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굳이 '유엔'의 고깔을 쓰려고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미국'보다는 '유엔'이라는 이름이 각국의 파병 및 전후 비용 분담 유도에 훨씬 효과적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침공 과정 및 그 이후에 국제사회의 반전 여론의 힘을 톡톡히 지켜본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이름으로는 파병 및 비용 분담에 대한 각국의 비판 여론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 관리들이 유엔 결의안을 "정치적 보호막(political cover)"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유엔을 미국은 물론이고 파병을 결정하려는 정부들에 대한 비판 여론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패막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벌써부터 실효를 거두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물론이고 정치권에서도 '유엔이 요청한다면…'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바로 이 지점에 함정이 있는 것이다.
썰렁한 국제사회의 반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