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권, 그는 그렇게 간첩이 되었다

[인터뷰] <야생초 편지>의 저자와 함께 찾아간 남산 안기부

등록 2003.09.16 04:54수정 2003.09.17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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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남산’이라 불렸던 안기부. 95년 9월 안기부가 내곡동 새 청사로 이전하면서 중구 예장동 ‘남산’은 빈집이 되었다. 곧이어 들어온 서울시정개발연구원과 도시철도공사 연수원 등에 의해 ‘음지의 추억’은 잊혀지는 듯했다.

a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 그는 그렇게 간첩이 되었다.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 그는 그렇게 간첩이 되었다. ⓒ 권기봉

그런데 서울시는 애초 서울종합방재센터가 입주하려 했던 옛 안기부 본관을 유스호스텔과 청소년 및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이용하겠다는 계획 아래 민간사업자로부터 사업제안서를 받겠다고 지난 7월 23일 밝혔다.

이에 대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등을 중심으로 남산 안기부 건물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기에 인권기념공원을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나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인권·사회단체 뿐만 아니라 안기부로부터 고문을 당한 바 있는 개인들도 안기부가 있던 곳에 인권 관련 시설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 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 역시 85년 6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62일간 안기부로부터 고문을 당한 인물. “그릇된 역사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나중에 이러한 역사적 과오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황 대표는, 옛 안기부 터에 유스호스텔을 짓는 것은 올바른 결정이 아니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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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산의 과거 ' 를 이대로 묻어버릴 수 없다


지난 98년 광복절 특사로 사회에 복귀한 황 대표를 만나, 그가 기억하는 당시 안기부의 인권유린 실태와 옛 안기부 터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우리 사회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인터뷰는 8월 29일 황 대표와 함께 남산 옛 안기부를 직접 돌아보며 이루어진 데 이어, 추석 연후 직후(14일) 세종로 인근 ‘카페 추(秋)’에서 만나 이루어졌다. 다음은 해설과 함께 황 대표와의 일문일답을 간추린 것이다.

a 남산은 2개가 있었다. 서울타워가 있는 푸르른 남산과 인권유린을 일삼던 서슬 푸른 '남산'. 황대권 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 뒤에 있는 건물이 옛 안기부 별관.

남산은 2개가 있었다. 서울타워가 있는 푸르른 남산과 인권유린을 일삼던 서슬 푸른 '남산'. 황대권 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 뒤에 있는 건물이 옛 안기부 별관. ⓒ 권기봉


- 지난 해 가을에 낸 <야생초 편지>를 통해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황 대표와 야생초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으면 한다.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몸과 정신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가정문제까지 겹쳐 정말 죽는 게 아니냐고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그런데 당시 교도소 안에서는 의사나 약사의 도움을 얻기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그래서 내 몸은 내가 고치겠다는 생각으로 한의학과 자연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의학 책을 보면 그게 다 자연 약초인데, 약초 역시 야생초였다. 교도소 안에서 한약을 달여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야생초를 기르는 길을 택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나던 것들을 모아서 기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화단도 만들 수 있었다.”

교도소에서는 기록물을 갖고 있을 수 없어 밖에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빌어 야생초에 대한 기록을 꾸준히 했던 황 대표. “야생초를 기르면서 건강도 회복했고 동시에 생명의 신비, 경외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는, “악착 같이 자라는 야생초를 보며 묵상을 하고 그림도 그리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a 황 대표, 취조실과 고문실이 있던 옛 안기부 지하실에 내려가다.

황 대표, 취조실과 고문실이 있던 옛 안기부 지하실에 내려가다. ⓒ 권기봉


- ‘국가보안법상의 간첩죄’라는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지만 13년 2개월 동안 복역을 하고 8·15특사로 나왔다. 그 시간이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황 대표에게 있어 이 길었던 수감 생활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30세부터 44살까지 감옥에 있었다. 사람들은 인생의 황금기를 허비했다고 안타까워하거나 억울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물론 초창기 감옥에 있을 때에는 무척이나 괴롭고 뭐라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런데 인생에 선택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야생초에 눈을 뜨게 된 것도 그렇고, 나는 그 안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했기 때문에 회한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교대부속초등학교와 경복중고등학교, 서울대, 미국 유학이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으니 분명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사회 주류에 속했을 것이다. 가만히 있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주류의 삶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들을 감옥을 통해 깨우치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오히려 감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 그런데 복사용지를 이용해 만든 명함에 ‘바우 황대권’이라고 적고 있다. 바우가 무슨 뜻인가?
“감옥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이전에는 인간의 의지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당하고 보니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다고 느끼게 됐다. 그래서 신에 의지하게 된 것인데 막상 세례명을 보니 다 외국이름이더라. 철든 이후 양복 입은 날을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어찌 보면 나는 민족주의 성향이 있다. 그래서 고문을 당하다 순교한 한국인 유대철 베드로 성인의 세례명을 한국식으로 고쳐 ‘바우’라고 하게 되었다. 그는 고문을 이겨 냈지만 나는 결국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굴복해서 살고 있는 데 대한 속죄의 의미도 있다.”

“이놈 자식, 분명히 북에서 특공무술을 배운 게 틀림없다”

- 이제 이야기를 조금 돌려보겠다. 지난 85년 안기부에 끌려갔다고 알고 있다. 어떤 일로 인해 안기부에 잡혀가게 되었나?
“나중에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라고 알려진 일 때문에 잡혀가게 되었다. 미국 유학 중 알게 된 사람 중 양동화라는 이가 있었는데, 나를 형이라 부르며 따랐다. 나중에 이 친구가 평양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안기부에 잡혀가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그가 미국에서 친하게 지냈던 이로 나를 지목했다고 하는데, 안기부에서는 나에게도 뭔가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거다.”

85년 9월 9일 안기부가 발표한 이른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은 양동화 등이 모스크바를 거쳐 평양을 방문, 지령과 공작금을 갖고 국내에 들어와 간첩활동을 했다는 사건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두고 ‘한국의 학생운동은 북한의 사주를 받아 이루어지고 있다’는 투로 대대적인 선전을 했다.

그러나 안기부의 발표 바로 다음날 MBC가 방송한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 관련 프로그램 <보도특집 - 학원에 뻗친 붉은 손길> 등의 원본이 이미 9월 1일~2일에 사전 촬영된 것이며, 양동화의 기자회견 부분 역시 사전연습을 거친 후 이뤄진 점 등 안기부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a "고문의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 왔다." 98년 출소한 뒤 온 이후 두 번째로 옛 안기부를 찾은 황 대표.

"고문의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 왔다." 98년 출소한 뒤 온 이후 두 번째로 옛 안기부를 찾은 황 대표. ⓒ 권기봉


- 안기부에 끌려가던 때를 기억할 수 있나?
“방학 때 잠시 귀국을 했을 때 나 역시 안기부에 끌려갔다. 미국에 있을 때에는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귀국하자마자 안기부에 잡혀간 것이다. 당시에는 도대체 왜 끌려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실제로 양동화가 평양에 갔다 왔다는 이야기는 안기부에 끌려가서야 들을 수 있었다. 결국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끌려갔다는 얘기다.

감을 못 잡게 하기 위한 것인지 안기부 주위를 꼬불꼬불 돌다가 들어간 안기부에서 꼬박 62일간 수사를 받았다. 전 기간을 지내던 지하실은 축축하고 음습했는데, 지하 1층에는 가운데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4~5평 크기의 취조실 10여 개가 늘어서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층을 더 내려가면 유치장이 있던 것 같고, 더 내려가면 고문실이 있었던 것 같다. 벽에는 끌려온 사람들이 ‘민주주의 만세’ 등을 새겨놓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말이 수사이지 고문의 연속이었는데, 구치소로 갈 때까지 바깥 햇빛을 본 기억은 없다.”

- 묻기 곤란한 질문이지만 당시 고문 상황을 기억할 수 있겠나?
“고문을 받다 보면 옆방에서 각목으로 치고 별 짓 다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나 역시 그렇게 고문을 당하다가 갑자기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지하로 더 내려간다. 눈가리개를 해도 어두운 건 알 수 있지 않나. 깜깜한 계단을 계속 내려갔다. 그러면 마치 나락으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습기로 축축한 지하에서 눈을 탁 풀면 욕조와 의자, 탁자가 하나 있는 좁은 방이었다.

욕조에 물을 채우고 물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의자에 몸을 결박하고 목을 뒤로 젖힌 채 각목으로 패며 물 먹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진이 다 빠져 혼절하면 깨워서 또 고문이다. 아내를 데려다가 정신적으로 무너지게 하려고 하기도 하고, 성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각목으로 내려치며 위협하기도 했다. 진술과 번복을 거듭하다가 결국 버티기를 포기한 것이 비녀 꽂기였다. 무릎을 꿇게 한 다음 팔을 무릎 바깥에 두고 무릎과 팔 사이에 마치 비녀를 꽂듯 각목을 끼운 다음 양 책상 사이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한 뒤 코에 물을 계속 들이붓는 것이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각목이 몸을 파고 들었고 물은 폐로 넘어갔다.”

피비린내가 진동했을 안기부 지하. 별관에 입주해 있는 도시철도공사 연수원의 한 직원은 “당직 설 때는 소름이 끼쳐 여기 내려오기도 싫다”고 말한다.

a "지금도 왼쪽 팔은 근육 모양이 삐뚤어져 있다.”

"지금도 왼쪽 팔은 근육 모양이 삐뚤어져 있다.” ⓒ 권기봉


“한 번은 쥐도 고양이에게 몰리면 대드는 것처럼 단말마 힘으로 손을 묶었던 물수건을 풀었던 적이 있다. 그러니까 그들이 '이놈 자식, 분명히 북에서 특공무술을 배운 게 틀림없다'며 더 무차별적으로 패고 고문하더라. '내 목숨 포기했다, 다 도장 찍어줄 테니까 제발 나를 죽여 달라'고 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62일간 안기부에 있으면서 전기고문을 빼고 고문이란 고문은 다 받은 것 같다.”

- 고문을 받으면서 다친 곳이나 후유증은 없나?
“치명타 3대를 맞았던 기억이 있다. 정수리와 발목 복사뼈, 왼쪽 팔을 정통으로 맞았는데, 복사뼈 하고 머리는 구치소에 가서 6달쯤 지나니까 어느 정도 괜찮아 지더라. 그런데 왼쪽 팔의 뒤틀린 근육만은 아직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지금도 왼쪽 팔은 근육 모양이 삐뚤어져 있다.”

“나 같은 사람은 오히려 사는 게 죄”

- 사회에 돌아온 지 5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보안관찰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도 3달마다 경찰서에 출두해 ‘나 잘 살고 있다’고 보고해야 한다. 2년마다 갱신을 하는데 얼마 전에 3번째 갱신이 있었다. 보안관찰은 사회 생활을 아무리 잘 해도 거의 자동으로 갱신된다고 보면 된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렇게 보고해야 할 거다. 이런 사람들한테 나 같은 사람은 오히려 사는 게 죄라는 이야기 밖에 안 된다는 얘기다.”

a 밖에서 옛 안기부 별관의 지하로 직접 통하는 계단.

밖에서 옛 안기부 별관의 지하로 직접 통하는 계단. ⓒ 권기봉

- 그냥 3달마다 경찰서에 가서 신고만 하면 끝이라는 이야기인가?
“아니다. 경찰마다 다르긴 하지만, 아무 때나 전화를 걸어온다. 오늘은 뭐하냐, 내일은 어디를 갈 거냐 하면서. 미국 대통령이 방한할 때만 되면 전화를 해서 무얼 하냐고 묻고, 광복절 같은 때도 꼭 전화가 온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 당하는 거다. 한 번은 민가협에서 수련회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해서는 가지 말라고 하더라.”

- 그런데 갱신 사유는 무엇인가?
“'직업이 없다'나 '결혼을 안 했다', '사회적 지위가 불분명하다', '국가보안법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등등 예전에 고문 받으며 만들었던 안기부 조사 자료를 그대로 베껴 놓은 듯 하다. 심지어 지명도를 이용해 더 큰 일을 하려고 한다고 쓰여 있기도 하다.

참 우스운 경우도 있었다. 이번에 3번째 갱신을 위해 조사 받을 때 직업란에 마땅히 쓸 게 없어 ‘작가’라고 썼다. 그리고 일주일 후쯤에 통지서가 왔는데 ‘약초재배업’이라고 적혀 있는 거다. 또 갱신 이유는 ‘국가보안법 및 보안관찰에 반감이 많다’와 ‘이유 없이 해외를 들락날락 거린다’였다. 아마도 작가라고 하면 해외에 나가 소재를 얻기도 하기 때문에 직업을 바꾸면서까지 갱신 이유를 꿰어 맞추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직업란에 이렇게 쓴 적이 없다고 항의하니까 착오를 일으켰다고 하면서 고치더라. 4월쯤 모 방송사 시사프로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수정한 흔적이 있는 통지서를 보여줬다. 이건 코메디다.”

- 보안관찰을 받는 느낌을 말해 달라.
“누가 날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항상 기분이 나쁘고 불안하다. 이게 감옥이지 다른 게 감옥인가. 출소한 지 5년이 지났는데도 계속 이렇게 산다는 게 답답하다. 나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발언권이 없는 이들도 많은데, 이 사람들은 정말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 결국 저들에게 있어 한번 간첩은 영원한 간첩이란 얘기다.”

- 지난 4월 이와 관련해 '보안관찰 처분취소청구' 소송을 낸 것으로 알고 있다. 진행상황은 어떤가?
“지금 진행 중에 있다. 이번 소송의 법정 대리인이 법무법인 ‘지평’이다. 그런데 지평의 옛 대표 강금실 씨가 현재 법무장관이지 않나. 결국 소송 피고인이 강금실 법무장관이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a 안기부 본관과 별관을 잇는 터널

안기부 본관과 별관을 잇는 터널 ⓒ 권기봉


“과거 규명이 있어야 역사적 범죄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

- 지금 서울시가 남산 옛 안기부 자리에 유스호스텔을 세우겠다고 한다. 이 계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대다수 국민들에게 있어 이 곳은 인권유린의 현장이자 민주화 운동의 살아 있는 역사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분단 현실에서 어떤 세력은 오히려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고문과 인권유린이 ‘구국의 행위’였던 것이고, 남산 안기부 터는 ‘구국의 현장’인 것이다. 아직도 그런 세력들이 우리 사회의 주요 자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겠나?”

- 그렇다면 서울시가 유스호스텔을 짓기로 한 마당에, 이 자리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인가?
“당시 내가 안기부나 교도소에서 본 바로는 정치적이거나 개인적인 출세를 이유로 조작된 사건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많은 국민들은 아직도 국가기관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말을 못하고 있다. 안기부 문제를 덮어두면 덮어둘수록 공포심과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권기념공원이 됐든 기념관이든 이제는 당연히 우리의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곳을 역사에 대한 살아있는 교육 현장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일부 국가기관이나 정당, 사회 세력에서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보기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에 행했던 과오, 특히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지난 세월의 안기부가 이란 팔레비 왕조나 니카라과 소모사 정권의 비밀경찰, 동독 슈타지와 다른 게 무엇인가? 그런데 누구도 이이 제기를 못했다. 우리가 민주사회로 가려면 이런 음습함을 깨야 한다. 민주사회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국가기관의 옛 과오에 대한 사과와 미래에 대한 다짐이 필요하다. 옛 안기부 자리를 어떻게 이용하는가는 그 첫 시험대가 될 수 있다.”

a "습기로 축축한 지하에서 눈을 탁 풀면 욕조와 의자, 탁자가 하나 있는 좁은 방이었다.”

"습기로 축축한 지하에서 눈을 탁 풀면 욕조와 의자, 탁자가 하나 있는 좁은 방이었다.” ⓒ 권기봉


- 지난 달 21일 국가정보원이 ‘수지 김 사건’과 관련해 유족과 국민에게 사과를 했으나, 안기부가 개입된 다른 사건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말이 다르다. 만일 이런 일을 그냥 지나치게 되면 나중에 누구에게라도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서라도 반드시 과거의 과오에 대해서는 당사자의 인정과 사죄가 필요하다. 남산 안기부 자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아픈 과거에 대한 규명이 있어야 또 다른 역사적 범죄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과거 정부의 인권유린 등 과오에 대해 짚고 넘어가는 과정을 거쳐 갈등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92년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으로 구속된 손병선, 홍성담씨 등이 안기부 수사관들을 고소하는 등 고문 피해 당사자들이 직접 안기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 황 대표도 안기부의 고문 등에 대해 소송을 생각한 적은 없는가?
“당시 대부분이 공소시효 소멸로 기각됐던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8명이 지난 95년 당시 고문에 공소시효를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헌법소원을 냈는데 역시 각하됐다. 국제인권조약들도 고문에는 공소시효를 적용할 수 없다고 하는 판국에 참 아쉽다.”

a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내 발 밑에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내 발 밑에 있다." ⓒ 권기봉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내 발 밑에 있다”

- 황 대표가 생각하는 현재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상황은 어떻다고 보나?
“미국에서 유학할 때 제3세계 정치학을 공부했는데, 다른 나라들에 비해 우리는 상당히 많은 발전을 이룬 셈이다. 거시적으로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민주화 운동도 아쉬운 점이 많지만 자부심을 가져도 될 정도로 멋진 경험이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정당성이 없는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이지만, 이들도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속도는 느릴지언정 점진적으로나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나치게 급속하게 전개되는 세계화 물결 속에서 사람들이 자칫 방향성을 잃고 판단능력이 흐려질 수도 있다. 지금의 세계화 체제 내에서의 개인이란 결국 도구로서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라크 파병 문제도 그렇고 지금은 강대국의 논리에 그대로 끌려 들어가는 형국인데, 지금의 미국 중심 세계 체제는 결국 자원 소비와 파괴, 약소국 착취의 구조다. 파멸의 길이다. 지금 우리가 현재의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지금이라도 지향점을 똑바로 세워야 나중에 혼돈과 방황을 피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대안이 필요하다.”

- 끝으로 <오마이뉴스> 독자들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
“야생초를 기르기 전까지 나는 모든 사회 현상을 정치적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감옥에 있다 보니 정치적 해결 방법이라는 게 상당히 제한적이더라. 예를 들면 아무리 대단한 정치지도자라도 세상을 참되게 변화시키기에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개개인의 마음이 변해야 하고 패러다임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너와 나와의 범주를 뛰어 넘어 인간과 생물, 나아가 물(物)까지도 포함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여의도 정치에는 관심이 많으면서도 정작 자기 동네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가정은 가부장의 틀에 매여 비민주적인 모습이 많이 보인다. 마치 야생초는 무시하면서 그 비싸고 실용성 없는 난초에는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내 발 밑에 있다. 먼 곳도 중요하지만 내 주위를 먼저 둘러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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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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