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인시대>가 최악의 드라마인 이유

모든 강한 것은 아름다운가?

등록 2003.09.16 12:45수정 2003.09.1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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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오르는 길에서나, 밤 새워 달리는 완행열차 어느 칸에서 만난 낯선 아저씨와 소주 한 잔 나누다보면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요즘 잘 나가는 국회의원 아무개, 혹은 한 때 잘나갔던 연예인 아무개가 다 그의 신세를 졌던 인물들이기도 하고, 또 군대가 이나마 민주화된 것이 그의 덕분이거나 어느 고장의 살림살이가 그만큼 나아진 것이 결정적으로 그의 덕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그런 공치사에는 관심이 없으며 자신은 그저 훨훨 마음 가는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에 만족할 뿐이라는 이야기로 마무리되곤 한다. 남자들이라면 대개 가지고 있는 자아도취적인 과대망상의 신화들을 모아내는 힘이, 낯선 공기와 소주 한 잔에는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이야기가 집대성되고 장식되어,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일인 양 꾸며진 채 펼쳐지고 있는 드라마가 바로 <야인시대>가 아닌가 싶다.

자가당착

120회를 넘어가고 있는 요즘, 국회의원이 된 김두한은 자유당의 ‘독재’와 ‘폭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요즘 그의 주적은 ‘자유당 타락의 주범’인 이기붕과, ‘협객의 본분을 잊고 정치권력과 결탁한 철없는 친구’ 이정재다. 그래서 거의 매 회, 상식을 벗어나는 이기붕 일파의 폭거와 이정재 일당의 폭력을 개탄하는 표정이 클로즈업 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좀 이상한 것이 있다. 김두한이 누군가? 드라마 속에서도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졌듯이 당시 합법정당이었던 남로당을 파괴하기 위해 야습을 감행해 수백명을 몰살시키고, 명색이 노동운동가를 자처하던 자로서 합법적인(그래서 미군정도 손쓸 수 없는)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총질에 죽창질을 서슴지 않던 사람이 바로 김두한이 아니었던가?

심지어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운형과 김규식을 린치하고 협박하고, 끝내는 여운형 암살에 개입했다는 것이 김두한의 엉뚱한 자랑이기도 했다. 그런 김두한이 어떻게 지금은 ‘폭력’과 ‘독재’에 대한 혐오를 입에 올릴 수 있다는 것인가?


이 드라마 이전에 김두한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관심이란 그저 우리 정치사의 돈키호테 같은 인물이라는 것 정도였을 것이다. 깡패 두목에서 백색 테러리스트로, 그리고 다시 여당 정치인과 야당 정치인으로 좌충우돌한 그의 삶은 많은 사람로부터 공포와 실소와 흥미의 시선를 동시에 받아온 것이었다. 그에게 ‘야인’이라는 이름이 ‘장군의 이름’보다 잘 어울린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드라마 <야인시대>는 이 모든 것을 ‘애국충정’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뭉뚱그리고 있다. 권력을 등에 업은 그의 숱한 만행들도, 그리고 반대로 권력의 힘에 의해 조금이나마 상처를 입으며 저항한 것도 모두 오로지 조국과 민족과,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위한 고뇌의 산물이었다는 공통점으로 묶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이니 정의니, 혹은 애국충정이니 하는 만능열쇠가 그 구체적 의미를 불문의 영역으로 묻은 채 기표만을 휘두를 때 종종 파시즘이 되어왔음에 이 드라마의 위험성이 있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족주의’가 그랬고, 전두환의 ‘정의사회 구현’이 그랬으며 일제의 ‘대동아의 영광’이 모두 그랬듯이 말이다.

자아도취, 과대망상

이 드라마의 줄거리와 사실관계는 거의 전적으로 김두한의 자서전 <피로 물든 건국전야>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자서전에는, 도저히 시공간적으로 사실관계를 맞출 수 없는 허풍들이 곳곳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현대사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예를 들면 김옥균이 김좌진을 양자로 삼았으니 자신이 김옥균의 손자가 된다는 것, 남로당 주도 국군준비대 숙소를 습격하여 13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일일이 확인사살하고 화장했다는 것, 김일성이 자신을 회유하려고 육군 소장 정복을 보내왔으나 거절했다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그 외 여운형 협박과 암살을 직접 지시했다거나, 이승만이 장관자리를 제의하며 여러 차례 회유했다거나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읽는 이들이 간간이 섞여 있는 건달의 허풍 쯤으로 넘길 만한 이런 대목들이 대부분 드라마에는 그대로 사실처럼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모든 강한 것은 아름답다?

이 드라마는 내내 중얼거리는 듯하다, 모든 강한 자는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이 드라마 최악의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앞에서 썼듯이, 요즘 김두한의 주적은 이기붕과 이정재다. 그러나 그 둘은 같지 않다. 이기붕이 오로지 탐욕과 간악함의 화신이라면, 이정재는 잠시 어리석은 길로 가고는 있으되 가슴에는 큰 뜻을 품고, 몸에는 최소한의 의리와 명분을 담고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정재는 자유당 말기 ‘정치깡패’의 총수로도 유명하지만, 건달 선배였던 시라소니를 집단으로 린치하고 병원까지 습격해 다리를 부러뜨린 일로 악명이 높다. 그는 김두한과 더불어, 우리나라 조직폭력배 역사의 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아마도 폭력배들이 조직을 이루어 떼로 몰려다니려는 이유가 바로 그들의 강함보다는 약함, 그리고 당당함보다는 비열함을 증명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 비열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이정재의 시라소니 린치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오명을 벗기고 여전히 ‘사나이다운 사나이’로 꾸며넣기 위해, 이 드라마는 정치폭력의 순간마다 “이 고비만 넘기면 우리의 뜻을 펼칠 수가 있다”며 이정재가 어금니를 꼭 깨무는 모습을 교차시키는 친절을 베풀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잔인하고 비열한 조폭 두목의 이미지를 벗기기 위해 시라소니와의 결투 순간에 무방비 상태의 몸을 노출시킴으로써 사죄하는 허구를 연출해내기도 했다. 그의 오른팔인 유지광 패거리가 입만 열면 ‘언젠가 우리 뜻을 펼칠 때’를 늘어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a 이정재 일당의 깡패행진 (해방20년편찬회, <해방20년>, 세문사. 1975)

이정재 일당의 깡패행진 (해방20년편찬회, <해방20년>, 세문사. 1975) ⓒ 세문사

드라마에서 흥미를 위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에 대해 내내 찬반 양론이 존재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KBS드라마 <태조 왕건>이다. 보리를 훔쳐먹다가 분노한 농민들에게 맞아 죽는 것으로 사기에 기록돼있는 궁예가, 멋들어지게 유언까지 남기며 장렬한 자결의 순간을 맞이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해석은 있을 수 있어도, 역사적 사실 자체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문제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야인시대>에 와서는 문제가 그 수준을 넘어선 느낌이다. 이것은 재미를 위해 역사적 사실을 조금 비틀어 놓는 수준이 아니라, 정치 깡패들을 우국지사로 둔갑시키기 위해 줄거리를 통째로 비틀고, 그래도 부족한 공백은 더덕더덕 허구의 시멘트로 발라 메우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에 담겨 있는 위험한 허구들은 김두한의 항일 행적에 관한 것보다도, 이정재, 유지광, 시라소니 등 주변 인물들의 ‘멋’과 ‘사내다움’에 관한 장면들이다.

인간이 판단하는 선악의 보편적인 기준에서, 폭력이란 어쨌거나 악의 범주에 들게 된다. 따라서 폭력을 주인공 삼는 창작물들은 대개 선악의 가치판단을 떠나곤 한다. 식민지 말기 숱하게 굶어죽던 시절에 하는 일 없이 상인들에게 ‘세금’이나 걷어다가 쌀 몇 말 값이라던 ‘비루(맥주)’나 마시던 건달들이 일반인들에게는 분명 악한 존재지만, 그 건달들 간의 관계에서는 ‘선악’을 떠난 ‘투쟁’만으로 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 어쨌거나 방송국(혹은 영화사)도 먹고 살아야 하겠기에 깡패들을 계속 등장시킬 수밖에 없다면, 이제는 그저 깡패들끼리의 전쟁만을 리얼하게 그려주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어린 애들 다 보는 초저녁에 사시미 칼이 난무하고 유혈이 낭자하더라도, 정치깡패들이 턱없이 민족과 정의를 고뇌하며 주먹을 휘두르는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는 훨씬 교육적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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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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