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에서 발견한 어느 여인의 글1

책갈피 속의 일기장

등록 2003.09.17 09:59수정 2003.09.2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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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든 몰래 훔쳐보는 일은 흥미진진하겠지만, 도의적으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그 파렴치한(?) 일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소개하려 한다.


25년 전쯤 불교에 관한 기초 지식을 담은 책을 구하려 부산 보수동의 헌책방 골목을 뒤지다가 우연히 한 곳에서 원하던 '불교정전(佛敎正典)'을 사 가지고 와 책을 펼쳤다.

그런데 그 책은 표지를 책방에서 임의로 만들었고, 출판 연대를 적어놓은 맨 뒷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제책(製冊) 형태는 한식 제책(책을 만들 때 한쪽 면에만 인쇄된 것을 둘로 접어서 실로 꿰매는 방식으로 옛날 족보를 엮은 형태와 같음)으로 된 아주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책이었다.

그때는 불교에 대한 지식의 확충에만 관심 있었을 뿐 그 외의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그 내용에 몰두했다. 헌데 채 몇 장을 넘기기 전에 이상한 걸 발견하게 되었다. 둘로 접혀 있는 면 사이가 갈라져 있었는데 거기에 글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는 게 아닌가.

다른 장을 넘겨보았다. 무려 열 여 군데가 그리 돼 있었다. 면과 면 사이뿐 아니라 인쇄된 곳에서도 빈 공간이 많은 면에는 글로써 채워놓았다.

내용은 한 여인의 일기였다. 지금부터 40년에서 30년 전쯤에 기록된 일들이었는데, 한글 맞춤법은 군데군데 틀렸으나 한문에 대한 지식은 매우 풍부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생활이 매우 어려웠던 듯 그녀는 일기장을 아끼려고 면과 면 사이를 잘라내어 그 사이에 글을 쓴 것이리라. 물론 내가 이렇게 생각함은 내용을 읽으면서 얻은 결론이다.


a <사진 1>

<사진 1> ⓒ 정판수

檀紀 四二八八年 十二月 五日
後에 人間苦生, 經濟苦, 집 苦生한 것을 꿈에라도 잇지 말고 成功에 노력하자
내 自力을 믿어라. 失敗는 不注意와 지예가 없은 연고이다
精誠이 지극하면 하늘도 움직이거든 하물며 사람의 일쯤이야
산다는 것이 곧 苦生이야」
늙고 病든 者가 第一 可憐하다. 아니 앞어고 건강한 것만이 幸福이더라
靑春은 아름다워라. 永遠한 것이 아니다. 오날은 다시 오지 않어니 현실을 형락하라」

단기 四二八九 八月 末日 감삼 收金



그리고 책장 윗부분에 '돌다리도 두러가면셔 가라'고 적혀 있다. (필자 註)

1955년∼56년

맨 처음 적힌 일기는 엄청나게 무거운 고생 보따리를 지고 살아온 여인의 한이 서릿발처럼 절절이 어려 있다. '인간 고생, 경제 고생, 집 고생한 것을 꿈에라도 잊지 말고 성공에 노력하자'고 꺼낸다. 그리고 이어서, '내 자력(自力)을 믿어라. 실패(失敗)는 부주의(不注意)와 지혜가 없는 연고다'며 스스로의 힘을 기르기를 다짐하면서 '정성(精誠)이 지극하면 하늘도 움직이거든 하물며 사람의 일쯤이야'고 외친다.

그러다가 이내, '산다는 것이 곧 고생(苦生)이야'며 슬며시 물러서더니, 이어서 '늙고 병든 자가 가련하다. 아니 아프고 건강한 것만이 행복이더라'로 깨달음을 전하다가, '청춘은 아름다워라. 그러나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으니 현실을 마음껏 즐겨하라'로 끝맺는다. 그것만으로 부족했음인지 맨 위에 한 줄 더 덧붙였으니, '돌다리도 두드려가면서 가라'고 충고한다.

a <사진 2>

<사진 2> ⓒ 정판수

檀紀 四二九0年 九月 十二日(  八月 十九日)
아침에 일즉이 염불을 모시고 감격의 눈물을 흘잇다
金氏銀子(?) 夫人이 너무나 情을 베풀고 무리한 고생을 하다가 결국은 自己가 世上에 榮華도 못 보고 죽은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불상하고 가업서셔 눈물이 솟아젓다
저는 絶對로 너무 무리한 形便에 子息을 위하여셔도 적당하게 희생할나고 생각하였다
結局 사람도 긔계와 다름업셔니 너무나 朔境에 빠저서 고생하면 자귀의 명대로 못 산다는 것을 늣깃다

明朗하게 간단하게 살나고 애쓰자


그리고 왼쪽 면 위에 '天下의 大事은 적은 일로셔 된다'고 적혀 있다 (필자 註)

1957년

(이 글은 책갈피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인쇄된 면 중 여백이 많은 곳에 적혀 있다)

매일 아침 불공드리며 부처님의 가없는 은덕에 감사하는 글쓴이의 모습이 그려지다가, 다음 장면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한 정을 베풀다가 하늘나라로 간 한 여인으로 옮겨간다.

자식들을 위해 숱한 고생만 하다가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간 것에 대한 아쉬움과, 사람이 기계처럼 일만 하다가는 기계가 녹슬 듯이 몸도 그렇게 되고 망가짐을 경고하면서, 자식을 위해 너무 희생하는 것보다 적당히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피력한다.

(그러나 나는 글쓴이 자신의 삶이 바로 여인과 같은 모습이기에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 본다. 즉 그녀도 자식을 위해 몸이 망가지더라도 희생하겠다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 아닌지….) 그리고 끝에는 '명랑하게 간단하게 살려고 애쓰자'라고 다짐하고 있다.

a <사진 3>

<사진 3> ⓒ 정판수

4290. 9/3
大邱 伯父 伯母 壽命長壽 졔수 대통하어셔 우리 명배 공부시키는 것이 意外로 收入이 增加되게 비나이다
天地지신 月日신님 하오(?) 同心하여셔 우리 山培 有名한 技術者가 대여주게 비나이다


1957년

(이 글 역시 책갈피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인쇄된 면 중 여백이 많은 곳에 적혀 있다.)
대구 계신 백부 백모님의 장수를 빌고 있다. 확실치는 않으나 아마 아들이 그 집에 기숙하고 있는 듯 제수 대통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다. (여인은 도움을 받으면 가만있지 않고 반드시 그 고마움을 글로 남겼다.)
그리고 또 다른 아들이 유명한 기술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느 어머니와 마찬가지리라. 그러기에 천지지신(天地地神) 일월성신(日月星神)에게 비는 마음이 간절하다.

a <사진 4>

<사진 4> ⓒ 정판수

檀紀 四二九0년 八月十八日
金甲淑 氏宅에셔 쌀 一斗 强
애·수박을 만히 받고 너무 감사하엿다

四二九0年 五月 末日
서울 山培 下宿費五月費(?)을 一萬七千  받엇다

檀紀 四二九一年   二月 十四日   十二月 二十六日
徐斗年 氏 米 五斗袋 돈 一萬 也
右同 十二月 二十五日 兪日貴 米 五斗 一袋

四二九0년 三月三十一日
徐斗蓮 氏께셔 一金 五萬 을 얻어셔 銘培(山培)가 上京하엿다
친구의 友情을 깊이 늣기고 感激의 눈물을 흘잇다
어더한 일이 이셔도 이 따뜻한 同情을 잇지 안코 報答한다고 決心하엿다


1957년

(이 글도 인쇄된 면 중 여백이 많은 곳에 적혀 있다)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아들의 학비 마련이 수월치 않았는지 힘들어 할 때 친구가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의 글이다. 친구의 우정에 대한 감격과 나중에 꼭 보답하겠다는 의지가 절절히 표현돼 있다. 특히 서두년, 김갑숙 부부의 도움에 관해선 군데군데 언급돼 있다. 이 글에서도 앞부분에 김갑숙씨에게서 쌀 한 말 강하게, 그리고 오이(?)와 수박을 많이 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a <사진 5>

<사진 5> ⓒ 정판수

檀紀 四二九二年 九月十四日(八月十三日) 拍手로셔 감사함
金甲淑 氏 친구가 米 五斗一俵쯤 산배도 서울大學에서 壹萬  받음
이 감사한 은헤를 엇지 잇즐슈 잇나
韓경화 母 부로지를 주어셔 큰 란을 면하엇다
産母(?) 米五升쯤 돈 五千  주어셔 汶倍 仁倍 자졔쥬(?) 靜江(?) 신쌋다
마음끗 감사하다고 생각함
외손자들이 잘 하게 할 것이다

단기 四二九三年 七月 三十一日
徐斗年 氏 一金 壹萬  쯤 상등 福姜錫鎭 氏 夫人 一金 一拾萬 也 집 간졔청(?)에 밧침

단기 四二九四年 九月
一金 五萬  앞어셔 주기될 때 약 사셔 먹음
十二月 十八日   十一月 十日 一金 五萬 
동래 杜邱洞 丁경츌 祖父


1959년

고마움에 대한 감사는 계속 이어진다. 지인(知人)들은 쌀을 갖다주고 심지어 브로치도 준다. 이 브로치는 어디에 쓰는 것인지? 큰 난(亂)을 면했다는 말로 보아 피치 못할 이유로 나들이하려 했을 때 필요한 액세서리였음인가? 아들이 대학에서 장학금 받음을 자랑스럽게 기록해 놓고 있다. 또 아파도 약을 먹지 않고 있다가 죽을 지경이 돼서야 약을 사먹었다니, 그만큼 생활이 각박했음을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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