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 의원이 던진 ‘공식 요청’과 ‘굴종 외교’의 행간 사이

등록 2003.09.18 12:42수정 2003.09.1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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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는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사에 걸맞게(?) 뜨거운 설전이 오갔다.

경위 보고에 나선 윤 장관은 "지난 9월 4일 리처드 롤리스 미 국방부 부차관보와 허바드 주한미대사가 청와대를 방문, 반기문 외교보좌관을 만나 구두로 추가 파병을 공식 요청했다"면서 "파병 규모는 구체적 숫자가 아니라 이라크 내에서 일정 지역을 전담해 독자적인 임무수행을 할 수 있는 경보병이며 그 예로 폴란드의 사단을 예시했다"고 밝혔다.

곧 추미애 의원이 한마디 던졌다.

"미국 행정부의 서명이 들어있는 문서도 들고 오지 않았는데 우리가 공식 요청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정부가 앞서나간 것이다. 우리 외교가 굴종적이기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윤 장관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시가 미국에서 나를 만난 것이 굴종인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하지만 윤 장관의 말보다는 추 의원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과거에도 구두 요청과 공식 요청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여 왔다. 이래저래 유언비어처럼 흘러나오는 일(물론 후에 대부분 사실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에 대해 정부는 항상 공식적인 요청이 있을 때까지는 모두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피해갔다. 일이 그렇다면 절차상으로 보았을 때 윤 장관은 미국에 문서로 공식적인 요청을 해 줄 것을 요구하겠다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 오히려 옳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공식적인 요청이냐 아니냐가 왜 굴종 외교라는 말로 비약이 되는지를 곰곰이 되씹어 볼 필요가 있다. 굴종이라는 표현에는 알아서 긴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공식적인 요청이냐 아니냐의 문제보다는 미국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려는 자세에 대한 일침을 가하는 말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요구를 하니 무조건 들어주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처음부터 분위기 조성에 더 열을 올리고 있지나 않은지 정부와 윤 장관은 새겨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명분이 있느냐, 옳으냐 그르냐, 타당성이 있는 것이냐 아니냐 등을 따지기에 앞서 파병을 위한 논리를 생산하기 위해 애쓰는, 본말이 전도된 현상을 꼬집는 것일 게다. 이런 점에서 비추어 볼 때 윤 장관의 태도는 파병 논리를 만들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더 깊게 파고든다면 추 의원의 주장과 윤 장관의 대답 사이에는 엄연히 그 전제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요청은 요청일 뿐이지 우리가 그것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의미로 격하시키고자 하는 것이 추 의원의 의도라면, 요청 자체가 절대 절명의 과제로 인식시키려는 윤 장관의 의도 사이의 혈전이었던 셈이다.

더 나아가 그 결정은 한국이 하는 것이라는 전제를 추 의원이 깔고 있는 것이라면, 윤 장관은 결정 자체가 이미 내려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결국 행간 사이에서 느껴지는 다른 전제가 굴종외교로 비약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 다음 윤 장관의 답변은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윤 장관은 "주한미대사는 미국 정부를 대표해 한국에 나와있는 사람이고, 그들이 '공식 요청'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우리도 공식 요청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이 해명은 투명성을 국정 최고의 지표로 삼겠다면서 북송금 문제에 접근했던 정부가 결국은 밀담을 통해서 일을 처리하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요청하는 전투병의 규모도 여러 구설수에 오르고 있지 않는가?

기업 간의 일도 늘 문서로 확약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물며 국가 간의 일을 문서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국가 정상회담도 늘 마지막 선언을 통해 공식화된다. 오고 간 밀담은 그저 밀담일 뿐 보증된 결과는 문서화된 선언문이다. 윤 장관이 이를 몰라서 하는 발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에게 위의 해명을 정당한 해명으로 여기게 만든 것일까? 핵심은 곧 '주한미대사'에 있었다. 주한미대사를 들먹이면서 그 권위로 사태를 무마해보겠다는 얄팍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주한미대사에 대한 의존적인 태도를 만천하에 스스로 폭로하고 만 것이다.

추 의원의 주장을 받아들여 지금이라도 정부와 윤 장관은 문서화된 공식 요청을 정식으로 요구하길 바란다. 그래야 치안유지병인지 전투병인지 그 수가 얼마인지 어디서 어떻게 작전을 수행하게 될 것인지 확실하게 확인이 가능한 것이다. 굴종외교라는 말을 나쁜 감정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혹여나 스스로 그러한지 곰곰이 되씹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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