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국에 대한 간극, 빨리 메워야지..." | | | [인터뷰] 37년만에 조국 찾은 김성수 한독문화원장 | | | |
| | ▲ 37년만에 고국을 찾은 김성수 한독문화원장이 행사장을 찾은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 "이제야 실감이 난다. 조국 땅에 와서 흙냄새도 맡고, 동생들도 만나고, 환영식도 참가하고 나니까 이제야 실감이 난다…."
꿈을 안고 떠난 서른살의 유학생이 예순일곱 노인이 돼서 돌아왔다. 37년 동안 두고 온 어머니와 누이들이 보고 싶어 안타깝기도 했고, '간첩' 누명을 씌운 조국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반평생을 낯선 곳에서 보내고 다시 찾은 고국 땅은 여전히 따뜻한 곳이었다.
김성수(67, 한독문화원장) 박사. 지난 73년 최종길 교수 사건과 87년 파독광부 간첩단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돼 정부로부터 '입국금지' 조치를 받은지 삼십여 년만에 '해외민주인사 초청' 행사로 조국을 찾은 김 박사는 다시 가족을 만난 감회를 묻는 질문에 "혈육의 정이라는 것이 금방 그렇게 와 닿더라"고 말했다.
19일 오전 인천공항에 도착해 공식환영 행사장에서 틈틈이 만난 김 박사는 이번 귀국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영화에 나오는 인물인가 하는 착각도 들었다"는 귀국인사말을 남긴 김 박사는 한때 "국정원 직원이 따라다니거나 하지는 않겠죠?"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아내 김방지(60)씨와 함께 오는 10월 18일까지 한국 땅에 머무는 김 박사는 연신 미소를 지었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편치도 못했다. 이번 행사에 함께 오지 못한 '민주화 동지'들이 마음에 걸렸던 것. 특히 지난 70년대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함께 만들었던 송두율 교수에 대한 국정원의 체포영장 발부는 그의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송 교수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는 너무 비인간적이며, 소름이 돋을 정도"라고 말하는 김 박사의 귀국 소감은 어떨까.
- 37년만에 조국을 찾았다. 소감을 밝힌다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출발할 때도, 인천공항에 내려서도 '내가 지금 영화에 나오는 인물인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들을 만나고 나니, 혈육의 정이라는 것이 금방 그렇게 와 닿더라.
이제 실감이 난다. 조국 땅에 와서 흙냄새도 맡고, 동생들도 만나고, 환영식도 참가하고 나니까 이제야 실감이 난다."
- 독일로 가게 된 계기는.
"연세대 학부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동양철학을 공부하러 30살이 되던 66년 독일 튜빙겐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뒤 결혼할 때 잠깐 한국에 들른 것 외에는 30여 년간 오지 못했다."
- 독일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학생 시절이었던 1973년 최종길 교수 사건과 연루돼 공부도 거의 중단했고, 그 때부터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때 송두율 교수, 김길수씨와 함께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결성했다. 박정희의 죽음 후에는 민주화가 오리라고 기대했는데, 오히려 거꾸로 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때 많은 분들이 운동을 포기하고 귀국하기도 했고….
84년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 얼마 전까지는 시청 교육과에서 청소년담당 교육원으로 일했지만, 지금은 나이가 많아 아내가 경제를 맡고 있다."
- 애초 입국금지의 원인이 된 최종규 교수 사건 때 김 박사의 상황은 어땠나.
"당시 해외에도 안기부 직원이 있었는데, 안기부에서는 학생들을 주로 이용했다. 내가 공부하던 프랑크푸르트에도 학생 신분인 안기부 직원이 있었는데, 송두율 교수의 고등학교 2년 선배인가 그랬다. 그래서 함께 밥도 먹고 잘 놀았는데, 얼마 뒤에 그가 안기부 직원인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그 사람이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낌새가 이상해서 일부러 만나지 않았는데, 독일인 친구가 외출했다가 들어오면서 바깥에 건장한 사내들이 많다고 전했다. 그 때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터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월 26일 중정이 최종규 교수 사건을 발표한 당일, 헤럴드 트리뷴에서 그 기사를 크게 내보내서 알았다.
그 당시 우리 대학 교수 3명이 기자회견을 열어 안기부 직원 2명을 쫓아내고, 나의 정치망명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보호해줬다. 동백림 사건을 일으킨 이후 또 다시 이런 사건을 조작한다고 독일내 큰 신문들이 모두 떠들었다. 이 때문에 안기부직원 2명이 모두 쫓겨난 걸로 기억한다."
- 고국에 남은 가족들과는 연락을 자주 했나.
"간첩단 사건이 터지고 나서는 연락도 제대로 못했다. 이 때문에 80년 초반까지는 외로움을 극복하기 어려웠는데, 80년대 후반에 가족들과 전화통화라도 하니까 좀 나아졌다. 하지만 어머니, 누님은 전화통화만 해도 말씀을 못하시고 울기만 하시니까…, 안타까웠다."
- 한국 정부에 대한 원망은 없었나.
"조국에 대한 원망도 물론 있었다. 독일 가서 3년간 공부도 잘 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서 벼락을 맞았다. 어떻게 원망이 없을 수 있나. 하지만, 고향과 조국에 대한 간극을 빨리 메워야지…, 그래도 빨리 메워질 것 같다."
- 국정원이 송 교수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나.
"들었다. 아무리 위법을 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런 시대에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너무 비인간적이며, 소름이 돋는다."
- 앞으로 한국에서의 일정은.
"한국에서는 10월 18일까지 머물 예정이다. 인생의 좋은 시절 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는데, 부모님 산소에도 가봐야 되지 않겠나. 또 천도교 쪽에서 2군데 강연을 부탁한 일도 있고, 오는 11월 독일에서 한국과 독일 시인 한분씩을 모시고 '시의 밤'을 기획하고 있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 김영균 기자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