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향기와 수필의 소박함이 어우러져

정호승, 안도현, 장석남, 하응백의 시가 있는 에세이 <이름이 란(蘭)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등록 2003.09.19 14:50수정 2003.09.19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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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름이 란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책 <이름이 란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동아일보사
최근 들어 자신이 좋아하는 시들을 모아 시와 시인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는 류의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다. 이러한 출판 흐름의 뒤에는 시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학 작품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따라서 함축적인 의미로 인해 해석이 어려운 시들이 많은 대중들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이 책 <이름이 란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는 네 명의 시인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시들을 모아 놓고 그 시와 관련된 에세이를 써 나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비슷한 부류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한 명의 저자가 아닌 여러 명의 시인들이 시의 선별과 해석 작업에 참여했다.


정호승, 안도현, 장석남, 하응백, 이 네 사람은 현재 모두 시인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들의 시풍은 서로 각각 달라 개성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이 네 시인이 서로 다른 색깔의 시 창작을 하듯이, 그들이 고른 시들과 그 시들에 대한 의미 해석 또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책에서 각각의 시 한 편 한 편은 다양한 해석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한다. 저자들이 지닌 시에 대한 애정과 이해는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 한 편의 에세이로 다시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소개된 시들은 에세이와 함께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하는 대상물이다.

이성복 시인의 <편지 1>을 소개하면서, 하응백씨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랑은 불연속적인 두 개체가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이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혼자 있는 것도 불가능하다. 심심하고, 외롭고, 허전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하나로, 오락가락 하다가, 그 힘든 시소놀이를 하다가, 사람은 죽는다."

그가 전하는 사랑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를 깨닫는 데에 섬광 같은 느낌을 전해 준 시가 바로 이성복의 <편지 1>이다.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 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야기하는 이 시 한 편을 통해 하응백 시인은 사랑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 그리고는 자신이 깨달은 삶과 사랑의 의미를 시의 향기와 함께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라는 시를 전달하면서, 후배 시인 정호승은 자신이 느꼈던 기차역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이야기한다.

"기차역은 늘 그리움의 장소다. 삶의 웃음보다 눈물이 더 많은 곳이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기차를 타고 각자 거쳐 가야할 역을 거쳐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나도 수많은 역을 거쳐왔다. (중략) 중요한 것은 대도시의 역이 아니라 새마을 열차도 우등열차도 서지 않는 간이역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에겐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이 있어서 행복하다."

이 책의 공동 저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관점으로 그들이 좋아하는 시들이 지닌 가치를 해석하고 전달한다. 각기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고 해석하지만, 그 속에는 시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향기와 에세이의 소박함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무지개 빛깔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문학이 주는 가치란 그렇게 크고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학은 그 상상력의 힘을 통해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메마르고 답답한 삶 속에서 짧은 시 한 편, 소박한 에세이 하나를 통해 한 줄기 빗방울을 느껴 보자. 그것만으로도 당신이 속한 이 세상이 충분히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

이름이 란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안도현,
동아일보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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