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를 뭐 하러 취재해?"

<현장> 고 이경해 열사 추모집회

등록 2003.09.22 16:24수정 2003.09.22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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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일 고 이경해씨 추모집회에 상복을 입고 참석한 농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일 고 이경해씨 추모집회에 상복을 입고 참석한 농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20일 광화문에서 당초 오후 6시 시작될 예정이었던 고 이경해씨 추모집회는 경찰들의 무리한 진압으로 1시간 늦게 열렸다. 현장에서 농민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농민들의 마음은 하나 같았다.

"소득을 보장해달라."

이복흠(43) 한농연 전남도회장은 말한다.

"지금 내 농사 걱정도 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농업에 대한 희망이 더 중요하다. 우리 농민들이 쌀 농사 지어봤자, 쌀값보장이 안 된다. 소득을 보장해달라. 우리는 그것뿐이다. 우리 농업이 살아야 우리 민족이 사는 것이다."

한편 이날 집회에는 한총련 학생들도 일부 참석해 시민들에게 농민들의 주장이 담긴 유인물을 나눠주며 농민들에게 작으나마 힘이 되고 있었다.

전남 보성에서 한우를 키우는 한 농민에게 고향 있는 자식 같은 소가 걱정되지 않느냐고 묻자 "이경해 열사의 죽음을 신문으로 봤다. 지금 내가 고향에 내려가면 뭣하겠는가. 노력한 만큼 내 손에 돈이 안 쥐어진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길이 막혀 뒤늦게 올라 온 전농 나주농민회 농민들은 식사를 못해 길 한편에 앉아 밥과 김치를 나눠먹기도 했다. 주변에 퇴근하는 시민들이 흘깃 쳐다보기도 했지만 마치 논가에서 하루 농사를 마치고 새참을 먹는 농민들처럼 얼굴에는 희망이 가득해 보였다.


또 다른 한 켠에서 충북 음성에서 4살짜리 딸을 데리고 상경한 종애 엄마와 남편 김봉수(32)씨가 있었다. 엄마 손을 붙잡고 4살짜리 여자아이가 너무 귀엽게 떡을 먹고 있어 한참 동안 아이를 지켜봤더니 종애엄마가 먼저 기자에게 말을 했다. "이 떡 드세요"하며 떡 한 개를 건넨다. 마음 씀씀이가 친누나처럼 느껴졌다. 이들 부부는 고향에서 고추농사를 짓는 젊은 농민 부부다. 남편 김봉수씨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오기에는 위험한 자리 아닌가.
(길게 한 숨을 내쉰 뒤 종애 아빠는 말문을 열었다.) "고향에 있어봤자 무엇하나? 지금 상황이 이런데 농사를 지어 무엇하나? 그래서 오늘 일가족을 다 데리고 올라왔다."


- 그래도 지금 하고 있는 농사가 걱정되지 않나.
"태풍피해를 우리보다 더 심하게 입은 지역 농민들도 올라왔다. 이경해 열사의 죽음을 보고 분신한 농민이 있었는데 우리 농민들의 마음은 다 똑같다."

- 앞으로 농촌경제가 더욱 악화 될 것 같은데…
"농업개방은 반드시 막아내야 한다. WTO 농업부문 개방은 농민만 죽이는 게 아니라 우리 민족을 죽이는 일이다. 반드시 막아내야 한다."

- 농민들에게 이경해씨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그저 한 농민의 죽음이 아니다. 우리 농업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경북 고령에서 올라온 농민 6명이 한 구석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기자가 신분을 밝히고 말을 걸자 한 농민이 손사래를 치며 "거기, 기자 양반 우리 같은 껍데기를 뭐 하려고 취재하냐"고 말한다.

왜 껍데기라고 하느냐고 물으니 됐으니까 그만 가보란다. 가만히 있을 테니 그냥 이야기들 나누시라고 했다. 말을 걸기보단 가만 지켜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들이 한참 이야기하는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리니 아까 그 껍데기(?) 발언을 한 농민이 기자에게 말문을 연다.

"아까 껍데기라고 했던 말은 기자들이 왜 이럴 때만 농민들 목소리 듣겠다고 나타나느냐 이 말이야."

술에 약간 취한 그 농민은 기자에게 호통을 치듯 말을 이어간다.

"현장에 가보라고 현장을 지금 (비닐)하우스가 다 쓰러지고… 말도 못한다 이거야. 농민의 삶을 이해하고 싶으면 우리 같은 껍데기를 보지말고 현장에서 느껴라 이거야. 제발 진실을 전해주쇼."

기자는 가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계속 질문을 했다.

- 농민을 위해서 정부가 무엇을 해줬으면 하나.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봐. 농민의 삶을 이해하려면 농약 치는 것부터 배워라."

- 농사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닐 것 같다.
"농사나 하지 뭐하러 왔느냐구? 이경해 열사 한 사람의 희생이 큰 파장을 일으켰잖아? 우리들 한 명, 한 명의 힘이 이 집회를 통해 큰 힘을 발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참석했다."

이야기 도중 갑작스럽게 한나라당 주진우 국회 농림위원회 의원이 찾아왔다. 주 의원은 WTO 각료회의에 국회 대표로 참가한 바 있다. 기자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하더니 자기 이야기를 잘 들어보라고 하며 한 농민에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한다.

"우리 한나라당은 정부에 45조 국고 보조금 지원을 요구했어. 근데, 그 쪽(민주당)에서 막고 나서는 거야."

"45조면 한숨 돌리겠네요. 근데 의원님 우리 농민들은 WTO(협상)에서 농업(부분)을 제외해달라 이건데요."

"그건 안되지. 이거 봐 이 사람아, 국가가 돌아가는데… 어? 잘 알잖아. 그건 안된다구."

주 의원은 기자에게 명함을 건네며 어느 언론사 기자인지 묻는다. <오마이뉴스>라고 대답하니 "거기 좀 삐딱한데… 하여튼 알았다"며 자리를 옮겼다.

집회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고 이경해씨의 장녀 보람씨가 무대 위에 올라왔다. "아버지의 죽음이 정말로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라고 흐느끼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보람씨의 눈물 섞인 추모사를 들으며 많은 농민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무대에 마련된 고 이경해씨 영정에 헌화를 하는 것으로 집회는 마무리 됐다. 이후 집회에 참석한 농민들은 이경해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아산병원으로 버스와 도보로 이동했다.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라는 말이 있듯, 이날 집회에서 흘린 농민의 눈물은 국민의 눈물로 번져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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