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1)

산길과 바닷길과 들길이 모두 어우러진 곳

등록 2003.09.22 15:09수정 2003.09.22 17:14
0
원고료로 응원
당신이 지금 울산시 동구 남목3동사무소 바로 위 무지개골 쌈지공원에서 액셀러레이터에 발을 올리고 있다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의 여행에 들어설 준비가 됐다고 할 수 있다.

보통 '멋진 길, 아름다운 길, 기억에 남는 길' 하면 구절양장(九折羊腸 : 아홉 겹이나 꼬인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한)의 산길이나, 아득히 넓은 바다의 해안선을 끼고 돌며 까마득한 절벽에 달라붙은 해안도로나, 아니면 지평선이 보일 만큼 광활한 벌판을 가로지르는 길을 말할 것이다.


이제 당신은 바로 이 세 가지 요소를 두루 갖춘 길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여행하게 될 것이다. 특별히 많은 준비물은 필요 없다. 필기도구와 수첩 정도면 되리라. 혹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이라면 사진기도 준비해야겠지.

잠깐! 사실 이 글의 목적지까지 냅다 차로 달리면 한 시간 정도밖에 안 걸리지만 당신에게 하루 정도의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그래야 '지상에서 가장'이란 단어를 사용했던 까닭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이란 단어는 다분히 주관적이기에 그런 점을 참조하며 읽어주기 바란다...<필자 주>


a 남목3동사무소 위 무지개골 쌈지공원

남목3동사무소 위 무지개골 쌈지공원 ⓒ 정판수


출발지점에서 1.4k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길이 나 있는데 거기에 맨 먼저 둘러볼 곳이 있다. 바로 봉호사다.

'사(寺)'란 이름으로 하여 절이라는 걸 알아채는 순간 아마 대부분 무슨 국보나 보물이 있는 줄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름을 한 번 보자. '봉'은 봉수대(烽燧臺)의 '봉(烽)'자, '호'는 보호할 '호(護)'자. 자 이러면 저절로 봉수대를 지키기 위해 있는 절이란 걸 알 수 있으리라. 그렇다. 봉호사 바로 곁에 봉수대가 있다. 절 때문이 아니라 이 봉수대 때문에 이곳을 반드시 들려야 한다.

이 '주전봉수대(원 명칭은 남목천 봉수대)'는 조선시대 해안가와 내륙의 요충지를 연결하는 간봉(間烽 : 직봉直烽과 직봉 사이를 이어주는 봉수대)의 하나였다고 한다. 봉수대는 봉홧불을 올리는 곳이므로 높고 주변이 탁 트인 곳에 위치한다. 이 봉수대도 예외가 아니다.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 망망대해를 바라보면 저절로 감탄사가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다. 옛 사람들이 쓴 울산 제일경(第一景)이란 표현에 동감할 것이다.


이 봉수대의 봉화를 받는 곳이 우가산 유포봉수대인데 이곳에서 경주 하서지(下西知)로 전했다고 한다.

a 주전봉수대

주전봉수대 ⓒ 정판수

a 주전 봉수대 안 - 봉홧불을 피워 올리던 모습으로 복원돼 있다

주전 봉수대 안 - 봉홧불을 피워 올리던 모습으로 복원돼 있다 ⓒ 정판수


여기서 나와 3km쯤 가면 바다가 보이면서 오른쪽에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타난다. 이곳이 '봉대산'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눈치 빠른 이라면 이름으로 봉수대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곳에 들러야 할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산꼭대기까지 맨발등산로가 조성돼 있기 때문이다. 정말 발바닥을 괴롭힐 잔돌도 거의 없이 매끈한 흙길을 맨발로 걷고 나면 기분이 무진장 상쾌해진다. 물론 피로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발바닥에 흙이 묻는 부작용이야 있지만, 그것은 정상에 자리잡은 정자에서 아래 바다를 내려다보면 아까 봉수대에서의 감동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기에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

참 여기까지 이르는 길에서 중요한 걸 빠트릴 뻔했다. 좁은 이차선 도로 양쪽에는 봄이면 벚꽃이, 여름이면 무궁화가, 가을이면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겨울이면 꽃배추가 흐드러지게 핀다. 인위적으로 조성해 놓은 것이지만 그 아름다움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느 봄날 이른 새벽에 그 길을 간다면 지난 밤 바람에 날려 떨어진 벚꽃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낮이라도 좋다. 샛바람에 하늘하늘 날리는 꽃잎이 차창으로 들어온다면 그대 비록 급한 일로 차를 몰더라도 멈춰서 꽃 속에 파묻히고 싶은 충동을 억제치 못하리라.

자연학습원을 지나 주전 새마을에 이르면 잠시 차에서 내려야 한다. 여기서부터 계속 이어지는 몽돌밭의 운치를 맛보기 위해서다.

일단 양말을 벗어라. 그런 뒤 검은자갈돌을 밟으면 절로 온 발에 자르르 울리는 전율과 같은 상쾌함이 그대로 전달된다. 주전동 해안은 온통 검은자갈밭이지만 새마을에서의 알맹이가 작지도 크지도 않아 밟기에 가장 적당하다.

참고로 주전에서 정자까지 이어지는 약 10km는 몽돌밭의 연속이다. 그런데 주전 몽돌과 정자 몽돌은 크기 면에서 차이가 난다. 주전 것이 정자 것보다 알이 훨씬 굵다.

a 주전 몽돌해변

주전 몽돌해변 ⓒ 정판수

5분쯤 걸으면 해수욕장이라고 이름 붙은 곳에 닿는다. 그러나 당신은 여기서 해수욕을 할 수 없다. 물이 더러워서? 아니다. 맹세컨대 이곳 바다보다 더 깨끗한 바다는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너무 깊어서이다. 한 오 미터만 나가도 몇 길 깊이가 보장돼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솔밭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잠시 앉았다 가도록 하자. 눈을 가만 감으면 코로는 솔내음이 스며들고, 귀로는 바닷물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여행하는 계절이 한여름이면 그곳에 차를 댈 수도, 앉아 쉴 자리도 쉬 찾기 어렵다. 동구 주민의 주거지로 바뀌기에. 열대야(熱帶夜)가 심할 적에는 저녁거리를 챙겨와 거기서 먹고 자고 난 뒤 아침에 출근하는 회사원들을 보기란 어렵지 않다.

600미터쯤 가면 왼쪽에 어물동으로 들어가는 표지판이 나온다. 이곳도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다. 그곳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약 5m 크기의 '마애석불(磨崖石佛 : 암벽을 깎아 새겨만든 불상)'이 기다리고 있다.

a 어물고 마애불상 - 비바람에 많이 손상된 모습이다

어물고 마애불상 - 비바람에 많이 손상된 모습이다 ⓒ 정판수

본존불(本尊佛)은 약사여래상이며, 좌우 협시보살은 약왕보살이 아니라 월광보살과 일광보살(둘 다 원래는 미륵불을 모시고 있음)이다. 마모가 심한 편이지만 약사여래불의 손에 들고 있는 약합은 비교적 또렷이 보인다. 치병(治病)의 부처님답게 준비된 모습이다.

그런데 이 부처 뒤에 있는 바위가 여인의 음부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풀이 우거진 계절 비 조금 내린 뒤 가보면 얼굴을 붉힐 정도로 적나라하다. 그리고 그 아래는 두 마리 용의 형상으로 동해를 향해 웅크린 자세라 임신한 여인이 이곳에 와 빌면 동량지재(棟梁之材 : 나라의 기둥이 될 만한 인재)를 얻는다는 소문이 있으니….

다시 나와 1분도 채 안 돼 당사마을이 시작되면서 왼쪽에 동해초등학교(현재는 폐교 상태)가 있고 그 반대편 아래 바닷가를 보면 작은 동산이 있는데 이곳은 주변 어민들이 용왕제를 지내는 곳이다. 가끔 그 흔적으로 형형색색의 끈이 매달려 있는 걸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당사마을을 지나 200미터쯤 가면 왼쪽에 '강동구장(球場)'이 있다. 이 축구장은 산 속에 자리잡아 주변 경관도 일품이지만 지세(地勢)도 좋아 국가 대표팀의 훈련장소로 애용되곤 한다. 이번 월드컵 기간 동안 터키에서 빌려 사용했는데 그 덕으로 3위 한 건 아닌지….

700미터쯤 더 가면 바닷가에 군초소 표지판이 나오는데, 초소는 아래 숨어 내려가지 않으면 불행히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당신은 잠시 차를 멈추어야 한다.

거기서 바다를 한 번 바라보라. 아득히 펼쳐진 수평선 저 너머 가물거리는 돛단배의 흐늘거림조차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이다. 뿐인가, 파도 센 날 하얗게 무늬 짓는 까치놀이 저의 생생함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월 초하루 새해 첫날의 해돋이를 보면서 소원을 빌기에 적당한 장소이고, 또 밤이라면 무시로 오징어배에서 내뿜는 집어등(고기가 모이도록 불을 밝혀놓은 등)의 뽀오얀 불빛마저 정겹게 감상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하다.

또한 이즈음의 그 길목은 억새풀이 바람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햇빛을 받아 하얗게 부서지는 장관이 군데군데 펼쳐진다.

a 군데군데 있는 억새풀 군락의 하나

군데군데 있는 억새풀 군락의 하나 ⓒ 정판수

우가마을, 뒷우가마을, 우가축양장을 지나 계속 달려가면 제전마을에 이른다.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오른쪽길로 내려가 바닷가 마을에 들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어촌마을 특유의 활력이 살아있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왕 차를 멈춘 김에 바로 왼쪽 길가에 눈을 주면 할머니 아주머니가 벌여놓은 조그만 난전이 보일 것이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내놓는 삶은 옥수수의 구수한 내음에 이어 가을이면 호박전, 호박죽의 달큼한 맛을 본 사람은 다음에는 그냥 이곳을 지나치지 못한다.

판지마을을 지나려면 독특한 냄새를 맡아야 한다. 바로 멸치젓공장에서 배어 나오는 젓갈 냄새 때문이다. 이곳은 멸치젓으로 유명한데, 현명한 주부들은 여기 멸치젓을 사다 먹는다.

한여름 호박잎으로 쌈 싸 먹을 때 통멸치 한 마리 척 밥 위에 걸치면 다른 반찬에는 젓가락이 가지 않는다. 상추는 막장과, 머위는 초장과 궁합이 맞는다면 미역 다시마 같은 해초류는 역시 멸치젓이다. 만약 젓국보다 통멸치를 좋아하는 이라면 언제라도 여기서 구하면 된다. 가을에 담은 멸치젓은 다음해 여름이면 녹아 없어지는 게 상례이나 예선 한여름이라도 통멸치젓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멸치젓에 취해 있으면 다른 중요한 걸 놓치기 쉽다. 잠시 젓갈 냄새를 떨치고 오른쪽 바닷가로 내려가면 '미역바위'가 있다. 신라 말 신흥 고려에 항복한 울산 호족 박윤웅이 고려에 협조한 덕으로 미역 채암권(바위에 붙은 미역을 채취할 수 있는 권리)을 획득한 이래 박씨 문중에 의해 관리되어 왔으며, 현재에도 거기서 채취한 자연산 미역의 일부를 박씨 문중에 바치고 있다고 한다.

a 당사에서 용왕제 지내는 바위섬

당사에서 용왕제 지내는 바위섬 ⓒ 정판수

정자 삼거리(실제로는 네거리)를 지나 100미터쯤 가면 오른쪽에 '유포석보'의 흔적이 있다. 석보란 성보다 작은 규모의 방어요새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의 석보는 보통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요충지에 건립됐는데 유포석보 역시 그러하다. 다만 현재는 원형이 없어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어 아쉬운 마음이다.

거기서 2분쯤 가면 고급레스토랑이 군집(群集)을 이루고 있다. 맨 먼저 나타나는 바다의 푸른빛을 닮은 비취의 다른 이름인 '제이드'를 지나면 이탈리아 '나폴리'에 들어갈 수 있고, 이내 호주의 '시드니'로 가 '오페라하우스'에서 감상을 마치면 이번엔 '캐나다하우스', 그리고 알래스카로 자리를 옮겨 '화이트캐슬(눈 덮힌 성)'에 들렀다가 마지막 네덜란드의 '윌(풍차)'에 들르면 세계일주가 끝난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특히 아직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상대가 있는 당신이라면 그런 고급레스토랑보다 정자 일출해변을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주전보다 작은 몽돌이 발을 간지럽히고 파도소리가 밀어처럼 밀려오면 아무리 목석 같은 이라도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 것이라 확신한다.

혹시 영화광이나 연인과의 다정한 추억을 만들 사람이라면 '윌' 좀 못 미쳐 있는 자동차극장에 들러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고….

a 정자 일출해변 - 해 뜨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정자 일출해변 - 해 뜨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 정판수

다리(정자교)를 지나기 전 왼쪽으로 가면 '태연학원(특수학교, 재활원)', 다리 지나 왼쪽으로 가면 신라 때의 '신흥사'가 있다.

원래 신흥사는 동대산 정상 근처에서 동해를 굽어보며 자리한 50만 평 규모의 대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불타버린 데다가 6·25 동란 때는 빨치산 남부군 제3지대의 활동지역이어서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아 수많은 경전과 판각이 없어져 거의 폐사 상태로 있다가 91년에 복원되기 시작하였다.

외떨어진 곳에 위치한데다 찾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아 조용한 사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들를 만하다. 단 절 바로 밑까지 차를 몰고 갈 수 있으나 여러분들에게 2km쯤 아래 넓은 터에 주차한 뒤 걸어올라 가라고 권하고 싶다.

길목에 갯버들, 서어나무, 쪽동백, 굴참나무, 졸참나무, 자귀나무의 숲을 거쳐 절 입구에 이르면 홰나무 두 그루가 반가이 맞이한다.

a 신흥사 가는 길 - 구름 덮힌 산중턱에 신흥사가 있다

신흥사 가는 길 - 구름 덮힌 산중턱에 신흥사가 있다 ⓒ 정판수

그리고 이 절의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울산과 경주 사이의 국도가 내려다보이는 고개에 이르는데, 그 고개가 '기박이재'이며 이 재에 성이 있으니 신라 성덕왕 때 쌓은 장성(長城)인 '기박산성'이 바로 그것이다.

서강 해수탕을 지나 경사길을 오르면 '달맞이 휴게소'와 '신명 휴게소'가 나온다. 거기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이어서 검문소가 보이는데 거기서 아래 경사 심한 내리막길을 따라 가면 코오롱 휴게소다. 이곳에서의 해안 정경도 그대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곧이어 해병초소가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울산시가 끝나고 경상북도 양남면이 시작된다.

(계속 이어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2. 2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3. 3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4. 4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5. 5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