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동차의 창에는 늘 불기운이 어린다

창이 있는 풍경 13

등록 2003.09.24 10:08수정 2003.09.24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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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거울을 보고 있는 불자동차. 깨끗이 세수한 맨얼굴의 창이다.

거울을 보고 있는 불자동차. 깨끗이 세수한 맨얼굴의 창이다. ⓒ 박태신

불의 색 빨간색을 온몸에 두르고 의기양양하게 달리는 불자동차 소방차는 언제나 제 동경의 시선을 받습니다. 어릴 때뿐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그 자동차들이 도시를 질주할 때면 제 시선은 불꽃 같은 기민한 속력으로 달려가는 그 자동차에 꽂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자동차 나오는 영화를 많이 보았습니다. <분노의 역류>, <화급>, <리베라메> …. 그리고 재난영화에는 불자동차가 빠짐없이 나옵니다. <단테스 피크>, <타워링> ….


그 자동차 창 안에는 목숨을 걸고 불을 제압하며 사람들을 구조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소방수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과 싸워 이길 도전의식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에게 인정이나 양보는 미덕이 아닙니다. 무모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음'이 미덕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야 하고 누군가 덤벼들었으면 하고 기대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올 여름 그런 사람들의 무기-소방차를 실컷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가까이에서 자세히. 그러나 싸움의 현장이 아니라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요. 마치 그 여름날의 아침나절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이라도 받은마냥 말입니다.

a 고가 사다리차. 사다리 맨 앞에 고정 호스가 있다. 차의 창들은 수 없이 많은 공포의 장면들을 안타깝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고가 사다리차. 사다리 맨 앞에 고정 호스가 있다. 차의 창들은 수 없이 많은 공포의 장면들을 안타깝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 박태신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불자동차는 찍기 좋게 포즈를 잡아주었습니다.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자신의 매력포인트를 보여주며 한껏 이방인을 환대해 주었습니다. 강원도 정선의 소방서에서였습니다.

친절한 소방관 한 분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 영월소방서는 정선읍을 비롯하여 네 개 읍을 관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각 읍에 소방수 한 명과 소방차 한 대가 파견되어 있어 초기의 화재를 진압하고, 그 후에 이곳에서 출발한 소방차들이 처리한다고 했습니다. 네 개 읍이 어느 정도의 영역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무척 넓은 곳임은 분명했습니다.

마당에 고가 사다리 달린 소방차는 밖에서 햇살을 쬐고 있었습니다. 고가 사다리는 원반 회전통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고가 사다리 앞부분에는 고정된 호스가 달려 있고요. 허리춤과 꽁무니에는 네 개의 디딤대를 품고 있는데 그 움직임이 눈에 선합니다.

a 소방차 뒷좌석. 창 안으로 소방관들을 지켜줄 마스크들이 보인다.

소방차 뒷좌석. 창 안으로 소방관들을 지켜줄 마스크들이 보인다. ⓒ 박태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이번에 다른 용도의 소방차를 만납니다. 먼저 소방관들이 채비를 갖추는 뒷좌석 달린 소방차를 봅니다. 창 안에는 마스크가 시트 옆에 달려 있어 긴장감을 느끼게 합니다. 뒤쪽 대형 트렁크 안에는 커다란 하얀색 덧문이 달린 사물함이 여러 개 달려 있습니다. 여러 공구들을 운반하는 용도를 지닌 소방차인 것 같습니다. 사물함마다 내용물이 적혀 있습니다.

a 말끔하게 씻은 앰뷸런스 내부

말끔하게 씻은 앰뷸런스 내부 ⓒ 박태신

한쪽에는 앰뷸런스가 있습니다. 청소중인 듯 사방의 문을 열어 두었습니다. 덕분에 안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물함에 여러 물건이 비치되어 있고 접이 의자와 측면 긴 의자가 있습니다. 들것이 올려지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비상근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뉴욕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구급대원의 이야기입니다. 차창 밖의 도시 모습은 현란하고 어지럽습니다. 그 속을 뚫고 죽어가는 사람을 싣고 만원의 병원 응급실을 찾아갑니다. 죽도록 달려도 살려내는 사람이 없어 밤이 더욱 적막한, 피곤에 지친 구급대원의 모습이 보는 이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의 절박한 움직임엔 이 사회의 극단의 촉수가 달려 있습니다.

사무실 유리문에는 <소방관의 기도>가 노란색 바탕의 포스터에 쓰여 있습니다. 소방관들은 기도합니다.


"제가 약한 자의 부름을 받을 때에는 신이시여! 아무리 강렬한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떨고 있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저에게는 언제나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시어 가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신속하고 효과적인 화재진압을 하게 하소서.

저의 업무를 충실히 수행케 하시고 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하시어 저희 모든 이웃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그리고 신의 뜻에 따라 저의 목숨을 잃게 되면 신의 은총으로 저의 아내와 아이를 지켜주소서."


a 소방관의 기도.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떨고 있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소방관의 기도.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떨고 있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 박태신

지금도 시도 때도 없는 불이 일어나는 시간을 기다리며 기약 없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이 좀더 휴식할 수 있기를, 불자동차가 좀더 햇살을 쬐며 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왕 나갈 바에는 힘차게 경적을 울리며 도시를 질주하는 자유를 누리길 바랍니다.

불을 찾아가는 자동차의 창은 늘 '빨간' 그림자와 불기운으로 뒤덮여집니다. 창 밖으로 소방수들이 보는 세상은 영화 <비상근무>에서의 응급대원처럼 여전히 구조할 것들이 많은 곳일지 모르겠습니다. 태풍으로 수해를 입은 곳에 이 불자동차도 한 몫을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교통질서 위반과 소음 발생의 장본인일지라도(우리 모두가 기꺼이 용납한), 마치 이 졸고 있는 도시를 깨우기라도 하듯 부산히 움직이는 존재들을 나는 여전히 동경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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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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