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떨어진 떫은 감도 우려먹었다

[어릴 적 허기를 달래줬던 먹을거리 11] 풋감 우려먹기

등록 2003.09.25 19:27수정 2003.09.2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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떫은 감도 우려 먹으면 맛있습니다. 안전성에 대한 것은 연구해 보지 않아 잘 모릅니다.  감이 익으려면 아직 한 달 이상 남아 있습니다.
떫은 감도 우려 먹으면 맛있습니다. 안전성에 대한 것은 연구해 보지 않아 잘 모릅니다. 감이 익으려면 아직 한 달 이상 남아 있습니다.김규환

허기를 못 참아 버찌 따다 벌에 쏘여 '뒈질' 뻔한 사건


어릴 때는 왜 그리 배가 고팠을까? 양푼에 보리밥을 가득 비벼 먹어도 곧 꺼지고 만다. 배불뚝이가 되어 배가 든든하지만 다시 밥을 찾는 것이 마치 밥벌레 같았다. 나는 지금도 허기를 참지 못한다. 아니 미칠 지경이 된다. 그러니 철마다 나오는 열매는 물론이고 꽃, 줄기, 뿌리를 따서 먹었다.

3학년 여름 방학 때 일이다. 혼자서 겁도 없이 버찌를 따러 갔다가 호되게 당한 사건이다. 아버지 술 받아다 드렸던 주전자를 들고 왕복 10리가 넘는 산길만 따라 극락(極樂) ‘긍내기’라 불렀던 조상 산소가 있는 고구마 밭 근처 벚나무에 올라 까만 열매를 절반 가량 따 담았다. 동네 벚나무는 이미 아이들이 다 따먹고 없었기 때문에 그 먼 곳으로 혼자, 산신령 나올까 두려운데도 노래를 크게 부르며 숲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에서 20분만 오르면 곡성군이다. 벚나무는 그늘에 있었고 주위에 작은 폭포(瀑布)가 떨어지는 웅덩이가 하나 있어 습한 곳이다. 나무에 간들간들 매달려 있으니 발에 땀이 나서 툭 미끄러졌다. 나무가 휘청하고 흔들렸다. 한 손엔 주전자가 들려있어 간신히 나무를 잡고 떨어지는 건 모면했다. 하지만 더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웅웅웅” “윙윙윙”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주위에 갑자기 시커먼 먼지 비슷한 것이 날리기 시작했다. 일순간 그늘이라 분간하기 어렵게 되더니 집나온 양봉 벌떼가 벚나무 위에 있던 내 몸을 감싸 포위했다.

먹을 것이 없던 한 여름이라 집을 나온 벌은 화가 날대로 나 있었고 급기야 무단침입자가 있으니 ‘그래, 너! 뒈져봐라’며 연발탄을 날린 것이다. 머리통은 둘째로 하고 고무신에 맨발의 청춘이었던 내 발에 수많은 봉침(蜂針) 시술(施術)을 하는 게 아닌가.


“엄마~” 소리 밖에 지르지를 못했다. 그 상황에서도 나는 주전자를 밑으로 던지지 못했다. 신주단지 주전자를 팽개치고 몸을 날려 웅덩이에 뛰어들었다. ‘벌은 물 속으로 뛰어들면 맥을 못 춘다’는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즐겨 먹었던 벚나무 열매 '버찌'를 우린 '범'이라 불렀습니다. 죽지 않고 산 게 다행이었지요.
즐겨 먹었던 벚나무 열매 '버찌'를 우린 '범'이라 불렀습니다. 죽지 않고 산 게 다행이었지요.김규환

나흘 간 문밖출입을 못하고 비료 물에 발을 담가 옴짝달싹 못한 처량한 신세


추스르고 나와 보니 온 몸에 침이 수도 없이 꽂혀 있다. 우선 손이 닿는 부분만 빼고 허겁지겁 집으로 뛰었다. 돌아올 때는 내리막길만 있어 지게를 지고도 10분도 안 걸려 내려 올 수 있었던 길이었지만 오른발만 50방이 넘게 쏘여 이미 탱탱 부어 더디기만 했다.

어릴 적 울어본 적이 없던 아이가 집에 돌아와 엉엉 울고 있으니 무슨 봉변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어머니가 급히 다가오신다.

“울 아들이 뭐가 잘못 된 것이여?”

“잉. 엄마 나를 벌떼가 덮쳤어.”

“어디? 오메 얼굴이고 머리통이고 가리지를 않았구만….”

“뭐하다가?”

“긍내기로 범(버찌) 따로 갔다가…. 엄마 거기보다도 발등은 더 많아…. 엉엉”

“흐미 호랭이 물어갈 놈들. 너 혼자 갔다냐?”

“잉.”

“우선 간장을 한 그릇 먹어라.”

“왜 엄마?”

“발라각고는 안되겠다.”

어머니는 벌에 쏘이면 언제나 침을 빼고 간장이나 된장을 발라주셨다. 그날은 정도가 심하여 바르는 걸로는 해결할 수 없었는지 짠 정도가 아니라 쓰디쓴 소태보다 더한 간장을 먹으라지 않나 ‘유안’(화학비료의 일종으로 설탕보다 약간 굵고 요소비료보다 조금 작은 알맹이. 잎을 먹는 작물에 주던 하얀 비료)을 세 줌 대야에 담아 녹이시더니 담그고 있으란다.

발은 미끈미끈해졌다. 8월 초 무더위에 어린 나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4일간을 변소 거동도 혼자서 할 수 없었다. 할일 다 해 놓고 버찌 따 먹으러 간 죄 밖에 없는데 내린 벌 치고 너무 무거웠다.

감꽃도 맛 있습니다. 약간 떫은 듯 하지만 떨어지지 직전에는 달콤합니다. 실에 꿰서 목에 걸고 다녔던 그 때가 좋았습니다.
감꽃도 맛 있습니다. 약간 떫은 듯 하지만 떨어지지 직전에는 달콤합니다. 실에 꿰서 목에 걸고 다녔던 그 때가 좋았습니다.김규환

여름 지나면 먹을 게 없어 태풍에 떨어진 풋감마저 줍던 시절

그렇게 그 해 여름은 지나갔다. 개학을 하고 이어 9월 태풍(颱風)이 간간이 올라와 동네와 들판을 뒤흔들어 놓았다.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워 묶느라 학교를 빼 먹는 날도 며칠 있었다.

시골 아이들은 폭풍우가 몰려와도 고샅을 지나다 한두 그루 심어진 배가 떨어진 걸 주우면 횡재할 수 있다. 그러니 집 안에 꼼짝 않고 있질 않는다.

뿐인가. 두 시간을 참지 못하고 돌아다녔던 당시 아이들은 언제 뒤집어 질지 모르는 반투명의 대(竹)로 만든 파란우산을 쓰고 떨어진 땡감 줍기에 바쁘다.

봄철 감잎이 피기 시작하면 허기진 배를 ‘감똘개’(건빵 색깔에 가까운 감꽃을 감똘개라 부르는데 제법 씹히는 맛이 있다)를 주워 먹었던 시절이다. 초등학생들은 누구나 감꽃 줍기에 바빴다. 더 주워 집으로 가져와서는 궁금한 입을 달래 씹으며 실에 하나하나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동생도 주고 직접 목에 걸고 다니기도 했다.

버찌 따 먹고는 마땅한 군것질거리를 찾지 못하던 기간이 길어 익으려면 두어 달이나 기다려야 하니 생감, 땡감이라도 줍는 것이다. 심심한 입을 놀리지 못해 풋감이나마 주워 민생고를 해결한다.

파시 ‘오려감’과 떫기 그지없는 ‘멍덕감’, 고종시, 대봉시, 뾰쪽감을 가리지 않았다. 태풍에 견디지 못하고 가지 째 떨어진 떫은 감을 주워 모은다. 감나무는 여느 나뭇가지와 비교하여 약하기 이를 데 없어 마구 부러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더 기다리는 아이들이다.

어린 감이 얼른 배부르기를 기다렸습니다. 해갈이를 잘 하는 감나무, 올핸 많이 열렸을까?
어린 감이 얼른 배부르기를 기다렸습니다. 해갈이를 잘 하는 감나무, 올핸 많이 열렸을까?김규환

재 넣고 굵은 소금 뿌려 물 부어 사나흘 지나면 떫은 맛 다 사라져 먹을 만 했다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 마당은 질컥거리고 뒤뜰로 돌아가는 담벼락엔 물이 뽀글뽀글 솟아오른다. 그래도 사방을 뒤져 쓰다만 항아리를 하나 구해서 감을 우릴 준비를 하느라 비 맞는 줄도 모른다.

스무 개 남짓 담을 그릇을 준비하고는 먼저 감을 아래에 앉히고 아궁이에 가서 부삽으로 재를 한 되 가량 넣는다. 굵은 소금 한 줌으로 간을 하고 물을 부어주면 “뽀로록” 거품이 인다. 넘치지 않게 막대기로 휘휘 저어준다.

그래 잘 우려져야 한다. 두 손을 비벼가며 정성 기도를 하고 식구가 다니지 않는 뒤뜰에 고이 간직한다. 이걸로 작업은 마쳤다.

사나흘 지나니 태풍이 지나치고 세상이 언제 그런 일 있었냐는 듯 평온해지면 곶감 빼 먹듯 하나 씩 꺼내 칼로 잘라 먹고 통째 베먹었다. 절여지고 독이 빠진 생감은 단감 없던 마을 아이들에겐 홍시 나올 때까지는 귀중한 먹을거리였다. 떫지도 않고 오히려 소금에 절여둔 장아찌 같았다.

언제 한 번 먹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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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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