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례행사라도 좋다, 팍팍 삶아 보자!

조금만 신경쓰면 자연 환경이 달라집니다

등록 2003.09.26 10:18수정 2003.09.27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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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틀 간, 집에 있는 수건이란 수건은 모조리, 그리고 서랍에 처박혀 있던 속옷이란 속옷은 모두 끄집어내 커다란 들통에 넣고 몇 차례에 걸쳐 푹푹 삶았다. 첫날은 여름 내내 얼굴과 몸을 닦는데 썼던 수건 십여 장을, 그리고 다음 날은 속옷들과 행주, 걸레에 이르기까지, 삶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꺼내 팍팍 삶았다. 날씨도 화창해서 삶아 널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이번 일은 연례행사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다른 일들에 떠밀리고 날씨에 떠밀려 미루고 미루던 일이었다. 그 일을 드디어 해치웠다. ‘눈엣가시’가 빠지고, ‘십년 묵은 체증’이 풀린 것처럼 시원한 이 기분을 아시는 분은 아실 것이다. 무엇이건 미루던 일을 해치웠을 때 느끼는 기분은 다르지 않을테니까. 게다가 새하얀 빨래를 바라보는 마음은 기쁘기 그지없다.

a 푸른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하얀색에 버금갈 만큼 새하얗게 변신한 속옷들

푸른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하얀색에 버금갈 만큼 새하얗게 변신한 속옷들 ⓒ 장영미

빨래를 자주 삶는 분들이 읽으면 “연례행사라니, 아휴 더러워!”하실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요즘은 세제도 잘 나오고 세탁기의 성능도 좋아져서 빨래를 삶을 일이 별로 없어졌다. 표백제가 함유된 세제를 사용하면 마치 삶은 듯 하얗고, 색깔도 선명하게 빨래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제균·항균력이 뛰어난 세제들이 속속 등장해서 곰팡이 냄새 등 웬만한 냄새도 모두 없앨 수가 있게 되었다. 덕분에 습한 장마철의 실내 건조나 독신들, 맞벌이 부부들이 애용하는 실내 건조에도 대응할 수 있게 되었지 않은가? 그 뿐인가? 찌든 때에 바르기만 하면 되는 부분표백제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세제들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헹굴 때에는 섬유유연제로 마무리를 하면 폭신폭신하고, 향기롭고, 부드러운 감촉마저 살릴 수 있다. 거기에 - 빨랫감에 따라 다르지만 - 세탁기에 넣어 사용할 수 있는 풀까지 먹이면 그야말로 ‘완벽한 세탁’이 된다. 그러고보니 간편하고 신속한 빨래를 위한 세제의 진화는 끝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토록 다양화되고 강력해진 합성세제들이 우리와 우리가 처한 환경 생태계에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요즘처럼 바삐 돌아가는 도시에서의 생활 여건으로는 빨리, 손쉽게, 깨끗이 빨 수 있는 합성세제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빨리빨리 문화’는 또한 환경파괴와 맞물려 있으니 빠르고 편리하다고 마구 사용할 일만도 아니다.


일부에선 합성세제가 비누보다 세척력도 좋고 BOD(생물학적 산소 요구량)가 낮아서 환경파괴가 적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비누가 수중 분해 속도가 빠르고(희석 후 24시간 이내 분해), 피부 자극이 적으며, 독성이 적다. 또한 합성세제 원료인 석유와 같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화석원료가 아닌 재생산 가능한 생물자원을 원료 사용하기 때문에 그만큼 환경 부하가 적다는 점 등으로 아직까지는 비누가 합성세제보다 더 친환경적인 제품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최근에 빨래용 세제를 합성세제에서 가루비누로 바꾸었다. 이는 오랫동안 머뭇거린 끝에 겨우 내린 결단이었다. 나는 일본의 한 생활협동조합에 가입했는데 매주 한 뭉치의 상품목록지를 받는다. 다음 주에 배달 받을 상품들을 선택해서 컴퓨터 용지에 기입해 제출해야하는 숙제(?)를 받는 것이다. 상품목록지엔 식품 및 다른 생필품들과 더불어 세탁용 가루비누와 물비누를 비롯해 샴푸, 린스, 세숫비누, 표백제 등 온갖 종류의 비누제품이 실려 있다.


a 이번 주엔 '역시 비누'란 제품이 실렸네요. 매주 몇 종류의 제품이 돌아가면서 실리지요. 왼편엔 건조기 겸용 세탁기를 사용하는 한 주부의 빨래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엔 '역시 비누'란 제품이 실렸네요. 매주 몇 종류의 제품이 돌아가면서 실리지요. 왼편엔 건조기 겸용 세탁기를 사용하는 한 주부의 빨래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 장영미


a 내가 가입한 'pal system'의 상품목록지

내가 가입한 'pal system'의 상품목록지 ⓒ 장영미

누가 시키거나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환경과 우리 몸에 좋다는 비누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식구 중에 누가 아토피 피부염이나 주부습진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20세기 후반부터 화두로 떠오른 ‘환경’이란 올가미에서 나라고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누로 바꾸면서 머뭇거렸던 이유는 ‘세척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값이 좀 비싼 것이 아닐까? 정말 친환경적인 것일까? …’등의 의문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써 본 결과 세척력의 경우, 우리 집엔 심하게 더러운 빨래가 별로 없으니 별 차이를 못느끼겠다. 값이 좀 비싼 것은 비누가 대세를 이루고 있지 못하니 현재로선 어쩔 수 없이 부담을 질 수밖에 없는 부분인 것 같다. 환경을 위해선 ‘비경제’, ’비효율’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리고 친환경적인 면도 지금까지는 합성세제보다 앞선다는 결론이다.

전업주부인 나의 경우, 조금만 신경쓰면 굳이 여러종류의 합성세제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깨끗하게 빨래를 할 수 있다. 별로 어려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몇 가지의 빨래수칙만 지키면 누구라도 친환경적인 빨래박사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빨래수칙이란,
첫째 표시된 세제 사용량을 지킨다(오염물질의 배출을 최소화하고 세척력을 유지하려면 필수적이다).
둘째 따뜻한 물에 먼저 적당량의 세제를 푼 후 빨래를 넣어 20∼30분 정도 담가놓는다(너무 오래 담가 놓으면 오히려 분해된 때가 다시 들러 붙을 수 있다).
셋째 심하게 더러운 옷이나 부분적으로 더러운 곳, 양말 등은 손으로 부분세탁한 후 세탁기에 넣는다.
넷째 흰옷과 색깔옷은 구별해 빤다.
다섯째 철저하게 헹군다(합성세제의 경우 분해속도가 느려서 미량이 옷에 남아 아토피 등 피부염을 일으킬 수 있다).
여섯째 세탁 후 곧바로 널어 말린다(세균증식억제, 주름방지를 위해).
마지막으로, 삶을 수 있는 것은 틈틈이 팍팍 삶는다(살균소독은 물론 표백제의 사용량을 줄일 수 있다).


지금은 시험적으로 빨래비누와 세수비누만을 사용하고 있다. 앞으로는 점차 샴푸와 린스, 부엌용 식기세제, 목욕탕 청소용 세제까지 비누로 바꾸어 가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것들만 전부 사용하면 언제든지 지금 쓰고 있는 가루비누 한 가지로 위의 모든 세제를 대신할 수 있게 된다. 굳이 여러종류의 세제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집안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빨래 뿐만 아니라 부엌, 목욕탕 등 집안 곳곳에서 온갖 합성세제를 사용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엔 부위별, 용도별, 오염 종류별로 다양한 세제들이 시중에 나와있다. 그것들을 골라서 쓰는 것 자체만으로도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 대대적인 빨래삶기를 단행한 건 냄새제거와 표백을 위해서였다. 우리 집의 경우 다른 계절엔 보통의 세탁만으로도 괜찮은데 여름철엔 어느샌가 슬그머니 수건에 냄새가 배기 시작한다. 그래서 여름철의 수건삶기는 피할 수 없는 숙명임에도 요리조리 꾀를 부리다보니 결국 연례행사처럼 되어버렸다.

교토에 살 땐 빨래를 삶을 커다란 들통을 구하지 못해(빨래를 삶다가 넘치는 경우가 많으므로 뚜껑이 있는 큰 통이 요긴하다) 김치 담그는 커다란 스테인리스 양푼에 아기 기저귀며 수건, 속옷 등을 삶았다. 그래서 이번에 올 때는 아예 커다란 들통을 마련해 왔다.

교토 시절엔 아이가 어려서 기저귀나 아기 옷을 자주 삶아야 했다. 교토의 우리 집은 단층의 목조주택이었는데 뒷쪽으로 지붕높이 만한 곳에 빨래를 너는 테라스가 있었다. 볕이 좋은 날 그곳에 푹푹 삶아 빤 기저귀를 줄줄이, 가지런히 널어 놓으면 햇볕을 받아 유난히 하얗게 빛나 보였다. ‘일본 사람들도 이렇게 깨끗이 삶아 빨까?’하고 궁금해하며 이웃집 빨래들을 기웃거렸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와선 이웃의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싶을 만큼 흡족한 눈으로 내 빨래들을 올려다 보곤 했었다.

며칠 전에도 오랜만에 빨래를 삶아 널고나니 누군가에게 마구 자랑하고 싶어졌다. “새 옷 같지요? 팍팍 삶았거든요”라며 거만한 웃음이라도 흘리고 싶어졌다. 한편으론 나도 들통 속으로 들어가 팍팍 삶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묵은 때가 '싸악' 가시고 스무살 청춘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난 청결 이데올로기나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선 조금 비껴 있는 사람이다. 나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지 거기에 목숨을 걸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빨래를 삶아라, 빨래할 때 이런 것들을 지켜라, 환경을 생각해라 등 누군가를 스트레스 받게 만들 주문들을 늘어놓은 것 같지만, 강요할 뜻은 조금도 없다.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걸음걸이로 걸어가면 된다고 믿고 있으니까.

a 연례행사면 어떻습니까? 제 걸음걸이에 맞춘 즐거운 행사인걸요.

연례행사면 어떻습니까? 제 걸음걸이에 맞춘 즐거운 행사인걸요. ⓒ 장영미

그래도 가끔은 묵은 때, 찌든 때가 없어지고 향긋한 향기가 배도록 커다란 통에 빨래를 넣고 팍팍 삶아 보자, 그것이 연례행사면 또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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