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떠난 아들에게 쓰는 편지(5)

사랑하는 아들에게 - 영안실에서

등록 2003.09.26 16:30수정 2003.09.26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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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분을 지난 요즘 날씨는 저 여름날의 지겹던 장마와 호우, 그리고 태풍을 말끔히 씻어낸 듯 청명함 그 자체로구나. 마치 때에 찌들었던 거울을 환하게 닦아 놓은 것처럼 오래 궂었던 날씨 뒤의 맑게 갠 하늘이라서 그런지 오늘따라 더욱 청순하고 깨끗해 보이는구나. 본디 하늘이야 그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파란 색도 아니련만, 오랜 관습에 찌든 우리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하늘은 원래 그렇게 높고 파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특히 저렇게 유난히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은 흔히 우리나라의 상징이자 가을의 표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말야.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면서 잠시 그 구름을 하늘로 착각해서 사람들은 그 뒤에 의연히 자리잡고 있는 본래 하늘의 모습을 망각하기가 쉽지. 그런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표면적인 변화만 따라다니며 그걸 사물의 실상인 줄로 아는 어리석음이 나를 비롯한 무명중생들의 한계이자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 삶이란 게 저 하늘의 구름처럼 찰나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한 조각 구름과 같다고 옛 선인은 말씀하시기도 하셨지. 그 뒤에 가려진 채 버티고 있는 참다운 삶의 진리를 언제나 찾을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하구나.

아들아. 오늘은 이승에서 너와 마지막으로 같이 보냈던 시간들을 되돌아보기로 하자. 삶과 죽음을 가르는 시간과 경계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일 게다. 살아 있는 그 누구도 체험으로 인식할 수 없는 미지의 그 세계는 분명히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겠지. 누군가 우스개 소리처럼 말했지. 인간이 가장 자신 있게 알 수 있는 것 세 가지는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어디에선가 죽는다는 것, 어떤 방식으로든 죽는다는 것'이고, 반대로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 세 가지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어디에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이야.

그래서 인간들은 죽음에 대해 공포와 함께 외경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거야. 그런 생각의 연장에서 선지자들은 이런 두려움이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하나의 세계 해석의 체계를 세워 우매한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가르치려 했을 것이고, 그것이 차츰 정교하게 정리되고 다듬어져 요즘의 종교라는 형태로 정착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구나. 사실 모든 종교는 죽음과 그 뒤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니.

하지만 어떤 종교라 해도 이 세상 사람 모두에게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못한 게 우리 현실이잖니. 수많은 종교가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과 평화를 가져다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많은 수의 종교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한편으로 모든 종교의 불완전성을 입증하는 일이기도 할 것 같구나.

죽음에 대한 외경심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망자를 떠나보내는 엄숙하고 경건한 의식을 사회화하여 전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예전에는 관혼상제 중에서도 특히 상례를 가장 중요시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이 때문에 당파가 갈려 오래 싸우기도 하였지. 때로는 자기 분수에 넘치는 상례 때문에 많은 빚을 지기도 하고, 결국 가산이 파탄 나는 불행을 겪는 일도 적지 않았단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시골에선 5일장이니 7일장이니 해 가며 그 집안은 물론 온 고을 사람들이 생업을 전폐하고 초상 치르는 일에 매달렸던 일이 흔했었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소하던 장례식장이란 것이 요즘엔 거의 보편화된 것 같구나. 응급실에서 네가 옮겨간 곳은 한 대학병원의 장례식장이었단다. 넌 차디찬 금속 상자에 들어가 아무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 안치되었지. 우리 가족은 그 위의 한 방으로 안내되어 갔고, 거기 낯선 방에서 상주가 되어 주저앉아야 했단다. 급히 마련된 몇 가지의 간단한 제수를 늘어놓은 제단 위에는 네 동료들이 실험실을 뒤져 찾아낸 사진을 확대 복사하여 검은 리본으로 묶은 사진이 놓였지.

아들아. 네가 거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이냐. 네 엄마가 울다 지쳐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탈진해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동안 난 네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 외면을 해야 했단다. 내 눈에서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도저히 감당하지도 못하고 주체하지도 못하였단다. 내가 55년을 살아오면서 여러 죽음을 보아 왔고, 생가의 아버지와 어머니, 양가의 부모님, 처가의 장인 장모님, 바로 위의 형님을 내 손으로 보내드렸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이번처럼 눈물을 많이 흘려본 적은 없었단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나쁜 놈이고 불효자인 것 같구나.


우리 친가와 처가의 여러 친인척들, 네가 다녔던 학교의 관계자님들, 내가 근무하는 대학의 여러 교직원님들, 내 친구들과 선후배와 은사님들, 네 누이동생들의 친구와 직장 동료와 선후배들, 연락도 하지 못했는데도 소식을 듣고 달려와 준 네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의 친구들, 내가 평소에 관계하고 있던 몇몇 민간단체의 회원들, 그밖에도 참으로 많은 분들이 찾아오셔서 네 영혼을 위한 묵념과 절을 올리고,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을 위로해 주셨단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분들의 진심 어린 조문과 따뜻한 위로가 그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겠느냐.

찾아주신 분들은 한결같이 '할 말이 없다, 드릴 말씀이 없다, 이게 무슨 일이냐' 그런 말씀들만 하셨단다. 정말 그분들이 그 말 외에 무슨 말을 하실 수 있었겠느냐. 할 말이 없다는 말을 말로밖에 할 수 없는 이 기가 막히고 안타까운 현실 앞에 우리 인간의 언어가 참으로 무력하고 완전치 못한 존재라는 걸 이참에 새삼 실감했단다. 말 대신 그분들은 내 손을 꽉 잡아 주시기도 했지. 그 잡은 손으로 통해지던 슬픔을 나누려는 힘, 나약한 인간이기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이 내 온몸을 떨게 했고, 난 잠시 잊었던 듯 또 뜨거운 눈물을 떨어뜨려야만 했단다.

산 사람은 먹어야 한다며 내게 음식을 먹이려 애쓰는 분들도 많았지. 하지만 아무 생각 없는 짐승이 아닌 담에야 널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어찌 태연히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단 말이냐. 아무리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가 분명하다 해도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던 너를 싸늘한 영안실에 홀로 놔 둔 채 나 살자고 먹고 마시고 할 수 있단 말이냐. 난 완강하게 물리치고 물만 조금씩 마시며, 네가 유일하게 내 뜻을 거슬러 끊으시라고 했던 담배만 연달아 피웠단다. 종교와 관계없이 상갓집에 필수적으로 따라다니는 술이란 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주들의 슬픔을 달래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하니 그마저 내게는 남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지.

같이 근무하는 김 교수님의 부인께서 손수 집에서 죽을 끓여 가지고 보온병에 담아 오셨지만 그것 역시 먹을 수가 없었단다. 먹고 싶은 의지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데, 억지로 음식을 밀어 넣는 것은 과거 단식 투쟁하던 양심수들에게 유동식을 강제 급식하는 것과 무에 다르겠느냐. 난 그 당시 얼마쯤은 죽음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셈이었는데, 삶의 상징인 음식물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느냐. 물론 나의 그런 모습이 다른 분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는 행위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그런 걸 배려할 만큼의 여유가 내겐 없었지.

건너편의 접견실에는 네가 같이 공부하고 생활했던 동료들, 그리고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밤을 새워 일을 하고 있었단다. 특히 교육실습을 나가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던 4학년 학생들까지 몇 명씩 형편대로 시간과 일을 분담하여 손님을 접대하고 쓸쓸한 상가의 적막을 함께 해 주어 나로서는 고맙기가 그지없는 일이었지. 그들의 진정 어린 마음은 단순한 상부상조의 미풍양속이 아니라 속 깊고 아름다운 삶의 실천이었다고 믿고 싶구나.

내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져 밤이 깊어도 잠이 안 오고 설사 잠이 온다 해도 잘 수 없는 실정이었지.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의식이 가물거리고, 눈앞에 헛것이 떠다니는 듯한 환각에 흠칫 놀라 다시 정신 차리기를 반복하면서 간신히 네 앞에 앉아 버티다가 새벽녘쯤 체포되어 끌려가는 죄인처럼 나는 사람들에게 어디론가 붙들려 가고야 말았단다. 가서 보니 거기는 병원의 응급실이었고, 실랑이 끝에 링거 수액 주사를 맞게 되었지. 주사 바늘을 팔에 꽂고 침상에 누워 바라보는 흰색 천장에 겹겹이 어울려 떠다니는 동그라미들, 그것들은 샛노란 해바라기 꽃이었다가, 일그러진 네 얼굴이었다가, 눈을 마구 찔러대는 강렬한 해 덩어리였다가, 그렇게 어지러운 난무를 추고 있었단다.

아침이 되어 아직 다 들어가지 않은 주사액을 남긴 채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바늘을 뽑고 다시 돌아온 영안실. 넌 어제 밤 그 모습 그대로 날 내려다보고 있더구나. 도대체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널 위해 무얼 해 주어야 할지 몰라 답답한 가운데 또 사람들이 찾아오고, 의례적인 위로와 조문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단다. 나는 물론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찌 망자인 너의 소망과 마음을 다 알 수 있겠느냐. 모두 살아 있는 사람들 나름대로의 판단과 기준으로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겠지.

살아 있는 우리가 아무리 널 위해 추모를 하고 영혼의 안식을 기원해도 네가 그걸 알아듣는지, 네게 그게 전달되는지, 또 우리의 바람대로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는 건지, 그건 알 수 없는 세계의 일이겠지. 살아 있는 사람끼리의 소통도 잘 안 되는 게 다반사인데, 하물며 인간이 영령의 세계와 어찌 쉽게 통할 수 있겠느냐. 영매를 통한 교류라는 게 있다지만 그것 또한 또 다른 하나의 가상적 통로 구축에 지나지 않을 게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영안실에서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슬픔에 잠긴 가족들을 위로하고 있겠지만, 그 모두가 진정 망자만을 위한 의식이 아니라 산 사람들 자신을 달래기 위한 자위적 행위라는 생각도 드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외에 무엇이 있겠느냐. 영령을 위한 것이 됐든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이 됐든 그것은 죽음에 대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이자 동시에 최소한의 의무라고도 생각되는구나.

나는 영안실에서 2박3일간 너와 마지막으로 이승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많이 완화하고 희석시켰단다. 사랑하는 네가 간 길인데 그 길을 언제 가든 그것이 뭐가 두렵고 무섭겠느냐. 그런 점에서 넌 내게 큰 가르침을 주고 떠난 선각자인지도 모르겠다. 고맙구나, 아들아.

네가 있는 곳이 어디가 되었든, 이 세상의 저 높푸른 하늘이 인간들에게 편안함과 순결함을 자각하게 해 주는 것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안락하고 밝은 길을 열어주는 일을 많이 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편안히 쉬거라,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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