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박재동 외 9인의 <십시일反>

등록 2003.09.27 10:48수정 2003.09.27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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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책 <십시일반>

책 <십시일반> ⓒ 창작과비평사

"저마다 바쁜 만화가들이 어렵사리 한 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책을 함께 만드는 데 뜻을 모았다. 인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차별을 주제로 한 만화들을 그려보기로 했다. 만화가들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버젓이 뿌리내린, 그래서 잘 알아차릴 수도 없는 차별을 찾아 나섰다. 각자 소재를 정하여 조사를 하고 취재를 했다. (중략) 그렸다가 지우고 또 다시 그리면서, 자기 몫의 차별덩어리를 맨손으로 주물러대면서 서서히 틀을 잡아나갔다."

이 책은 10명의 각각 다른 색깔을 지닌 만화가들이 '인권 문제'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만화를 그린 것이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한자 성어가 열 숟가락이 모여 밥그릇 하나를 이룬다는 의미를 갖고 있듯이, 이 책 <십시일反> 또한 여러 목소리가 모여 인권이라는 하나의 주제 속에 어우러져 있다.


언뜻 느끼기에 만화라는 가볍고도 짧은 형식이 인권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담아내기가 어려울 듯 보인다. 하지만 의외로 이 책에서 만화의 간결한 구조와 명쾌한 언어들은 이 주제를 전달하는 데에 효과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박재동의 한 컷 짜리 만화 속에 함축된 장애인에 대한 무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순간적인 깨달음을 준다.

박재동 화백은 장애인의 집이 들어서자 우르르 몰려 나와 "딴 데 안가? 집 값 떨어져!"라고 외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짐승들로 표현한다. 인간의 기본적 본성을 상실한 그들은 짐승에 불과하다는 풍자적 내용을 담고 있는 이 한 컷 짜리 만화의 제목은 <집값>이다.

<삶의 무게>라는 한 컷 만화는 남자 밑에 여자가, 여자 밑에 여자이자 가난한 사람이, 그 밑에 여자이면서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가 받치고 서 있는 그림을 보여 준다.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인 것이다. 여자이면서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는 최저 생활마저 보장받지 못한 채 한국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의 차별적 환경을 스토리와 함께 전개한 최호철의 만화 <코리아 판타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다 저 세상으로 간 뇌성마비 장애인 운동가의 삶을 각색한 유승하의 <새봄나비>는 풍자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사실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두 작품은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들이 처한 우리나라의 불평등한 대우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이 두 만화의 경우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들이 처한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환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교육용 교재로 적합하다.


동성애자의 고통을 묘사한 장경섭의 <커밍아웃 블루스> 또한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없앨 수 있는 교육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아버지께 밝힘으로써, 갈등이 생기고 힘겨워하는 한 남성의 모습이 우울한 그림자로 비춰지고 있다.

손문상의 <지하철>과 <입영전야>는 가난한 지역과 잘 사는 지역의 지하철 시설을 비교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잘 사는 사람들의 입영 전야 풍경을 묘사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대조적 모습을 드러낸다. 가난한 산동네의 지하철 시설을 끊임없는 계단의 이어짐인데 반해, 잘사는 동네의 지하철 시설은 최신식 시설이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되어 있다.


조남준의 <누렁이1>이라는 작품 또한 어처구니없는 한국 사회의 차별적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은 평수가 다른 1, 2, 3단지에 사는 아이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 요인을 묘사했다. 같은 반이면서도 각 단지에 따라 다르게 어울려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어른들의 잘못된 사고가 아이들의 문화에까지 깊숙이 침투한 우리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1 단지 60평 이상, 2 단지 40평 이상, 3 단지 20평 이상. 우리 아파트에서는 다른 종자가 섞이는 걸 원하지 않는다."

작품의 맨 마지막에 언급된 이 한 마디 말은 이 사회에 만연한 차별주의의 실상을 보여 주는 따끔한 일침이다.

책의 마지막에 홍세화 씨가 덧붙인 <이상한 동물>이라는 제목의 마무리 글은 이러한 한국 사회에 대해 냉정한 비판을 던진다.

"사람은 이상한 동물이다. 이 세상에 자기와 아주 똑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도 끔찍스럽게 여기지만,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반기지도 않는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차이를 찾으려 애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이 않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이중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남에 비해 자기가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스스로 만족해하는 인간의 저급한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홍세화 씨가 얘기하는 것처럼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차별 대우하는 속성은 인간의 저급한 속성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저급한 편견이 사회에 팽배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 사회가 과연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든다.

오히려 저급한 사회적 편견과 불평등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언론이, 문화적 주도 세력이, 사회의 중심 구성원들이 이런 풍토를 방기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문제이다. 이 책은 그런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쓰여졌다. 간결한 형식 속에 내포하고 있는 우리의 인권 문제를 다시 한 번 바라보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박재동 외 지음,
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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