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오기를 꿈꾸며 밥 한숟갈 보태다

[서평]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없는 세상, <십시일反>

등록 2006.04.14 13:35수정 2006.04.1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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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회 약자층에 대한 차별과 편견의 현실을 비판한 한 권의 책이 있다. 그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십시일反>. 본래 열 사람이 밥을 한 숟갈씩 보태어도 한 사람이 먹을 밥이 된다는 고사성어가 이 책에서는 인권과 평등을 향한, 작고 미약하지만 힘차고 당당한 목소리로 한데 어우러진다. 그것은 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에 당당히 맞서겠다(反)는 의도이기도 하다.

박재동, 손문상, 유승하, 이우일, 이희재, 장경섭, 조남준, 최호철, 홍승우, 홍윤표. 이름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작품이 떠오르는 화백들의 주옥같은 작품 46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 컷으로 이루어진 작품부터 4컷, 단편까지 그 형식과 구성 또한 다양하다. 뿐만 아니라 작가 특유의 개성적인 화풍이 잘 드러난 작품을 두루두루 보는 것은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해준다.

a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꼬집은 박재동 화백의 <삶의 무게>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꼬집은 박재동 화백의 <삶의 무게> ⓒ 창작과 비평사

a 비정규직의 비인간적인 현실 풍자한 손문상 화백의 <비정규직>

비정규직의 비인간적인 현실 풍자한 손문상 화백의 <비정규직> ⓒ 창작과 비형사

a 외국인 노동자의 고달픈 현실 풍자한 홍윤표 화백의 <산타할아버지와의 대화>

외국인 노동자의 고달픈 현실 풍자한 홍윤표 화백의 <산타할아버지와의 대화> ⓒ 창작과 비평사

이 책을 보고 있으면 평소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적 편견과 억압과 차별이 이토록 많은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발생하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에 새삼 놀라게 된다.


a <십시일反> 겉그림. 달라보이지만 결국은 같은 두 손이 서로 맞잡은 표지그림이 인상적이다

<십시일反> 겉그림. 달라보이지만 결국은 같은 두 손이 서로 맞잡은 표지그림이 인상적이다 ⓒ 창작과 비평사

'사람은 이상한 동물이다. 이 세상에 자기와 아주 똑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도 끔직스럽게 여기지만,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반기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인간의 이중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남에 비해 자기가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스스로 만족해하는 인간의 저급한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이런 속성은 필연적으로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는다.' (홍세화씨가 쓴 작품후기 중)

장애우, 동성애자, 외국인노동자, 가난한 농민이 겪는 비인간적 현실은 말할 것도 없고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학생들, 집단 따돌림으로 죽을 만큼 괴로워하는 학생들, 가부장적 제도에 희생당하는 어머니들, 가사와 업무를 병행해야하는 고달픈 직장여성들 그리고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돈의 노예로 살아가는 현대인들 모두가 사회적 모순과 억압이 만들어낸 피해자인 것이다.

이희재 화백이 그리고 장정란 작가가 쓴 '첫발자국'은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한 여학생이 학교에서 겪게 되는 일상을 통해 장애우들의 고통과 아픔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을 쉬이 잊어버린다. 지금 무섭고 불편한 것은 절뚝거리는 나날이다. 눈뜨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는 세상의 온갖 장애물과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나에게 하루하루는 장애물 경주이다' ('첫발자국' 중)

유승하 화백의 '새봄 나비'는 오로지 장애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도 아이를 낳다가 얻은 후천적 장애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하고 기초생활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아들과 떨어져 쓸쓸히 살아가다 홀로 죽음을 맞이한 이야기다. 어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반신반의하겠지만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최호철 화백의 '코리아 판타지'는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을 가장 여실히,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돈을 벌기위해 한국으로 간 삼촌을 찾는 '사라'가 몽골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현재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현실과 비인간적인 대우, 잔인하고 서글픈 현실을 적나라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이래도 되는 건가? 필요할 때는 많이 들여와 놓곤, 불경기라고 쫓아내고 팔팔한 젊은이들 실컷 부려먹다가 다치거나 쓸모없어지면 내버리는 꼴이야.'('코리아 판타지' 중)


a '화장실 사용은 소리없는 전쟁이다...' 이희재 화백의 <첫발자국>

'화장실 사용은 소리없는 전쟁이다...' 이희재 화백의 <첫발자국> ⓒ 창작과 비평사

a '가난하고 장애가 있다고 엄마 노릇을 못할 줄 아시나요...' 장애인의 현실 다룬 유승하 화백의 <새봄 나비>

'가난하고 장애가 있다고 엄마 노릇을 못할 줄 아시나요...' 장애인의 현실 다룬 유승하 화백의 <새봄 나비> ⓒ 창작과 비평사

a 외국인 노동자들의 차별과 억압을 적나라하게 그린 최호철 화백의 <코리아 판타지>

외국인 노동자들의 차별과 억압을 적나라하게 그린 최호철 화백의 <코리아 판타지> ⓒ 창작과 비평사

그런가하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풍경들을 소재로 재미있게 풍자한 작품들도 있다. <비빔툰>으로 유명한 홍승우 화백의 작품은 집안에서 겪게 되는 남녀차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장경섭 화백의 '커밍아웃 블루스'에서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하려는 주인공의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심리를 잘 포착하고 있다.

a 동성애의 편견을 다룬 장경섭 화백의 <커밍아웃 블루스>

동성애의 편견을 다룬 장경섭 화백의 <커밍아웃 블루스> ⓒ 창작과 비평사

a 출산급여와 휴가가 제대로 보장되는 '희망'을 그린 홍승우 화백의 <유토피아>

출산급여와 휴가가 제대로 보장되는 '희망'을 그린 홍승우 화백의 <유토피아> ⓒ 창작과 비평사

홍윤표 화백의 '동화시리즈'는 동화나 이야기 속에 감춰진 모순 된 가치관을 살짝 비틀어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일테면 조선의 명필, 한석봉에게는 그의 후광에 가려진 뛰어난 여동생이 있었다는 '석봉이네 집'이나 말을 할 수 없게 된 인어공주에게 왕자는 수화를 배우자고 권유하여 '진정한'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 '인어공주' 또는 왕자를 기다리며 숲 속에서 잠이 든 미녀가 아닌, '내 인생 내가 산다'고 선언(?)한 뒤 홀로 당당히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같은 작품들을 읽다보면 웃음보가 터지면서 가슴 한 구석이 시원하고 통쾌하다.

때론 열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침묵이 더 값질 때가 있다. 인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이 책은 인권이나 평등에 대해 설명해놓은 그 어느 책 못지않게 '참으로 사람답게 사는 법'을 말없는 웅변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인권'이 강 건너 불구경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책을 보고난 후 그것이 바로 내 가족, 내 이웃들의 당면문제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십시일反>/ 박재동 외 그림,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창작과비평사/ 9000원/2003

박재동 한겨레신문 시사만평 <한겨레 그림판>, <정치야 맛좀 볼텨>
손문상 한국일보 <강다리> 동아일보 <동아희평> 등
유승하 한겨레신문 <북카툰> <별주부전> 그림책 <아가야 울지마> 등
이우일 <도날드 닭> <아빠와 나> <김영하, 이우일의 영화이야기> 등
이희재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약동이> <만화삼국지> 등
장경섭 인터넷 만화동호지 <화끈> 동인. <장모씨 이야기> 등
조남준 한겨레문화센터 만화전문반 강사역임. 한겨레21 <시사SF> 등
최호철 <자전거 나들이> <식모천 여배우 실종사건> 등
홍승우 한겨레신문 <비빔툰> 한겨레리빙 <정보통 사람들> 등
홍윤표 인터넷 만화잡지 <화끈> 연재. <천하무적 홍대리> 등

덧붙이는 글 <십시일反>/ 박재동 외 그림,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창작과비평사/ 9000원/2003

박재동 한겨레신문 시사만평 <한겨레 그림판>, <정치야 맛좀 볼텨>
손문상 한국일보 <강다리> 동아일보 <동아희평> 등
유승하 한겨레신문 <북카툰> <별주부전> 그림책 <아가야 울지마> 등
이우일 <도날드 닭> <아빠와 나> <김영하, 이우일의 영화이야기> 등
이희재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약동이> <만화삼국지> 등
장경섭 인터넷 만화동호지 <화끈> 동인. <장모씨 이야기> 등
조남준 한겨레문화센터 만화전문반 강사역임. 한겨레21 <시사SF> 등
최호철 <자전거 나들이> <식모천 여배우 실종사건> 등
홍승우 한겨레신문 <비빔툰> 한겨레리빙 <정보통 사람들> 등
홍윤표 인터넷 만화잡지 <화끈> 연재. <천하무적 홍대리> 등

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박재동 외 지음,
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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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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