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없는 세상 꿈꾸는 만화책

[살가운 만화 즐기기 9] <십시일反>이라는 책

등록 2004.05.04 13:00수정 2004.05.0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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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겉그림입니다.

겉그림입니다. ⓒ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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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시일반>이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열 사람이 한 가지 그림감을 나누어 맡아서 열 가지 빛깔로 담아낸 만화책입니다. 보통 여러 사람이 일감을 나누어 맡아서 만화를 그리면 한 가지 큰 그림감으로 모이기 어렵습니다.


그리는 사람 모두 개성이 있기에 자칫하면 어수선한 책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만화책 <십시일반>은 자칫하면 어긋나기 쉬운 이야기 흐름을 물 흐르듯 잘 엮어나갔고, 만화를 그린 분들도 차분하게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펼쳤습니다.

<십시일반>을 수놓은 그림쟁이 열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만화로 우리들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분들입니다.

신문 만평으로(박재동, 손문상), 애틋한 보통사람 집안살림이나 살아가는 이야기로(홍승우,장경섭), 때론 엉뚱하다 싶지만 톡톡 튀는 생각으로 짜릿함을 주는 이야기로(이우일), 일하는 사람들이 헤쳐나가는 힘차기도 하고 고달프기도 한 모습을 보이는 이야기로(최호철, 홍윤표), 정수리를 찌르는 듯 날카로운 시사 이야기로(조남준), 부드러운 그림결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보듬는 살가운 이야기로(이희재, 유승하) 즐거움을 주는 그림쟁이 열 사람입니다.

<2>

어쩌면 서로서로 가장 피와 살로 느낀 `차별' 이야기를 그렸다고도 하겠어요. 첫끈을 연 박재동씨는 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학교 아이들이 느끼는 `차별'과 안타까움을 담았습니다. 이희재씨는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이를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자기 동무들이 이해하고 헤아리고 `함께 크고 자라는 이웃'으로 느끼며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유승하씨는 장애를 지닌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 장애를 지닌 이들에게 나라에서 대주는 사회보장이 얼마나 턱없는지, 그래서 노점이라도 하려는데, 나라에서 대주는 사회보장 돈 몇푼(그나마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받는 사람이 일을 하면 사회보장 몇푼조차 줄 수 없다는 차가운 현실을 눈물겹게 그립니다.

실화였을까요? 우리는 지난 겨울에 세상을 떠난 어느 장애인 여성 이야기를 잊지 못합니다. 물론 잊은 분들도 많겠지요. 그 분을 비롯한 많은 장애인들은 자기 한몸만 그냥 살자면 사실 나라에서 주는 그 얼마 안 되는 돈만 받아도 먹을 것 줄이고, 옷은 헌옷 얻어다 입고, 잠도 대충 쪽방 하나 얻어서 자면 그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 장애를 지닌 사람들도 `사회에서 하고픈 일'이 있으며 `혼인해서 살 자유와 권리'가 있으며 `아이를 낳아서 기를 권리와 꿈'이 있어요.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나라에서 주는 사회보장비만으로는 못 삽니다. 그래서 노점이라도 하는 건데, 그렇게 노점을 해서 겨우 아이 학비를 대려 하면 학비도 대주지 않으며 그나마 주던 사회보장비조차 안 준다고 하지요.

유승하씨는 <새봄나비>라는 만화를 그리며 "새봄을 맞이해서 자유롭게 세상을 훨훨 날아가는 나비"처럼 이 땅에서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어머님들에게 꿈을 주고, 나랏님에게는 장애 여성을 보아달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이우일씨는 <아빠와 나>라는 만화에서 `남자답게', 또 `나이 많은 사람(부모) 말을 꼬박꼬박 잘 듣는 순동이'로 커야 제대로 된 사람이 된다며 허구헌날 얻어맞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그런데 <아빠와 나>를 가만히 보면 거짓말, 그러니까 꾸민 이야기 같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집안에서 늘 겪고 보는 이야기이고,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a 유승하 님이 그린 만화

유승하 님이 그린 만화 ⓒ 창작과비평사

<3>

장경섭씨는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삶을 다룹니다. 손문상씨는 <돈과 권력>은 `돈과 권력'대로 대물림하고 `가난과 푸대접'은 `가난과 푸대접'대로 대물림하는 `이상야릇한' 우리 사회 모습을 짤막한 만평으로 보입니다.

홍윤표씨는 <미운 오리새끼>를 그리며 또래 집단이 벌이는 따돌림을 그리고 조남준씨는 <누렁이> 그림을 그리며 정성들여 키운 개를 무지막지하게 때려서 잡아먹는 아버지 이야기를, 그리고 개를 때려잡듯 어머니를 날이면 날마다 때리며 괴롭히는 아버지 이야기를, 그리고 자기는 `딸'로 태어났지만 `아들'이 태어나길 바라며 자기를 `남장'으로 꾸미며 키우는 아버지 이야기를 담습니다. `남장으로 자라던 나'는 드디어 `해방'을 맞이 한다죠. 더는 맞고 살 수 없다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뒤로 하고 집을 떠나거든요. 그때 `나'도 이제 더는 자기 성(여성)을 숨기며 살지 않아도 되는 기쁨과 자유를 함께 맛보지요.

홍승우씨는 혼인해서 살아가는 부부로서 자기 모습과 아내 모습을 만화로 담았습니다. 여성이 자기 꿈을 안고 살아가기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지, 아이를 키우는 일을 남성들이 얼마나 모르고 이해도 안 하며 나 몰라라 하는지, 그러는 가운데 어머니라는 여성으로서 아이들에게, 어린 딸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픈지, 그리고 어린 아들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픈지 시금털털하게 담습니다. 슬픈 자기 모습을 돌아보며, 그 슬픈 모습을 먼 앞날에 또다른 아버지 어머니가 될 아들딸들은 고쳐나가길 바라면서요.

만화책 <십시일반>은 최호철씨가 그린 <코리아 판타지>로 끝을 맺습니다. 대한민국 땅에서 `코리안 드림(대한민국 꿈)'을 안고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 이야기를 담습니다. `아메리카 드림'을 품고 외국돈을 벌어와서 가난한 조국에서 잘살아 보겠다고 했던 지난 우리들 모습을 잊고,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땅에서 한국돈을 벌어서 가난한 자신들의 조국에서 잘살아 보고픈 조촐한 꿈을 안은 이들이 겪는 아픔과 슬픔과 억울함을 담습니다.

"배울 게 많다"고 말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공장에서 가장 먼저 들어야 할 말들은 `욕'. 하지만 도대체 무어라 말하는지를 몰라요. 공장 간부도 외국인 노동자가 알아듣지 못하는 걸 알기에 엄청난 욕과 모욕스러운 말을 쏟아붓고요.

<4>

<십시일반>에 나오는 사람들, 주인공은 이 땅에서 `따돌림받은 사람'들입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교육받고 통제받아야 하는 사람'들이기도 해요. 스스로 옳고 그름을 헤아려서 살아가는 주체성 있는, 줏대 있는 사람으로 크지 못하게 가로막힌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십시일반>의 주인공들은 이 땅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이기도 해요. 틀에 맞춰지고, 틀에 따라 움직이도록 억눌리는 우리들 모두라고 하겠습니다.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모두 골고루 나누어 가지면서 즐겁게 살아갈 날을 꿈꾸는 우리들이라고도 하겠고요. 네게 없으나 내게 있다면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이웃사촌이기도 하며 서로 없다면 없는 대로, 서로 있다면 있는 대로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한 식구이기도 합니다.

`차별'이란 말을 낱말책에서 찾아보면 그다지 `나쁜 뜻'이 담겨 있지 않아요.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함"이 `차별'이랍니다. `구별', `나누어 가르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사실 나쁜 일은 아닙니다. 문제라면 `나누어 가른' 뒤에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들, 그러니까 `모자라다'고 하는 사람들은 마치 실패한 사람, 낙오자, 못난이, 게으름뱅이, 거지, 걸레, 악당, 쓰레기처럼 바라보고 업신여기는 모습들이 문제입니다.

시험을 치러서 점수를 매기고 등수를 매길 수 있어요. 그래서 1등과 꼴등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1등과 꼴등은 종이 한 장 다름입니다. `다름'이에요. `다름'이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나쁘고가 아닌 만큼, `차별' 또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있음을 헤아리는 대목에서 그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했고, 지금도 그리 살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그래요. 앞으로가 문제겠지요? 지금까지는 제대로 된 삶, 서로 따스히 감싸고 사랑으로 보듬는 삶을 살아오지 못했더라도 앞으로는 잘살아야지요. 앞으로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서로 서로 돕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고받으며 살아야겠고, 외국인 노동자든 한국인 노동자든 똑같은 권리와 의무로 일하는 즐거움과 보람을 얻어야겠어요. 공부 잘하는 아이만 좋은 대접을 받고, 공부 못하는 아이는 `꿈을 꿀 자유'마저 빼앗아 버리는 교육 현실도 뜯어 고쳐야겠어요. 딸아들, 여성남성으로 나누는 성 차별도 허물어야겠고요.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서로 서로 즐겁게 보듬고 돌볼 수 있으면, 즐거울 때는 즐거울 때대로, 슬플 때는 슬플 때대로 벗이 있고 동지가 있고 든든한 벗바리가 있어서 좋습니다. 함께 살아갈 삶이며, 함께 즐겁게 살아갈 삶입니다. 만화책 <십시일반>은 바로 우리들이 `함께 살아갈 삶'을 꿈꾸는 나눔이요 함께함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대목도 있어요. 책이름을 '십시일반(十匙一飯)'이란 한문에서 '반(飯, 밥)'이라는 말을 '반(反, 뒤집기)'으로 살짝 고쳐서 지은 대목이 아쉽습니다. '십시일반'이란 한자말을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런 한자말을 모르는 이에게는 책이름이 엉뚱하게 다가올 수 있고, 또다른 '차별'을 낳을 수 있습니다. 책이름에서도 적게 배우거나 못 배운 사람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좀더 제대로 되고 아름다운 우리네 이야기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지식 차별 이야기도 <십시일반>이라는 만화책에서 새롭게 담아내어야 좀더 알찰 수 있지 않나 싶군요.

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박재동 외 지음,
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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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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