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가 산만한 사람이, 그게 그렇게 좋아?"

'호박 도사'의 호박 '예찬론'

등록 2003.09.29 10:19수정 2003.09.29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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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마루에 걸터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애호박을 썰었습니다. 썰고 또 썰었습니다. 자그만치 여섯 개나 썰었습니다. 애호박을 썰고 있다는 것은 벌써 365일 사계절, 1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났다는 것입니다. 매년 이맘 때면 어김없이 애호박을 썰어 말려 왔으니까요.


얇게 썬 애호박을 대소쿠리, 플라스틱 소쿠리 할 것 없이 집안에 있는 온갖 소쿠리를 총동원하여 볕 잘 드는 뜰판에 줄줄이 펼쳐놓고 햇살 좋은 돌 담장 위에도 널어 놓았습니다. 예전에 우리 부모님들 세대가 그랬듯이 요즘 같이 볕 좋은 가을에 애호박을 썰어 잘 말려 놓으면 겨울철뿐만 아니라 일년 내내 훌륭한 먹을거리가 됩니다.

호박 꼬지를 말려 요리할 때까지의 과정은 만만치 않습니다. 손이 아주 많이 갑니다. 햇볕 잘 들다가 하루 이틀 비라도 내리면 금새 호박 꼬지가 눅눅해져 곰팡이가 생기고 물러 터져 버리기 일쑤입니다. 다 말렸다하여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보관을 잘못하면 또다시 곰팡이가 생기고 자칫하면 썩어 버리게 됩니다.

아내는 망치를 들고 집안 여기저기를 부수고 옮기고, 설치하며 새롭게 집 단장하는 걸 좋아 하지만 저는 퍼질러 앉아 호박 써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호박 꼬지 소쿠리를 볕 잘 드는 곳으로 옮겨다니고 또 햇볕에 노출되어 마른 부위와 덜 마른 부위를 일일이 뒤집어 놓는 일을 재미있어 합니다.

"에이그, 덩치는 산만한 사람이, 그게 그렇게 좋아?"
"그~럼 얼마나 좋은데, 씨뿌리고, 수확하고 또 내가 썰어말려 요리해서 먹는 유일한 음식 중에 하나인데….”


아내야 말로 작은 체구에 맞지 않게 망치를 들고 설쳐대면서, 오히려 저를 낯간지럽다는 듯이 쳐다보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애호박을 썰고 있을 때만큼은 이러저러한 잡념이 끼어 들지 않아 참 좋습니다.


올해는 여름 내내 비가 내려 누렇게 잘 익은 늙은 호박을 기대하기란 애초에 어렵게 됐습니다. 늙은 호박은 고사하고 애호박조차 크기도 전에 모두 떨어져 버렸고 애호박 과정을 지나 젊은 호박으로 가는 놈들도 도중에 빗물에 뭉그러져 버렸습니다. 늙은 호박이 두어 개 메달려 있었지만 그마저 속이 모두 썩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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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그런데 날이 개이기 시작하면서 줄기와 잎만 왕성하던 호박에 꽃이 피고 한 일주일 사이에 주먹만한 애호박들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하루에 두어 개씩 따고 있을 정도입니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늙은 호박은 끝입니다. 앞으로 보름쯤은 애호박을 실컷 따서 말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자칭 '호박 도사'입니다. 농촌에 살고 있다고 하면 흔히들 제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농사는 지으십니까?"
"농사요? 농사 짓는다고 말하기는 좀 거시기 하구요. 그냥 뭐 손바닥만한 밭에다가 옥수수나 고구마 같은 것과 김장 배추, 이것 저것 간단한 반찬거릴 재배합니다. 그래두 호박 농사하나 만큼은 도삽니다."


호박 하나 만큼은 똑 소리나게 잘 지어왔습니다. 느릿느릿 해찰을 하다가 뒷북 친 덕을 보기도 합니다. 장마비가 너무 일찍 찾아와 남들 호박꽃 다 떨어져 버릴 때 우리 집 돌담장에서는 호박 줄기들이 왕성하게 뻗어 가곤 했습니다. 또 어떤 해는 뒷북칠까 싶어 일찌감치 심은 덕에 남들은 꽃도 못 피울 때 장마철에도 주먹 만한 애호박을 따먹기도 합니다.

도시에서 생활 할 때는 버스를 한참 기다리다가 잠깐 비운 사이에 횡 하니 버스가 지나치기 일쑤였고, 특히 서울에 가서 전철 타면 꼭 한번씩 덜떨어진 놈처럼 노선을 거꾸로 바꿔 타곤 했는데 시골에서 생활하고부터는 그 반대였습니다. 호박 농사처럼 엎어지나 자빠지나 별 탈 없이 만사가 술술 잘 풀려 나가는 것 같습니다.

"인효 아빠는 호박 농사 하나 만큼은 잘혀.”

옆집 할머니 조차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그 인정이라는 게 좀 그렇긴 합니다. 사실 호박농사가 어디 농사 축에나 낍니까? 농사 지어 생활하는 분들에겐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지요. ‘호박농사 잘혀’에는 분명 ‘그것도 농사라고…’라는 비꼼이 뒤섞여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상관 없었습니다. 저는 그 말이 싫지는 않습니다. '호박 농사조차도 더럽게 못짓네’라는 소리 듣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어쨌든 소 뒷걸음질 하다가 쥐잡는 겪으로 요행수가 따르곤 했지만 호박농사 하나 만큼은 잘 지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똥 바가지와 호박 도사

그리고 또 제 나름대로 할 말이 많습니다. 그동안 호박 키우기 위해 남들 잘 하지 않는 일을 해왔으니까요. 똥 바가지 덕에 나름대로의 대가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장마비를 피해 다니며 똥바가지를 들고 설쳐댄 덕에 애호박이며 늙은 호박 실컷 따먹고 또 이 사람 저 사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실컷 인심도 쓸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똥 바가지 사용하는 농가는 거의 없습니다. 보통 비료를 사용합니다. 호박 구덩이에 비료 한 웅큼씩만 뿌려 줘도 호박은 쑥쑥 잘 자랍니다. 하지만 비료보다는 적당히 건조된 똥물 먹은 호박은 못 당하는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분석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제 경험으로 보아선 비료는 똥물에 비해 뒷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a 새끼 손가락만한 새우를 넣고 볶은 애호박 요리

새끼 손가락만한 새우를 넣고 볶은 애호박 요리 ⓒ 송성영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렇습니다. 그 동안 장마비를 피해 다니며 호박 도사가 된 것은 따지고 보면 다 우연히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는 똥이라는 게 뭡니까? 먹고 소화시킨 찌꺼기입니다. 버리는 쓰레기의 일종입니다. 그러니 밭에 똥을 주면 순전히 재활용하는 것입니다.

똥 구덩이를 만드는 일은 자연을 통해 얻어먹은 것을 다시 되돌려주는 ‘경건한 행위’ 입니다. 화학 비료는 택도 없습니다. 똥은 땅을 거름지게 합니다만 화학 비료는 오히려 땅의 기운을 빼앗아 갑니다. 땅을 죽입니다. 땅이 죽어 가면 곧바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적어도 호박농사 만큼은 순전히 하늘이 도우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과대망상, 정신나간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할 수 없습니다.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면 그 만큼 하늘이 도와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한 가지의 순리를 따르면 한 가지를 줄 것이고 열 가지를 따르게 되면 열 가지를 줄 것이라 믿습니다.

제가 자칭 호박 도사라고 말하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전 호박요리를 좋아합니다. 호박에 어떤 비타민이 들어있고 또 몸 어딘가에 좋다고들 하지만 저는 그걸 잘 알지도 못합니다. 다만 호박으로 온갖 맛난 요리를 해먹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줄기가 풍성하게 뻗어나가면 된장 찌개를 뻑뻑하게 끓여 여린 잎을 따다가 쌈을 싸먹고 호박이 다 늙으면 푹 삶아 죽을 먹고, 믹서기에 갈아서 호박전을, 또 사과 껍질 벗기듯 길게길게 잘라 줄에 척척 내걸어 말렸다가 호박떡을 만들어 먹는 것도 좋습니다.

특히 애호박으로 만든 요리는 우리 식구들이 즐겨 먹는 반찬 중에 하나입니다. 적당히 썰어 된장찌개에 넣고, 채 썰어 그냥 볶아 먹거나 멸치 국물로 만든 잔치국수에 넣어먹고 새끼손가락 만한 말린 새우를 넣고 볶아 먹어도 그 맛이 끝내줍니다. 또 비가 부슬부슬 내릴 때면 애호박을 잘게 썰어 호박전도 부쳐먹습니다

이것 외에도 더 많은 애호박 요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최고의 요리는 역시 말린 호박을 넣고 만든 돼지고기 두루치기랍니다. 저는 이 요리를 돼지고기 요리 중에서 최고로 손꼽고 있습니다. 일명 ‘호박 꼬지 돼지고기 두루치기’ 요리의 도사랍니다.

물에 적당히 부풀린 말린 애호박, 거기에 돼지고기를 썰어 넣고 고추장에 마늘, 약간의 된장 등 기본적인 양념을 넣어 후라이팬에 달달 볶게 되면 그야말로 최고의 ‘돼지고기 두루치기’가 됩니다. 적어도 제게 있어 돼지고기로 요리한 것 중에서 최고로 맛있는 음식입니다. 그리고 제일 잘하는 요리이기도 합니다.

a 나는 돼지고기에 말린 호박꼬지를 넣고 달달 볶은 요리를 최고로 칩니다.

나는 돼지고기에 말린 호박꼬지를 넣고 달달 볶은 요리를 최고로 칩니다. ⓒ 송성영

오늘 작년 가을에 말려놓은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호박 꼬지로 돼지고기 두루치기 요리를 해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말하자면 ‘호박꼬지 돼지고기 두루치기’는 호박 향이 밴 돼지고기는 물론이고 호박꼬지 맛도 기가 막힙니다. 오히려 고기보다는 호박 꼬지가 더 맛있습니다.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전수 받은 것인데 아내에게는 이미 인정을 받았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도 가끔씩 찬사를 받는 요리랍니다.

서리 내리는 그 순간까지 마루에 쪼그려 앉아 예년에도 그랬듯이 마지막 남은 애호박을 썰어 댈 것입니다. 호박을 썰어대는 순간 만큼은 별 생각이 들지 않아 좋습니다. 그저 호박만을 생각합니다.

호박을 먹고 거기서 나온 것으로 똥 구덩이를 만들고 호박씨를 심고, 싹이 돋고, 줄기와 호박꽃, 날아드는 벌들과 열매를 생각합니다. 다음해 이맘 때에도 기분 좋게 애호박을 썰어 가을 볕에 말릴 것입니다. 따사로운 볕에 바싹 말라 가는 호박 꼬지를 흡족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우리 식구가 맛있게 먹고 사람들에게도 기분 좋게 나눠 줄 것입니다.

그리고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랬듯이 아내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세월 참 빨리도 지나간다. 불과 얼마 전에 호박을 썰어 말렸던 것 같은데, 벌써 일년이 다 가고 있네….”

돌보지 않아도 없는 듯 풍성하게 잘 자라는 호박, 호박이 좋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공간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지어먹을 수 있는 흔하디 흔한 호박이지만 잎에서 열매, 나중에는 아궁이 불쏘시개에 이르기까지 다 내줍니다. 가난하지만 콩 한 쪽도 나눠 먹을 줄 아는 사람들, 슬픔이 느껴질 정도로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들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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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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