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옥천서 여전히 1위라고?

[현지취재] '안티조선 성지'의 조선일보 부수를 추적하다 (1)

등록 2003.09.29 22:03수정 2003.10.0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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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또다시 '소송전쟁'의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이번에는 원로언론인 정경희 선생이 조선일보의 표적(?)이 됐고, 김효재 조선일보 판매국장이 저격수(?)로 나설 모양이다. 조선일보는 정경희 선생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선언'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법적 고소'라는 방아쇠를 당겨버리겠다는 태세다.

어느 언론사에도 소속돼 있지 않은 한 독립적 저널리스트가 자신이 쓴 칼럼 때문에 거대 언론사의 고위 간부로부터 "법적 조치" 운운의 경고편지를 받은, 이 희대적 사건의 전모와 진실을 추적했다. 앞으로 두세 차례에 걸쳐 소개할 이 글은 <시민의신문> 9월 29일자에 실린 기사를 확대, 보강한 것임을 밝혀둔다.... 필자 주


a 김효재 조선일보 판매국장이 정경희씨한테 보낸 서한.

김효재 조선일보 판매국장이 정경희씨한테 보낸 서한.


"정경희 선생은 40년 넘도록 한국 정치와 언론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해 오셨습니다. 평생 지켜온 올곧은 기자정신이 아버님의 뜻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작년 말 원로언론인 정경희(72) 선생이 '송건호 언론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송건호 선생의 장남인 송준용 청암재단 이사가 했던 헌사다. 실제로 정 선생은 고희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현장에서 왕성하게 뛰고 있는 언론인 중 독보적 존재로 평가받는다.

현직 기자들의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언론인'의 반열에까지 올랐던 그가 최근 아주 낭패스러운 일을 당했다. 자신이 쓴 칼럼을 겨냥해, 기자 사회에선 한참 후배 뻘이 되는 한 거대 언론사 간부가 "법적 조치" 운운하는 경고 편지를 보낸 것이다. 지난 8월 27일의 일이었다.

그 날 정경희 선생은 <미디어오늘>에 고정칼럼 '곧은 소리'를 실었다. 칼럼 제목은 '옥천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지난 8월 14·15일 이틀 동안 언론개혁의 성지 옥천을 직접 다녀온 뒤에 현지에서 보고들은 것을 근거로 작성한 글이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전체 칼럼 내용 중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옥천 방문 관련 부분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칼럼의 앞부분에는 "일방적으로 수구·기득권 집단을 편들고, 편파언론을 일삼는 조중동 등 과점신문의 횡포가 이 나라를 멍들게 하고 있다"는 요지의 내용이 기술돼 있었다).


필자는 지난 14·15일 '안티조선'의 고장 충북 옥천에 다녀왔다. 제1회 옥천언론문화제 주최측 초청으로 '안티조선'의 현장을 내 눈으로 볼 생각이었다. '안티조선'을 지지하건 반대하건 옥천을 보지 않고 오늘의 한국언론을 이해하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필자는 생각해왔다.

다만 '제3자의 입장'을 견지하자는 뜻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주최측 요청도 끝내 사양했다. 인구 6만의 조용한 소도시 옥천읍은 기득권이 지배하는 망망대해 속에 떠있는 작은 섬과도 같았다. 37년 기득권 집단, 그리고 그들과 유착돼 있는 거대 신문들에 포위된 하나의 점(點)이었다. 그러나 옥천이 과연 대한민국 땅인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예 딴판의 세계였다.


언론문화제가 열려 사람들이 북적대는 이틀 동안 공설운동장 옆의 관성회관과 야외공연장 입구에서는 푸른 얼룩무늬 유니폼을 입은 해병전우회 회원들이 '안티조선'을 위해 현장정리를 하고, 경찰관들이 교통정리를 하는 도시.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언론개혁'을 말하고, '언론개혁'을 붓으로 쓴 깃발들이 줄져 서있는 행사장.

그동안 단편적인 사건보도를 통해 알고 있었던 옥천은 처음 보는 별천지였다. 그 옥천에는 '안티조선' 운동에 전념하고 있는 오한흥씨가 있었다. 올해 45세의 그가 '안티조선'에 나선 것은 3년 전인 2000년 8월. 그는 "친일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운동에 나섰다고 했다.

그 결과 이제 옥천에서의 조선일보 판매부수는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져 "수지타산 맞추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옥천의 '안티조선'은 이 나라 최초이자, 성공한 언론소비자운동이다. 거대신문이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옥천은 하나의 실험실이자, 조용한 혁명의 현장이다.

그러나 언론과 연구자들은 그에 걸맞는 관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안티조선'은 개인적인 지지·반대를 떠나 하나의 놀랄만한 '사건'이다. 충북 내륙 인구 6만의 소도시에서 일어난 이 '미디어 혁명'은 세상을 지배하는 언론매체의 힘과 그 한계를 아울러 생각게 하는 놀라운 이변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정경희 선생은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것은 조선일보 김효재(52) 판매국장이 8월 29일 작성해 보낸, A4 용지 석 장 분량의 편지였다. 조선일보 국제부장과 문화부장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진 김 국장이 편지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옥천에서 조선일보 판매부수가 4분의 1로 떨어져 수지타산 맞추기 어려워졌다고 말씀하신 근거를 그 기사를 기고하신 매체에 제시해 주시든지 아니면 그 자리에 그 사실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또 사과도 없다면, 저와 조선일보의 명예를 위해 취할 수 있는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리게 된 점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요약을 하면, "정경희 선생은 근거를 제시하거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라. 그렇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었다. 단순하고 명쾌한, 그리고 확신에 찬 어법의 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김효재 판매국장은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공세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가 편지에서 제시한 근거를 직접 들어보자.

"옥천에서의 조선일보는 일부 세력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이 판매부수를 지켜 그 지역 판매부수 1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경쟁지 지국장에게 물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독자들도 금방 눈치를 챘겠지만, 김 국장이 내세운 근거라는 것이 '객관적 증거'가 아니라 '주관적 주장'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제3자가 객관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는 것으로는 "경쟁지 지국장에게 물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는 대목이 유일했다.

그래서 기자는 정확한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서 옥천으로 달려가기로 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 하지 않았던가.

현직 기자가 '가장 존경하는 언론인'
정경희는 누구인가

▲ 원로 언론인 정경희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김효재 조선일보 판매국장으로부터 '법적 조치' 운운의 경고편지를 전달받은 정경희 선생은 1932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58년 한국일보에 입사한 그는 편집부와 외신부 기자를 거쳐 외신부장, 문화부장, 부국장 겸 주간한국 부장, 논설위원, 편집위원을 역임한 뒤 10년 전인 1993년 정년 퇴임했다.

미디어오늘이 2003년 신년호를 맞아 한길리서치연구소와 함께 전국 기자 30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송건호, 리영희, 김중배 선생에 이어 '가장 존경하는 언론인' 4위에 올랐던 그는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한국 고대사 연구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 '재야사학자'로 불리기도 했던 '전문기자'의 선구자이다.

현재 언론비평 전문지 미디어오늘에 고정칼럼 '곧은 소리'를 연재하고 있는 정경희 선생은 지난 2002년 6월에는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를 비판하는 칼럼을 한겨레에 발표했다가 한나라당으로부터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하는 시련을 겪었으나 재판부로부터 기각 결정을 받았다.

고희를 넘긴 최근까지도 한 번도 펜을 놓은 적이 없다는, 천상 기자인 정경희 선생은 아직도 매일 3시간30분 이상을 할애해서 신문을 정독하고 있다. 1992년에는 제3회 위암 언론상을, 2002년에는 제1회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했다.

추적 1 : 주민증언을 청취하라!

"옥천에서 조선일보의 운명은 이미 끝났다."

지난 9월 5일 옥천에서 만난 대다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다. 실제로 옥천에서 조선일보 판매부수 감소는 더 이상 새로운 소식이 아니었다. 한나라당 옥천지구당 부위원장과 해병전우회 옥천지회장까지 안티조선 독립군에 가입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사실 지난 3년 동안 기자는 옥천을 방문할 때마다 조선일보 판매부수 감소와 관련해 수많은 증언을 들었다. 그 중에서 여론주도층에 해당하는 인사들의 반응을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몇 년 전 언론사 세무조사 때 심규철 의원이 '처첩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는데, 주민들 반응이 상당히 안 좋았다. 그래서 내가 심 의원에게 '왜 지역 정서와 상반된 발언을 하느냐. 앞으로는 표나 떨어뜨릴 그런 발언은 절대 하지 말라'고 직언을 드렸다. 그랬더니 심 의원이 옥천신문과의 인터뷰에선 '조선일보 바로보기 운동을 지지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조선일보는 친일행각을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처럼 옥천에서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됐다." (유정현 한나라당 영동·보은·옥천지구당 부위원장)

"매월 한번 정기적으로 민족중흥회 회의를 여는데, 그때마다 조선일보 구독자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있다. 그런데 회원 중에서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옥천에선 반민족신문으로서 조선일보 전력이 정확하게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일부러 구독하려는 사람이 없다. 워낙 지역이 좁기 때문에 조선일보를 보는지 안 보는지도 금방 알 수 있다." (금효길 옥천군의회 의원·민족중흥회 옥천지회장)

"친구의 권유로 '조선일보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에 가입했다. 우리 해병전우회는 지용제 등 지역행사가 열리면 교통정리도 하고 인명구조 작업도 벌인다. 우리가 하는 봉사활동과 '조선일보바로보기운동' 같은 사회운동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가입했다. 앞으로 '귀신 잡는 해병대'의 기개를 살려 옥천에 남아 있는 조선일보 잔당을 토벌하는 데 앞장설 생각이다." (권영건 해병전우회 옥천지회장)

"조선일보가 많이 줄기는 준 것 같다. 전에는 한 집 건너 조선일보를 보다시피 했는데, 요즘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며칠 전에 아디다스 옥천지점 사장을 만났는데, 거기도 조선일보를 끊었다고 하더라. 그는 같이 보던 스포츠조선까지 끊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옥천지국에서 한국경제도 같이 돌리고 있는데, 요즘 한국경제가 잘 안 보이는 것을 보니 한국경제에까지 그 여파가 미치는 모양이다." (박두용 입시학원 집현전 원장)


한편 이 과정에서 조선일보 판매부수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 2002년 8월경 옥천 현지에서 기자는 유정현(52) 한나라당 부위원장을 만난 적이 있다. "수 십년 동안 사무실과 가정에서 봐오던 조선일보 두 부를 최근에 끊었다"고 자랑스럽게 밝힌 그는 당시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나눴다.

- 현재 옥천에서 조선일보 부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그것은 내가 정확히 안다. 370부에서 430부 정도가 배포되고 있다. 1200부에서 1500부 정도가 배포되던 이전에 비해서 약 3분의 1에서 4분의 1규모로 준 것으로 알고 있다."

-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아는가.
"지구당 위원장인 심규철 의원이 주민들을 상대로 무료 법률상담을 하고 있다. 언젠가 조선일보 옥천지국이 전정표씨와 오한흥씨를 검찰에 고발하기 위해 우리 지구당에 와서 법률상담을 했었는데, 그때 그 사람들이 밝힌 것이다. 당시 부수가 그 정도였으니 아마 현재는 부수가 더 줄었을 것이다. 조선일보 부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얘기는 다른 곳을 통해서도 많이 들었다."


우리는 여기서 조선일보 판매부수가 4분의 1 규모로 줄었다는 증언의 최초의 진원지가 다름 아닌 한나라당 부위원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추적 2 : 사건조서(事件調書)를 찾아라!

앞에서 한나라당 부위원장이 증언한 것처럼, 조선일보 옥천지국은 2001년 3월 조선일보 절독운동을 전개하던 2명의 옥천 주민을 검찰에 고발한 적이 있다(당시 검찰은 "조선일보 절독운동은 소비자운동의 일환이었다. 불량식품인줄도 모르고 돈주고 사먹는 이웃에게 그 폐해를 알리고 먹지 말라고 권유한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이냐"는 피고소인들의 반론을 인정해 '혐의 없음' 판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 고발사건의 사건조서에 조선일보 판매부수와 관련된 구체적 수치가 나와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지난 9월 5일 오후 청주지검 영동지청을 방문해 사건조서 공개와 열람을 요청했다. 검찰 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건조서를 열람하며 사건일지를 정리해봤다.

우선 최영배 조선일보 옥천지국장이 전정표 당시 '조선일보바로보기옥천시민모임' 대표와 오한흥 당시 옥천신문 편집국장을 업무방해 혐의로 옥천경찰서에 고소한 것은 2001년 3월 8일이었다. 3월 15일 옥천경찰서는 고소인 최영배 지국장을 소환해 진술조서를 작성했으며, 4월 13일 이 사건을 청주지검 영동지청으로 송치했다.

그리고 5월 18일 영동지청 이정호 검사와 정인호 검찰주사보는 고소인 최영배씨와 피고소인 전정표·오한흥씨를 불러 대질신문을 벌였다. 다음은 대질신문 과정에서 검찰과 고소인이 나눈 일문일답 중 한 대목이다.

- 진술인은 피의자들의 활동으로 구독량이 매월 300부 정도 감소되었다고 하였는데 금액으로 환산하면 피해 정도가 어느 정도나 되는가요.
"300만원 정도입니다. 그러나 현재도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으니 앞으로 피해 금액은 더 커질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매월 300부 정도 감소'라는 대목이다. 더욱이 최영배 조선일보 지국장은 "현재도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3월 8일 작성해 경찰에 제출한 고소장에서도 "피고소인들의 조선일보 구독반대 운동 때문에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다"라고 절박하게 호소한 바 있다.

그것은 결국 조선일보 옥천지국이 안티조선의 영향으로 경영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즉 상식적으로 수지타산 맞추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을 '자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신문판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매달도 말고 한 달만 300부가 감소해도 수지타산 맞추기는커녕 지국경영 자체가 어렵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조선일보 옥천지국장이 검찰에서 했던 답변은 착각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피해 정도를 강조하려다 실제보다 부풀려서 과장한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사건조서에는 "위 조서를 진술자에게 열람하게 하였던 바 진술한대로 오기가 증감 변경한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므로 간인(間印)한 후 서명(署名) 무인(拇印)케 하다"라는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효재 조선일보 판매국장이 주장했던 "일부 세력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이 판매부수를 지켜"라는 말은 조선일보 옥천지국장의 증언에 의해 명백하게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진술임이 확인된 셈이다.

한편 김효재 판매국장은 정경희 선생에게 발송한 경고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조선일보가 여전히 옥천에서 판매부수 1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경쟁지 지국장에게 물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자는 김효재 국장의 권유대로 옥천에서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등 3개 경쟁지 지국장을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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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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