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당' 사죄, 후보위원은 아니다
법에 따라 상응하는 처벌 받겠다"

[현장중계] 송두율 교수 '입장 표명' 기자회견

등록 2003.10.02 13:59수정 2003.10.0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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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린 송두율 교수의 기자회견은 정현백(성균관대 사회학) 교수의 사회로 송두율 교수의 아내 정정희씨, 아들 준·린씨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2일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린 송두율 교수의 기자회견은 정현백(성균관대 사회학) 교수의 사회로 송두율 교수의 아내 정정희씨, 아들 준·린씨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오마이뉴스 권우성

<제2신 대체: 2일 오후 3시 50분>

"'양심적 학자'에서 '거물간첩'으로 추락... 심각히 자성"


2일 오후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자성적 성찰'이라는 주제로 기자회견을 통해 심경을 밝히고 있는 송두율 교수.
2일 오후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자성적 성찰'이라는 주제로 기자회견을 통해 심경을 밝히고 있는 송두율 교수.오마이뉴스 권우성
오후 2시경 송두율 교수가 기자회견문 낭독을 시작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송 교수는 '그간의 활동에 대한 자성적 성찰'이라는 입장문을 통해 "37년만에 입국한 무한한 기쁨은 한 순간이고 '양심적 학자'에서 '거물간첩'으로 추락한데 대해 심각히 자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송 교수는 "국정원에서 발표한 내용 가운데 일부 왜곡된 것이 있다"며 총 7가지 항목에 대해 해명했다.

첫째, 1973년 여름 첫 방북은 학문적 관심에서 이뤄졌다.

둘째, 노동당원으로 의식, 활동한 바 없다. 입북 당시 받은 주체사상 교육과 노동당 입북은 당시로선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이었다.


세째, '노동당 정치국원 김철수'로 요구받은 적도, 동의한 적도 없다. 지난 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장례 참가 요청을 받고 입북했을 때 행사장 명패에도 '송두율'이었다. 나는 북에서 포섭대상이었다.

네째, 15만불의 공작금을 받았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92~93년경 받은 7만불은 독일의 한국학 연구원 운영자금으로 받았고, 그외 항공비 등으로 받은 2~3만불 등 모두 7~8만불이 전부다.


다섯째, 북에 충성서약문을 썼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경축일에 남으로 치면 축전과 같은 것을 보냈을 뿐이다.

여섯째, 오길남씨와의 대질신문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그의 재입북을 강요, 협박한 적이 없다. 이 내용은 녹취가 있으니 보면 안다. 나는 그동안 단 1명도 입북을 권유한 적이 없다.

일곱째, 1995년 이후 북경에서 개최된 남북 통일포럼 행사가 북의 공작으로 성사됐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당시 행사는 선경, 대우 등 남한 기업이 경비후원을 했고, 당시 한겨레, 동아, 중앙 등이 이미 보도했다.

관련
기사
- 송교수 기자회견문 전문

이어진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송 교수는 이후 행보와 관련, "고국 강단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으며, 사과 부분에 대해서는 "뭘 사과해야 할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송 교수는 또 "37년만에 귀국했는데 추방당한다면 그건 상상하기 힘들다"며 "법에 따라 상응하는 처벌을 받겠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을 마친 오후 3시께 숙소로 돌아가 30분 정도 휴식을 취한 송 교수는 식사를 하기 위해 아카데미하우스 1층 로비로 나왔다. 이 때 기자들이 송 교수 주변으로 몰려들어 '기자회견을 마친 심경이 어떠느냐'는 질문을 했지만 송 교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승용차에 올라탔다.

차에 앉은 송 교수는 기자들에게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는 말만 남기고 가족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다음은 송 교수와 기자들간의 일문일답 전문이다.

- 그 동안 해명의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지금에서야 김철수라는 사실을 시인한 이유는 뭔가. 또 지난 9월 29일(월요일) 김형태 변호사는 북측에서 초청할 당시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초청돼 있으니 꼭 오라는 요청을 북으로부터 받았다고 했는데, 기자회견문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북측으로부터 공식적인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어느 것이 사실인가.

(송두율 교수)"여기(기자회견문)에 들어있는 답변은 실은 국정원에서 나흘에 걸쳐 이미 한 발언들이다. 그런데 그 당시는 조사중이었기 때문에 그때 그때마다 일일이 흘러나오는 이야기였고, 또 일일이 반응할 수 없었다. 오늘은 종합적으로 대답하려고 나섰다.

(김형태 변호사)"오늘 발표문에서도 들어갈 때 김철수란 이름으로 초청돼 있다는 얘기가 없었다는 얘기는 안 했다. 당시 초청받아 갈 때 김철수란 이름으로 초청돼 있었다. 기자회견문에는 이 얘기가 실수로 빠졌는데, (김철수란 이름으로 초청받았다는 것을)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 돈 부분에 대해 자세히 말해 달라. 지금 계산해보면 (북으로부터 받은 돈이)얼추 합산하면 최대 15만불이 나온다. 이는 15만불을 받았지만 공작금이 아니라는 것인가. 또 18차례 방북 일정 동안 김철수라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등재돼 있다는 것을 사후에 인지했다고 했는데, 명백하게 '나는 남북간의 경계인으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라며 명쾌하게 거부한 적이 있나.

(송두율 교수)"15만불이라는 계산이 어떻게 나왔는지 잘 모르겠다. 일단 나도 계산한 것은 아까 말한 액수다. 여행을 하면서 항공비 등 여비가 1000불 정도, 그걸 다 합산해도 기껏해야 2만불 정도다. 또 92년부터 94년 사이에 7, 8만불 받은 것을 다 합치면 10만불 정도다. 그 액수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문젠데,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그렇게 인지했는데, 어떻게 거부반응을 안 했나하는 것 아니냐. (남북의 학술교류 역할을 맡아) 그 동안 상당히 많은 갈등이 있었다. 학회를 치르는데 쉽게 안 됐다. 엄청난 노력과 갈등이 있었다. 저는 남쪽의 부탁 때문에 어떻게든 성사시켜보려고 했지만, 원하는 대로 안 됐다.

정치국 후보위원이면 학술회의 하나 성사 못 시킬까. 도대체 그러한 직책이 사실로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 계속 됐고, 실제 자료를 보면 갈등 상황이 많이 드러난다.

(북한에 있을 때)아무런 비판 없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당 간부들이 양담배를 피는 것 같은데, 인민들이 안 필 때 당 간부들이 양담배를 피우면 되겠느냐 등의 비판을 했다. 그 체제를 100% 지지하고 아무런 거리를 취하지 않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 여러 경로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나는 남북 경계인으로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개인이다. 거대한 국가체제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쉽지 않았고, 그 내면 갈등이 얼마나 컸던 것인지가 (여러 정황을 통해) 드러났다."

(사회자)"학술지원비 6, 7만불과 여비를 합치면 7, 8만불 정도가 맞다. 어떻게 15만불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송 교수가 (북한의 김철수 호칭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는 점은 기자회견문에 이미 나와 있다."

기자회견 도중 목이 마른 송두율 교수가  물을 마시고 있다.
기자회견 도중 목이 마른 송두율 교수가 물을 마시고 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 한국행을 감행했을 때 한국 국민들의 반응은 걱정 안 했나.

(송두율 교수)"독일을 떠날 때 가족들과 함께 37년만에 조국 땅을 밟는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내가 진정한 의미에서 남북 화해를 위해 일하려면 한쪽에만 치우친, 균형감각이 깨진 사람으로 보여서는 안 되겠다는 욕구가 있었다.

실제 40년 가까이 외국에 살고 있는데, 남쪽이 어떨까 하는 것은 머리로는 생각이 되는데 피부로는 잘 안 와 닿는다. 가령 서울이 교통지옥이라고 하는데, 이번에 직접 와서 보고야 알았다.

결국 (들어올 때) 우리 민족 사이에서 민족이 서로 상생하고, 화해하고, 우리 민족을 서로 살게 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체포영장이 발부됐다는 점을 알았지만 고국행을 택했다.

또 나에 대해 앞뒤가 모순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는 국정원에서 한창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전부가 공개되지 않고, 일부씩만 드러난 편린들 때문에 내가 앞 뒤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황석영씨 인터뷰 기사에서 송 교수가 한국에 남고 싶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후 계획은.

(송두율 교수)"제가 40년 가까이 외국 생활을 하고 37년만에 조국 땅을 밟았다. 대학 강단에서 가르치는 일이 내 직업이다. 처음 들어올 때 여기서 후학을 가르치는 등 여러 가지 구상도 있었다. 지금 상황이 그렇지 못해서 못하고 있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구체적으로 여기서 어떻게 젊은이들, 대학에서 가르치나 하는 방법을 생각해보려 한다. 원래 그런 계획 있었지만 처음부터 (조사를 받았기 때문에)전혀 (실천을) 못했다."

- 송 교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사실은 황장엽 전 비서가 망명한 뒤 밝히면서 알려졌다. 그러나 송 교수는 그 문제를 제기한 황장엽씨에게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나. 또 본인이 해명할 부분은 해명하고, 사죄할 부분은 사죄하겠다고 했는데 어떤 부분을 사죄할 것인지. 김철수란 가명과 노동당 입당 사실에 대한 말 바꾸기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송두율 교수)"98년 10월부터 2001년 10월까지 계속 소송사건이 진행됐는데 기본적으로 양측간에 왔다갔다한 부분들이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저의 기본입장은 실질적 의미에서 정치국원임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북한의 핵심인물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소송을 한 것이다.

두 번째로, 무엇을 사죄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 문제는 해당 기관에서 법적인 결론이 나올 것이다. 가령, 내가 제일 상상하기 싫은 상황은 추방되는 것이다. 내가 37년만에 고국 땅을 밟았는데, 추방당하기 위해서 이 땅을 밟았는가. 추방은 가장 상상하기 싫은 상황이다.

차라리 법에 의해서 처벌받겠다. 37년만에 조국 땅을 찾아, 이 땅의 한 부분이 되려고 하는데, 추방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다."

- 비판적 정치학자로서, 남북한의 경계인으로 살겠다고 했는데 노동당에 가입한 것은 북한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또 송두율 교수가 교수라고 하는데, 2003년 강의계획서를 뮌스터대학에 확인해 본 결과 '강사'라고 돼 있는 것 같다. 어떤 강의를 했고, 또 언제부터 언제까지 강의를 했는지.

(송두율 교수)"경계인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보면 중간에 있다는 것이지만, 본래 그 의미가 호주 원주민과 백인들 사이에 정보 전해주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내가 이번에 남쪽을 찾게 된 이유는 스스로가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왔겠나. 경계인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덕목, 남쪽 땅을 모르고서는 경계인이 안 된다는 기본적인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37년만에 분단된 조국의 남쪽을 찾았다. 한국적 언어로 이를 설명하려면 안 된다.

강의는, 두 개를 맡았다. 하나는 '반미주의 현상, 원인 그리고 전망'에 대해서다. 독일에서는 9·11 이후 가장 뜨거운 주제이다. (강의록을 보면) 아틀란틱(대서양)을 넘나드는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유럽의 지성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반미'냐는 것을 트집잡아 나를 그런 수준으로 보지 말아 달라.

다른 하나의 강의는 '복지사회의 미래'라는 강의다. 독일사회가 현재 그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

나는 한번도 같은 제목으로 두 번 강의한 적이 없다. 학자로서 내 역할 다 하고 있다. 내가 학자로서 독일에서 어떤 역할 하는지는 뮌스터 대학에 가서 물어보면 잘 알 수 있다. 독일 학제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모르면 입을 닫아라."

기자회견을 마친 송두율 교수가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다.
기자회견을 마친 송두율 교수가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제1신 : 2일 낮 1시 50분>

송 교수, 착잡한 표정으로 기자회견 준비
오후 2시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밝혀진 재독철학자 송두율(뮌스터대) 교수는 2일 오후 2시께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 조사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오후 1시50분 현재 송 교수는 아카데미하우스 4층에 마련된 숙소에 가족들과 함께 모여 있다. 가족들은 포도주와 간단한 빵 몇 조각을 앞에 두고 송 교수를 위로하고 있다.

아카데미하우스 1층 로비에는 송 교수의 기자회견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기자와 카메라기자들이 몰려 있다. 기자회견을 앞둔 송 교수는 매우 착잡한 표정이다.

송 교수는 오늘 시내관광이 예정돼 있었으나 기자회견 때문에 일정을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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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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