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노인의 날이었다. 신문이며 방송에서는 노인 관련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노령화 사회와 노년의 삶을 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큰길가에는 아직도 현수막이 그대로 펄럭이고 있다. 무료 점심 대접에 경로잔치, 어르신들의 체육대회에, 장기 자랑 무대까지 여기저기서 잔치가 벌어졌다.
문득 '노인의 날이 어린이날처럼 달력에 빨간 글씨로 써있으면 어떻게 될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다음 날이 개천절이니까 단풍놀이 가느라 매년 고속도로는 막히겠고, 그 날이 그 날 같은 어르신들만 덩그마니 남으실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씁쓸해진다.
노인의 날에 서울 양재동 꽃시장 옆에 있는 에이티(aT) 센터에서 막을 올린 실버박람회장에서 마주친 어르신들은, 느릿느릿 다니면서 구경을 하시거나 체험용으로 놓여 있는 건강 침대에 지긋이 눈을 감고 누워 그 효과를 몸소 느껴 보고 계셨다.
유료요양원을 소개하는 부스에 들어서실 때는 궁금증과 호기심에 눈을 빛내시다가도, 그 입소 비용에 이르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발길을 돌리시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박람회 첫 날이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한산한 모습이었는데도, 건강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무료 혈당 체크와 건강 상담 코너는 줄을 서야 할 정도여서 아주 대조적이었다.
노인의 날, 혼자 이리 저리 실버박람회장을 둘러보며 이 시대 노년의 삶은 과연 어디에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일은 노인복지 관련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이미 막을 내린 연극 속의 어르신들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사람살이가 신기하리 만치 되풀이되기 때문일까….
연극〈서산에 해 지면은 달 떠온단다〉는 1930년대 마포나루 새우젓 장수와 그 아들의 이야기를 큰 기둥으로 하고 있다. 늙은 아버지 성진과 다 자란 아들 석이. 아버지 친구인 덕출과 딸 영순. 아내 없이 아들과 딸을 길러낸 두 아버지의 우정은 아주 각별하다.
딸에게 세상 떠난 엄마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는 덕출과 달리 성진은 석이가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른다. 석이는 공부도 하고 싶고, 이 곳을 떠나 저 멀리 어딘가로 가고 싶다. 아버지가 무서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석이의 어머니인 술래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주 오래 전 집에 불이 나자 성진은 둘째인 석이를 안고 뛰쳐나왔지만, 아내 술래는 그만 큰아들이 아닌 보따리를 안고 나온 것. 그 후 계속된 갈등으로 어느 날 술래가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 보따리 안에는 남편 성진이 애지중지하던 동학운동 조상들의 기록과 독립군에게 보낼 군자금이 들어있었던 것. 아이보다 남편의 그 보따리를 더 귀히 여겼던 아내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무섭게 내쳤던 남편.
예순의 나이에 돌아보는 아버지의 그 세월은 그렇게 아플 수가 없다. 아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지도 못하는 그 마음은 너무도 멍이 들어 이제 어떻게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모른다. 어머니가 그립고 아버지가 싫은 석이 가슴 역시 막힐 대로 막혀 갑갑하기만 하다.
자칫 무거워지기 쉬운 연극은 성진과 덕출의 이웃인 점룡 아저씨, 명길, 봉팔, 판술, 재봉과 주막집 여인네들의 입담과 넉살에 묻혀,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눈물로 그리 급하지 않게 보는 사람들을 촉촉하게 적셔간다.
길고 긴 후회 끝에 성진은 아내 술래를 찾아 나서려 마음먹지만, 인생이 어디 그리 단순하던가. 그 때까지 살아있으리라 굳게 믿었는데 결국 술래의 죽음이 밝혀지고 만다. 오래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는 성진 옆에는 술래를 딸처럼 길러준 주막집 할머니가 그저 말없이 앉아 계신다. 마루 밑에 벗어 놓은 성진의 미투리를 집어 나중에 신기 좋게 코를 앞으로 돌려 놓아줄 뿐이다.
아버지 성진을 모시고 둘 사이에 낳은 아기를 업고, 석이와 영순이가 어머니 술래의 무덤을 찾는다. '내가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하며 후회하던 아버지는 이제 하얗게 늙어 정신마저 온전치 못하시다. 미안해하며 가슴 아파하는 성진에게 혼령이 된 술래가 기대앉아 '괜찮아요' 답한다.
살아 생전 소리내어 말하지 못했던 술래. 살아서 소통하지 못했던 부부는 이제 이승과 저승으로 나뉘어 비로소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다. 서로의 마음을 완벽하게 읽는다. '서산에 해가 지네요…달이 뜨겠네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아버지와 아들도 이제 가슴으로 서로를 받아들였으리라. 그간의 모든 사정을 일일이 말로 설명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완벽하게 이해했으리라. 서산에 해가 지고 나면 달이 뜨는 것을 우리 서로 알고 있듯이 말이다.
노인의 날이 아니어도 신문과 방송은 쉬지 않고 노인 문제를 다룰 것이다. 때로는 그렇고 그런 자료를 인용해 상식적인 수준으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눈에 띄는 기획물을 통해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하겠고 우리들 노년의 삶을 아름답게 꿈꾸도록 만들기도 할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어르신들은 여전히 갈 곳 몰라 서성이며 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내실 것이다. 우리들의 눈이 떠오르는 해를 향해 있을 때 그 분들은 해지는 서산으로 눈을 돌리실 것이다. 해가 지고 말면 그 뿐인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달이 뜨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청년의 때가 선물이듯이 노년의 때 역시 선물로 받은 것. 선물이 아니라면 노년이 되기 전에 이미 삶은 끝났을 것이므로. 떠오르는 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는 해가 있어야 달도 뜨고 다시 해도 뜬다는 것을 우리 잊고 사는 것은 아닐지.
아내에게 미안해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늙은 남편을 보며 나는 울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는 사람 곁에서 말없이 신발 코를 앞으로 돌려놓아 주는 주막집 할머니의 손길에서 노년의 섬세한 결을 느꼈다. 그 따뜻한 마음의 결이 있어 노년이 참으로 아름답다.
(서산에 해 지면은 달 떠온단다 / 최창근 작, 김순영 연출, 출연 오현경, 이승호, 서학, 유순철, 김도형 등 / 9. 20 ∼ 9. 28 /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대극장)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