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바다가 되는 냇물을 보다

마지막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등록 2003.10.04 14:33수정 2003.10.04 14:4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강정천

강정천 ⓒ 김민수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바다에 이르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땅에 내리고 또다시 낮은 곳으로의 여행을 합니다.


'도랑물이 흘러 냇물을 이루고 냇물이 흘러 강을 이루고 강물이 흘러 바다를 이룬다'는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자연의 순환에 대한 것은 가설이 아니라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그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습니다. 강정천의 발원지는 한라산 이름 모를 산새들의 작은 옹달샘이거나 아침이슬이 한 방울 두 방울 청명한 소리를 내며 똑똑 떨어지는 그 곳일지, 아니면 너무도 고요하게 솟아오른 샘물일 수도 있겠죠.

모여진 작은 물들은 가장 낮은 계곡으로 하나 둘 모여들었을 것이고, 계곡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더 큰 물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모이고 모여 바다와 만나는 그 기점에 서서 강정천의 맑은 물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 저기가 바로 민물의 끝이고, 바로 저기부터가 바닷물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냇물이 바다가 되는 순간 끝인 줄 알았는데 새로운 시작입니다.


천천히 강정천에 내려가 두 손으로 물을 바쳐 먹어보았습니다. 맑고 차가운 샘물과도 같은 맛입니다. 조금 더 내려가 강정천과 만나고 있는 바닷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빨아봅니다. 쓰디쓴 소금의 맛이 혀 끝에 전해져 옵니다.

'아, 바다가 이렇게 시작되는구나!'


그래요.
자연은 그렇게 돌고 돕니다.
자신의 모습을 상실한 듯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또 다른 자연에 담아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삶, 그걸 우리는 자연스럽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요?

인간도 자연의 일부입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부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존재 중에 하나입니다. 결과로 자신만 부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던 수많은 자연에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자연 중에서 유일하게 쓰레기를 만드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하니 반자연적이라고 평가를 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 합니다.

a 동복의 일몰

동복의 일몰 ⓒ 김민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조천읍과 구좌읍의 경계선에 위치해 있는 구좌읍 동복리에서 잠시 멈추어 섰습니다.

조천(潮天)은 '아침하늘'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 때문인지 지는 석양이 또 다른 아침의 하늘을 만들기 위해 물들어 가는 듯 합니다.
곽재구 시인은 <포구기행>이라는 글에서 조천에 대해서 '하늘의 아침'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 또한 아름다운 해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랫동안 이곳 바닷가를 그리워했습니다. 이름 때문이었지요. 아침(潮)과 하늘(天), 처음 이 이름을 들었을 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알 수 없는 어떤 그리움이 가슴 한쪽에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이름을 '아침 하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아침'이라 생각했지요.'(곽재구의 포구기행 p.229.)

동복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모습, 그것은 저에게는 '아침하늘'로 다가왔습니다.

제주의 동쪽은 다른 지역에 비해 남다른 고난의 삶의 흔적들이 스며있는 곳입니다. 제주를 동서남북으로 나눈다면 북쪽에 비해 문화적인 면에서 소외되어 있기도 하고, 남쪽에 비해서는 토양이 그다지 좋질 않아 주로 밭농사에 의지하고 있고, 더군다나 서쪽에 비해서 바다도 덜 풍부해서 여러 면에서 척박한 땅이 바로 동쪽입니다.

그러다 보니 억척같이 살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살아도 늘 그 지긋지긋한 가난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운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어떤 절망같은 것들이 동쪽 마을에는 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아침하늘'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동복(東福)'이라는 마을 이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늘 복(福)과는 거리가 먼 삶과 같은 현실을 떨쳐버리고 싶은 소망을 담은 이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행복이란 무엇을 가졌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발견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닌지요?

일몰을 끝으로 보면 한없이 처량하고 슬퍼지지만 또 다른 시작으로 보면 참으로 웅장하고 아름답습니다. 그 모두 바라보는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투영되는 것이죠.

동복에서의 일몰.
저는 그것을 '아침하늘'을 위한 시작이라고 봅니다.
그 아침하늘이 내일 또 새로운 아침을 열어올 것입니다.

a

ⓒ 김민수

이제 나무도 서서히 겨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겨울은 고난의 계절입니다. 그 겨울을 나무는 어떻게 준비하는지 아십니까? 먼저 입고 있던 옷(나뭇잎)을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몸 속에 있는 물들을 최소한의 것만 남겨두고 배출을 합니다. 왜냐구요? 그렇지 않으면 추운 겨울 얼어죽을 수도 있거든요. 우리 사람들은 고난의 때가 온다면 더욱 더 움켜쥐기 마련인데 나무의 고난을 준비하는 모습은 다릅니다.

법정 스님은 <텅빈충만>이라는 글에서 소유의 삶이 아닌 존재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내 귀는 대숲을 스쳐오는 바람소리 속에서, 맑게 흐르는 산골의 시냇물에서, 혹은 우짖는 새소리에서, 비발디나 바하의 가락보다 더 그윽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득 찼을 때보다도 더 충만한 것이다.'(법정 수상집 텅빈충만 pp. 73-74)

비움으로 인해서 채워지는 것, 버림으로 인해 풍성해 지는 것 역시 자연의 순리입니다. 마지막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이 가을에 돌아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5. 5 6개 읍면 관통 345kV 송전선로, 근데 주민들은 모른다 6개 읍면 관통 345kV 송전선로, 근데 주민들은 모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