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

잘못된 고정관념이 주는 편견들

등록 2003.10.01 00:20수정 2003.10.0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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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달팽이'는 느릿느릿의 대명사다.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에 보는 이가 답답할 정도로 굼뜬 걸음걸이로 자기의 길을 간다. 그래서 '빨리빨리'를 외치며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조금 천천히 살아갈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거나 말할 때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살아라' 조언을 하기도 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인간의 한 걸음과 달팽이의 한 걸음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그러나 달팽이는 혹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느리다고? 나는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는데 숨가쁘게 가고 있는데 느리다고 해?'

농어촌에서 생활하다 보니 달팽이류를 많이 보게 된다. 그런데 내가 본 바로는 달팽이는 결코 느리지도 않으며 굼뜨지도 않다.

습기가 많은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어디에 숨었다가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지만 햇살이 비추면 어디론가 꽁꽁 숨어버리는데 그들의 걸음걸이를 본 적이 없다.

밭 한 두렁을 다 매기 전에 이미 커다란 호박잎을 넘어 다른 호박잎에 가 있고, 어느새 이파리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으니 어쩌면 느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적당한 속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달팽이의 더듬이(촉수)를 본 적이 있는 분들 중에서 달팽이류에 대한 혐오감이 없는 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더듬이를 만져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순식간에 몸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더듬이, 위협을 느끼면 자신이 지고 다니던 껍질 속에 온 몸을 담고는 수풀 속으로 '툭!'떨어져 버리는 신속함을 보면 결코 달팽이는 느리지 않다. 거기다 자신들의 식성에 맞는 이파리를 만나면 먹어치우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모른다.

우리가 보는 눈으로, 우리의 속도로 바라볼 때 상대적으로 느린 것이지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생존하기에 큰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속도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습기가 부족하거나 햇살이 징하게 내리쬐는 날에는 이파리 아랫부분이나 그늘에 몸을 숨기고 착 달라붙어 있는데 적당한 습기가 제공되지 않거나 비가 오지 않으면 제 스스로 붙어있던 그 곳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 하나의 약점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껍질 안에 웅크리고 있다가도 습한 기운만 퍼지면 어김없이 속살을 드러낸다는 것이 또 하나의 약점이다.

달팽이, 그는 결코 느리지 않다.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데 그 이상이 속도가 필요치 않을 뿐이다.
그렇다고 달팽이를 보면서 '조금 천천히 살자'며 자신의 삶을 추스르는 일이 의미없는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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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못 생긴 꽃의 대명사는 역시 '호박꽃'이다. 그 많은 꽃 중에서 '호박꽃'이라고 하면 기분 좋아할 여성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말 호박꽃은 못생긴 것일까?
태풍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침에 텃밭에 나가면 가장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겨주던 꽃이 바로 호박꽃이었다. 저렇게 예쁜 꽃이 왜 못생긴 꽃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햇살이 비추면 이내 시들어버리는 특성때문이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른 새벽에 활짝 피어있는 호박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게으름뱅이가 회자한 이야기가 보편화되었을까? 그것도 아닐텐데 왜 호박꽃의 아름다움은 사장되고 못생긴 꽃의 대명사처럼 이미지화 된 것일까?

내가 만난 호박꽃은 항상 예뻤다. 꽃만 예쁜 것이 아니라 꽃이 지고 난 후의 애호박도 예뻤고, 노랗게 늙은 호박도 예뻤다. 숭숭 썰어 멍석에 말리던 애호박도 예뻤고, 떡에 넣기 위해 빨래줄에 길게 말리는 노란 호박도 예쁘고, 앙증맞게 생긴 호박씨의 모양새도 예뻤다.

어디 그 뿐인가? 하얀 솜털을 송송이 달고 있는 꽃몽우리는 얼마나 예쁜지, 동그랗게 말려있는 호박줄기는 오선지에 그려진 화음표 같아 예뻤다.

어떤 사물이 주는 이미지는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의심 없이 오랜 시간 동안 그러한 이미지로 사용되다보면 객관적인 사실여부를 떠나서 '느린 것' 또는 '못생긴 것'하면 대입이 된다.

그런데 이 정도의 이미지화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질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념의 문제나 사람들이 하는 일(직업)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이미지화되면 객관적인 사실여부를 떠나서 그 본질이 왜곡된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그것이 깊어져 편견이 되어버리면 일면의 모습 외에는 볼 수가 없다.
다른 측면들이 있는데 그 가능성들은 아예 배제시켜 버림으로서 스스로의 눈을 닫아버리면 늘 이미지화된 그 모습 외에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없다.

장님은 앞을 보지 못해서 장님이 아니라 다른 한 쪽을 보지 않음으로 장님이요, 벙어리는 말을 하지 못해서 벙어리가 아니라 옳은 것을 옳다, 그릇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해서 벙어리가 아닌가 싶다.

우리에게는 이미지화된 고정관념들이 있다. 이러한 고정관념들을 반전시켜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한 일일 것 같다.

달팽이가 느리기만 한 것이 아니다.
호박이 못생기기만 한 것이 아니다.
빠른 면도 있고, 예쁜 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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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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