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책상'에 앉아보실래요?

<더러운 책상> 순결한 '예인(藝人)'을 꿈꾸는 작가 박범신과의 조우

등록 2003.10.09 22:35수정 2003.10.1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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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쉰여섯 살의 소설가가 자신이 겪었던 뼈아픈 시대를 거슬러 오르는 기나긴 길을 순례하기 시작한다.

한 번의 쓰라린 실연을 경험하고서 찾은 전주역 대합실. 그곳에서 집어던진 오십 원짜리 동전의 지시에 따라 녹슨 함석 대문을 힘차게 열어 제쳤던 시절과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미 분리되어 버린 자아로부터의 전언을 그대로 옮겨놓은 ‘후일담’소설이 바로 <더러운 책상>이다.


열여섯 살에서 열아홉 살까지 미련하게 눙쳐놓았던 ‘책상’을 마련하는 과정은 위태롭기 그지없어 보인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에다 두었던 책상은 두서없이 읽었던 온갖 문학작품들을 가지런하게 정리해놓은 ‘경계’이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보다 사십 여년이나 더 늦게 오고 있는 열일곱의 그보다 그 점에 있어선 더 나은 것이 없다. 사랑이란 목숨의 부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깊어서 사랑에의 그리움은 때때로 우주보다 절망적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어떤 소리로 오는지 알고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그동안 차마 밝힐 수 없었던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실존적 광기’를 고백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삶의 열정을 담보하는 근원이 되는 ‘젊음’은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가장 사랑스럽고 빛나는 유년시절을 ‘부러진 가위’로 도려내듯이 수년전 통학기차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다.

더럽혀진 제 가면의 책상 아래 용인의 집필실에 가져다 놓은 깨끗한 책상을 분리해 놓은 것은 계속해서 작가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책망한다.

“내 책상......은, 그것 자체가 수많은 영혼이다. 무당이 되지 않고선 볼 수 없는, 바다 밑의 내 책상에, 그 어떤, 굴 껍질 같은 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해초들이 엉겨 붙어 있는 것을, 그는 보지만, 나는 보지 못했다.”


박범신의 <더러운 책상>은 우리네 지난 60년대의 정신사에서 근간을 이루는 우리 풍속과 문화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절, 열여섯의 상고머리를 한 그가 낡은 소읍에서 태연하게 걸어 나오는 첫 대목은 마지막에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된다.

오염된 시간 위에 분리된 현재를 직조해내는 시간의 더께는 우북하게 솟아오른 월드컵의 함성에 묻혀진다. 독자들은 그 속에서 맹렬하게 불타오르는 작가의 몸 안에서 빛나는 의지를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의 가장 비천한 거처에 몸을 붙이고 ‘버스 계수원’에서 ‘인사동의 오래된 낡은 여관의 허드렛 일꾼’으로 수평 이동하는 상황은 너무나도 슬프다. 몸부림치면서 바로 설 수는 없는 것이며, 방황하면서 제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일까.

타락한 이곳을 낙원이라 일컫고 이곳에서의 더럽혀진 삶을 행복이라 칭하는 위선의 세상에서 주인공이 꿈꾸는 것은 ‘피 같은 단 한 편의 작품’이 단 한 편의 작품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어떤 모험도 마다 않는다. 이 위험천만한 성장기에는, 거짓된 세계가 폐기 처분한 어떤 곳에 진정한 의미가 깃들여 있다는 모더니티의 역설이 살아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내내 현재형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단순한 후일담의 형식을 빌어쓴 평범한 작품으로 치부되기 쉽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슴을 후비는 날카로운 시선이 고여 있다. 책장을 넘기자. 그러면, 비루한 세월을 걸어가다가 문득 꺼내든 ‘더러운’ 책상 서랍 속에서 마침내 중년을 넘어선 작가 박범신이 조곤조곤 말문을 열기 시작할 것이다.

데뷔 30년을 맞이한 작가 박범신

1946년 8월 24일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 전주교육대학교를 거쳐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였고,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이후 1992년까지 《토끼와 잠수함》(1978), 《덫》(1979), 《식구》(1983), 《흉기》(1990) 등 4권의 창작집과 《죽음보다 깊은 잠》(1979), 《돌아눕는 혼》(1980), 《풀잎처럼 눕다》(1980), 《불꽃놀이》(1983), 《숲은 잠들지 않는다》(1985), 《불의 나라》(1987), 《물의 나라》(1988), 《잠들면 타인》(1988), 《수요일은 모차르트를 듣는다》(1991), 《틀》(1993) 등 20여 권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출간하였다.

더러운 책상

박범신 지음,
문학동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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