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부끄럽게 한 꿩과 구렁이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22)-치악산 상원사

등록 2003.10.17 10:34수정 2003.10.17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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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상원사를 찾아가는 길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와 있었다.

상원사를 찾아가는 길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와 있었다. ⓒ 임윤수

세상이 참 혼란스럽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있다. 도덕이 무너지니 윤리가 무너지고 신뢰가 무너지니 불신이 팽배하다. 교권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는 옛이야기가 되었고 공권력도 가끔 삐걱거리며 휘청거리는 조짐을 보인다. 스와핑이니 뭐니 하면서 가정에 금가는 소리가 뿌직뿌직 들린다. 이러다 사회까지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와락 겁이 난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것이 정치'라 하더니 요즘 정치 판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딱 그 판이다. 어제의 동지였던 사람들이 목에 핏대 세워가며 입장을 달리한 상대의 가슴에 상처가 될 말들을 칼날 들이대듯 마구 퍼붓는 모습에서 비감을 느낀다. 일관 없고 논리 없는 주장으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그들의 모습이 초라하다 못해 측은해 보인다.


건국이래 되돌림 노래처럼 반복되던 정치권의 악습과 불신풍조를 일소해 보겠다는 일념쯤으로 생각하고 싶은 최고권력자의 순수성은 관습의 프리즘을 통해 정치꾼의 더러운 권모술수쯤으로 변색되는 느낌이다.

a 입지적 조건 때문인지 오솔길보다 조금 넓은 소롯길에 오똑하니 서 있는 일주문. 웅장함은 없으나 다정함이 있다.

입지적 조건 때문인지 오솔길보다 조금 넓은 소롯길에 오똑하니 서 있는 일주문. 웅장함은 없으나 다정함이 있다. ⓒ 임윤수

도박으로 치자면 천지개벽 이후 세상에서 가장 큰 도박일 대통령 자리를 걸고 풍토처럼 굳어버린 정치판의 구악과 구습을 일신할 토대를 만들겠다는 데 무슨 사족들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이해득실 따지지 않으면 간단할 문제에 수구와 이해가 개입되니 난맥을 이루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남들은 정치, 경제, 사회문제로 골머릴 앓을 때 한량처럼 심산유곡 산사나 찾아다니며 이러쿵저러쿵 하는 자신의 모습이 여러 가지로 그려진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부처님은 어떻게 보고 계실 것이며 스님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그 해법을 제시 할 것인지 사뭇 궁금하다.

발로 걷는 수고쯤은 곁들여야 글을 쓰기에 미안하지 않을 것 같아 이번에도 걷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치악산 꼭대기에 있는 상원사를 다녀왔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옷을 입거나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짐승보다 낫다고 주장할 수 있는 많고 많은 근거 중 하나는 윤리를 알고 보은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a 절 앞 산죽 나무숲에서 솟는 쌍용수란 약수샘으로 맑은 물줄기는 산아래 성남마을까지 이어지며 상원계곡을 이루고 있다.

절 앞 산죽 나무숲에서 솟는 쌍용수란 약수샘으로 맑은 물줄기는 산아래 성남마을까지 이어지며 상원계곡을 이루고 있다. ⓒ 임윤수

배신을 밥먹듯 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례가 심심하지 않게 발생하는 요즘, 정말 인간이라면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전설을 가진 산이 있고 그 전설의 산 중심에 자리한 산사가 있다.

한문으로 쓰는 치악산(雉岳山)에 쓰여진 '치'자는 꿩 치(雉)자다. 산 이름을 보면 그 이름엔 나름대로 사연이 있고 우여곡절이 있다. 산형에 따라 이름이 부여되는가 하면 전설이나 유래에 의하여 또는 기념할 만한 특정 사건이 계기가 되어 산 이름으로 고착되는 경우도 있다.


꿩 '치'자로 시작하는 치악산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정말 한번쯤 자신의 도리를 곰곰이 되돌아보게 하는 전설이 있다.

물 맑고 산세 좋은 강원도 원주의 이름 모를 산에 입산하여 수도하던 어느 선비는 산길을 걷다 새끼가 태어날 알을 품고 있는 꿩을 잡아먹으려는 구렁이를 화살로 쏘아 죽임으로 꿩의 생명을 살려 주게된다.

a 가을색 배경에 그려진 듯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가을색 배경에 그려진 듯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 임윤수

꿩을 구해준 선비는 날이 저물어 잠자리를 구해 민가를 찾게되었다. 나그네가 찾아든 오두막집은 공교롭게도 여자 혼자 살고 있었지만 외딴집이었기에 할 수없이 그 집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오두막집의 여자는 낮에 선비에게 죽은 숫구렁이의 아내 되는 암구렁이로 복수를 하기 위해 여자로 둔갑을 하여 남자를 유인한 것이었다. 장도의 산행에 피곤한 선비가 깊이 잠들자 암구렁이는 길다란 몸뚱이로 선비의 몸을 칭칭 감고 목을 옥죄며 혀를 날름거리며 잡아먹으려 했다.

잠결에 공격을 당해 목숨이 위태롭게 된 선비는 어쩔 수 없이 간절하게 살려 달라 애원했다. 그러자 선비의 목을 옥죄고 있던 암구렁이는 자신의 업보를 풀기 위해 '첫닭이 울기 전에 종이 3번 울리면 살려 주겠다' 한다. 오두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상원사라는 절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 절은 빈 절이었으니 종을 칠 사람이 아무도 없음이 너무 뻔하니 터무니없는 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죽었구나.'하고 목숨을 포기한 선비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뎅~ 뎅~ 뎅~'하고 상원사에서 종이 3번 울렸다. 비록 미물이나 구렁이는 자신이 한 약속을 어기지 않고 자신의 남편을 죽인 선비를 놓아줌으로써 선비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a 꿩이 죽어가며 울렸을 그 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침저녁으로 치악산 상원계곡에 울려퍼질 종소리를 내는 것임은 분명하다.

꿩이 죽어가며 울렸을 그 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침저녁으로 치악산 상원계곡에 울려퍼질 종소리를 내는 것임은 분명하다. ⓒ 임윤수

분명 아무도 없던 절에서 종소리가 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선비는 단숨에 상원사로 달려갔다. 상원사 앞마당에 있던 종 주위를 살피니 종 앞에는 선비가 낯에 구해준 그 꿩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것이었다.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선비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꿩은 자신의 목숨은 생각하지 않고 머리를 종에 부딪혀 소리를 나게 해 선비의 목숨을 살려낸 것이었다.

꿩의 살신 보은으로 목숨을 건진 선비는 그 후 은혜 갚은 꿩을 기리기 위해 산 이름에 꿩 '치'자를 넣어 치악산이라 명명하니 오늘의 치악산이란 이름을 갖게되었다.

절 앞 산죽 나무숲에 있는 쌍용수란 약수샘에서 시작되는 맑은 물줄기는 산아래 성남마을까지 이어지며 상원계곡을 이루고 있다. 성남마을에서 3시간쯤 올라가면 그곳에 상원사가 있다.

성남 매표소에서 계곡을 따라 상원사로 오르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지만 험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다. 졸졸거리는 물소리 정겹고 덤벙 발 담그고 싶은 작은 소(물이 고인 곳)가 끊이지 않고 나온다.

a 용마바위 위에 '보은의종유래비'가 있고 뒤쪽으로 계수나무가 보인다.

용마바위 위에 '보은의종유래비'가 있고 뒤쪽으로 계수나무가 보인다. ⓒ 임윤수

산을 오르다 잠시 신발 끈 풀어놓고 흐르는 물에 발 담그는 재미가 그만이다. 투박한 등산화에 갇혀 갑갑하게 꼼지락거리기만 하던 발가락을 흐르는 계곡물이 간지럽히니 그 애무감이 입가에 미소를 절로 만든다. 까탈스럽지 않은 성격이라면 오므린 손으로 물을 떠먹는 것에서도 또 다른 시원함을 맛 볼 수 있다. 가방에 비스켓이나 쵸코파이라도 있어 함께 곁들인다면 그 맛이 꿀맛이다.

힘이 들어서라기보다 여유를 만들고 싶어 한 두번쯤 숨 고르며 오르다 보면 상원사 일주문이 나온다. 상원사 일주문은 입지적 조건 때문인지 오솔길보다 조금 넓은 소롯길에 오똑하니 서 있어 그 규모에서 웅장함은 없으나 다정함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마른 목 축여 줄 거북바위 감로수가 있으니 여기서 시작한 물이 상원계곡을 형성한 것이다. 높은 산에 있는 산사에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산꼭대기서 물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볼 때마다 신비로움을 감출 수 없다.

a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대웅전 앞 좌우 두 기의 삼층석탑(三層石塔)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높이는 2.9m쯤 된다. 오랜 세월 스치는 비바람에 마모된 석탑의 상륜부에서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대웅전 앞 좌우 두 기의 삼층석탑(三層石塔)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높이는 2.9m쯤 된다. 오랜 세월 스치는 비바람에 마모된 석탑의 상륜부에서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 임윤수

지표의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일상이지만 지하의 물 흐름은 반드시 그렇지 만은 않은 가보다. 쪽바가지 가득한 물을 한숨에 마시니 뱃속까지 시원하다. 산을 오른다는 핑계로 흐트러진 옷매 가다듬고 마음 낮추니 다른 절의 사천왕문이나 불이문을 대신할 듯한 석등 사이를 지나게 된다. 석등을 지나 몇 걸음 더 내디디니 툭 터진 마당으로 올라선다.

올라선 정면에 세 개의 비 중 가운데 있는 '보은의 종 유래비'가 눈길을 끈다. 선비의 목숨을 살린 꿩의 보은을 기리고자 건립된 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당에 오르면 좌측이 되는 산 정상 쪽에 대웅전이 있고 우측인 계곡 쪽, 대웅전 앞쪽에 범종각이 있다.

전설이 전설이니 만큼 종에 자꾸 눈길이 간다. 지금도 아침저녁이면 뎅뎅하고 울려 퍼져 법계중생을 일깨울 종소리를 생각하니 피 흘리며 죽어갔을 꿩의 처참한 모습이 위대하고 크게 다가온다.

대웅전 전면 좌측 커다란 바위에는 세 개의 비가 있고 '보은의 종 유래비' 뒤에 상부가 부러지거나 잘려진 듯 뭉툭하게 고목된 침엽수의 나무가 있으니 이 나무가 계수나무라 한다.

a 상원사에선 산신각이 있는 곳 가을색이 제일 진하였다.

상원사에선 산신각이 있는 곳 가을색이 제일 진하였다. ⓒ 임윤수

어릴 때 부르던 동요 '반달'에 나오던 그 계수나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콧노래로 흥얼거리게 된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그루 토끼 한 마리 삿대도 아니 달고 돛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남쪽 나라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다 보니 치악산에 있는 상원사는 물론 주변의 모든 것이 묵언으로 가르침을 주는 법문으로 생각된다. 죽으면서도 은혜를 갚은 꿩의 보은정신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이 밥먹듯 자행하는 배은망덕을 꾸짖는 호령으로 충분하다.

종이 울리면 살려 주겠다는 약속을 어기지 않은 암구렁이는 비록 미물이지만 신의를 하찮게 여기는 인간들에게 인간다운 신뢰를 구축하라고 가르칠 듯하다.

용마바위라고 하는 커다란 바위 뒤쪽에 있는 계수나무는 40m나 되는 벼랑에 서 있다. 꿩의 보은을 지켜보고 숫한 인간들의 옳고 그른 행위들을 지켜보았을 계수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음이 틀림없다.

a 독성각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선 치악산의 '악'자가 연상되었다.

독성각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선 치악산의 '악'자가 연상되었다. ⓒ 임윤수

대웅전을 중심으로 빙 둘러 자리하고 있는 독성각과 산신각은 가을이 그려가고 있는 단풍 수채화에 한 채의 전각으로 자리잡고 있다.

치악산 상원사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무착조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운 절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창건이래 도선국사, 나옹선사, 월봉, 위학, 정암, 해봉, 삼공선사 등의 고승들이 수도를 하였다는 역사 깊은 도량이다.

상원사에서 수도한 고승들도 경전의 문구 하나보다는 꿩의 보은에서 더 많은 깨우침을 얻었고 그 깨우침을 후손에게 깨우침으로 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30여년 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대웅전 앞 좌우 두 기의 삼층석탑(三層石塔)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높이는 2.9m쯤 된다. 오랜 세월 스치는 비바람에 마모된 석탑의 상륜부에서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a 치악산 가을은 이렇게 내려오고 있었다. 점점 진하게 점점 알록달록.

치악산 가을은 이렇게 내려오고 있었다. 점점 진하게 점점 알록달록. ⓒ 임윤수

머리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면 꿩은 종을 칠 수 없었을 것이며 보은 또한 할 수 없었을 거다. 머리가 깨어지지 않으면 보은을 할 수 없었듯 껍질도 깨어지지 않으면 새로움은 탄생되지 않는다. 그 껍질이 구악과 구습이라면 껍질은 반드시 깨져야 한다. 오래된 시간만큼 두껍고 단단한 껍질일수록 깨트리는데 힘도 많이 들고 소리도 많이 날 테지만 껍질은 반드시 깨져야 한다.

알 수 없는 아릿하고 괴로운 인연이 모두에게 내리고 있다. 한 줄기 소나기처럼…. 한 줄기 소나기처럼 혼돈의 시간이 지나고 올바른 가치관과 신의가 구축되면 좀더 떳떳한 마음으로 상원사에 깃들어 있을 꿩의 보은정신에 좀더 반듯하게 대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런 날 다시 찾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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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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