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와
꽃이라면 제법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나무 이름을 대라면 스무 개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대부분 벚나무나 감나무처럼 꽃이 아름답거나 과일이 열리는 나무, 아니면 느티나무나 소나무처럼 교과서나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들로 채워져 있다.
높은 산의 등산길에서 만날 수 있는 나무는 대체로 3백 종류쯤 되고 우리의 생활주변에 흔한 나무들은 1백 종류를 넘나드는 정도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몇몇 나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익명의 나무들에 둘러싸인 채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익명의 나무들도 제각기 이름을 가지고 있다. 비슷해 보여도 자세히 살펴보면 제각기 다른 모양의 잎과 꽃을 피우고 비록 우리가 맛있는 과일로 대접하지는 않아도 저마다 특색 있는 열매를 맺는다.
이들 익명의 나무들은 우리가 바쁘다고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 곁을 지켜 온 다정한 이웃들이다. 그러니 별 쓸모도 없는 나무의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냐고 반문하기 전에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이웃된 도리일 것이다.
그 때 비로소 나무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나이테 속에 오랜 세월 묻어 두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고 자신이 피운 꽃의 아름다움도 살짝 보여주며 또한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열매가 사실은 귀한 약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슬쩍 귀띔해 준다.
기획과 준비과정, 집필에 2년이 꼬박 걸렸다는 책 <궁궐의 우리 나무>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나무들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식물도감이나 식물학 서적에서 읽는 이야기와는 너무나 달라서 새롭고 흥미롭다.
먼저 나무 이름부터 보자. 고즈넉한 산사의 앞마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롱나무는 진분홍 꽃이 백 일 동안 간다고 ‘백일홍나무’라고 불렀다가 ‘배기롱나무’를 거쳐 ‘배롱나무’로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자작나무는 껍질이 탈 때 “자작자작”하는 소리가 나는 데서 따왔다고 한다.
이외에도 능수버들, 조팝나무, 때죽나무, 물푸레나무의 이름 풀이가 재미있다. 사람들의 이름에 모두 나름대로 뜻이 있듯이 나무들의 이름에도 제각각 재미난 사연과 뜻이 담겨 있음을 이 책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또한 옛 의학서적과 전래의 민간요법에 의거하여 각 나무들의 잎이나 열매 등이 지닌 약리작용을 밝혀 놓은 부분도 흥미롭다. 늦봄에 새하얀 꽃들이 무리지어 피는 조팝나무의 잎에는 조팝나무산(酸)이라는 해열과 진통제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 버드나무의 아세틸살리실산과 함께 진통제의 원료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도 이 책에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진통제의 대명사 아스피린(Aspirin)의 이름도 아세틸살리실산의 ‘A’와 조팝나무의 속명(屬名)인 스파이리어(Spiraea)에서 ‘Spir’를 따고 당시 바이엘 사의 제품명 끝에 공통적으로 쓰던 ‘In’을 붙여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별 쓸모도 없는 나무라고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다.
여기에 나무들의 식생(植生)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와 비슷한 나무들을 구별하는 방법도 사진을 동원하여 소상하게 밝혀 놓아서 이 책은 나무도감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야생초 편지>에서 황대권이 도표로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북한의 국화 목란(함박꽃나무)과 목련, 모란, 작약의 구별법을 직접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보리수나무라고 부르는 나무도 사실은 석가의 인도보리수(菩提樹)와 ‘보리’란 지역에 많이 자라나 그 이름을 얻은 보리수(甫里樹)나무, 그리고 우리나라 사찰에 인도보리수 대신 심고 보리수라고 부른 피나무 무리를 두루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사실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이 책의 진면목은 이러한 생물학적 지식에 더하여 역사의 숨결과 문화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는 나무들의 옛 이야기들과 사연들을 하나하나 펼쳐 놓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삼국유사>나 <동국이상국집>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옛 문헌에서부터 <산해경>과 <유양잡조> 등 중국의 문헌까지 아우르는 역사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고려 시대의 시가 <청산별곡>에서부터 최근 장정일의 시까지 인용하는 거침없는 저자의 깊은 문화적 소양이야말로 이 책을 돋보이게 하는 힘인 것이다. 여기에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역사의 숨결과 문화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는 궁궐에서 그 나무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으니 더 잘 어울린다.
저자가 그러한 문헌들과 문학작품들 속에서 뽑은 우리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무가 언제나 우리 삶의 동반자였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토끼전>에 나오는 조팝나무, 김유정의 <동백꽃>에 나오는 생강나무(동백나무가 아니라 생강나무다!), 김소월의 시 <산>에 나오는 오리나무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나무들은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에서처럼 대중가요에도 자주 등장했고 <은행나무 침대>에서처럼 영화의 기둥 소재가 되기도 했다.
어떤 나무들은 역사의 현장을 지키기도 했다. 버드나무는 왕건이 고려를 세우는데 큰 힘이 되어준 버들 유(柳)씨 신혜왕후와 만나게 되는 결정적인 인연이 되었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돌배나무를 이용해 자신의 활 솜씨를 자랑하였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은 1987년 9월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자신의 고난에 찬 인생역정을 인동초에 비유함으로써 연설을 시작했다. 여기서 인동초란 바로 인동덩굴을 말하는 것인데, 인동덩굴은 사실은 풀이 아니고 여러해살이 나무라는 점을 저자는 잊지 않고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역사상 뛰어난 인물들과 인연을 맺은 나무들도 있지만 어떤 나무들은 일반 서민들과 인연을 맺어 전설을 만들고 우리의 풍속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박달나무는 천등산 박달재의 박달도령과 금봉이에 관한 전설을 담고 있고 천안삼거리의 능수버들은 군역에 나가게 된 한 홀아비와 그의 딸 능소에 관한 사연을 담고 있다.
| | | 저자 박상진에 대하여 | | | | 이 책의 저자 박상진(朴相珍)은 1940년 대구에서 태어나 1963년 서울대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쿄토대학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임업연구원, 전남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경북대학교 임산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한국목재공학회 회장을 지냈다.
오랫동안 목질문화재의 재질 연구에 매진해 왔으며 해인사 팔만대장경, 무령왕릉 관재, 고선박재, 주요 사찰 건축재, 출토목질유물 등의 재질을 조사연구하여 문화재의 분석에 과학을 결합시키는 데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 이 책에도 목재조직학이라는 전문적인 지식과 우리 문화 유산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이 잘 드러나 있다.
강우방 교수가 "나무의 문화사"라고 칭찬해 마지 않은 책 <궁궐의 우리 나무> 외에도 <다시 보는 팔만대장경판 이야기>(운송신문사, 1999), 전문서적인 <목재조직과 식별>(향문사, 1987) 등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 | | | |
결혼하는 것을 ‘화촉(華燭)을 밝힌다’라고 흔히 말하는데, 이 단어에 들어있는 ‘화(華)’는 바로 껍질에 불을 붙이면 잘 붙고 오래 가는 자작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제사상에 다른 과일은 모두 올려놓아도 복숭아만은 제외시키는 이유는 복숭아나무 가지가 예로부터 귀신들을 쫓아내는 역할을 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안의 호두과자가 명물이 된 데에도 무슨 사연이 있지 않을까? 궁금하다면 한번 <궁궐의 우리 나무>를 사서 펼쳐보라. 그리고 이 책을 들고 고궁을 찾아가 이번에는 건물 대신 나무들을 주의 깊게 살펴하면서 거닐어보자.
친절하게도 이 책에 수록된 나무들의 순서는 궁궐을 돌아보는 동선을 고려했다고 하니 책을 넘기면서 나무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그 나무들과 눈을 맞추면 저절로 나무들의 이야기가 들려올 법하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아이들 손을 잡고 고궁을 거닐며 듣는 우리 나무들의 이야기는 분명 오래도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궁궐의 우리 나무
박상진 지음,
눌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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