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학살 추정지서 유골5기·탄피 등 발굴

함평 불갑산 자락..."양민1천여명 학살" "가족잃었다" 증언 잇따라

등록 2003.10.20 11:38수정 2003.10.24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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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전남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불갑산 자락에서 유골과 함께 탄피11개와 총알 1개, 고무신 등 유품이 발굴됐다.
19일 전남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불갑산 자락에서 유골과 함께 탄피11개와 총알 1개, 고무신 등 유품이 발굴됐다.오마이뉴스 안현주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 계류중인 가운데 전남지역에서 학살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유골과 탄피 등이 발굴돼 정부차원의 진상규명 요구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19일 '미군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이하 전민특위)' 광주전남본부 조사단 등이 전남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불갑산 자락에서 유골 발굴에 나서 수백여 점의 유골과 탄피 등이 발굴돼 증언자들의 증언을 뒤받침했다.

이곳은 1951년 2월 20일 육군 제11사단 20연대 5중대 등이 빨치산 토벌작전인 소위 '대보름 작전(음력 1월 15일)'을 벌이며 불갑산에 피난 중이던 1000여명 이상의 양민들을 산등성이 참호근처에서 학살했다는 증언이 잇따르던 곳이었다.

이날 발굴팀은 5기의 유골을 확인했으며 서로 뒤엉켜있는 수백여 점의 유골과 고무신 등 유품을 발굴했다. 박종태 전남대 법의학과 교수가 발굴에 대한 소견을 밝히고 있다(오른쪽).
이날 발굴팀은 5기의 유골을 확인했으며 서로 뒤엉켜있는 수백여 점의 유골과 고무신 등 유품을 발굴했다. 박종태 전남대 법의학과 교수가 발굴에 대한 소견을 밝히고 있다(오른쪽).오마이뉴스 안현주

박종태 법의학과 교수 "6.25 때 사망 부정할 수 없어"

증언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살된 양민들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참호 길이는 총 500m로 이날 조사단이 발굴한 것은 3m. 발굴에는 박종태 전남대 법의학 교수가 참여해 시신이 매장된 상태 등을 파악했다.

"참호 속에 시체가 겹겹히 쌓여있었다", "직접 묻어줬는데 깊이 묻지는 못했다"는 증언자들의 증언처럼 이날 발굴팀이 깊이 약 20cm 정도만 파냈을 때부터 정강이 뼈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부터 오후 2시30분경까지 발굴을 한 결과, 두개골의 상태가 좋지 못했지만 총 5기의 유골이 발굴됐으며 M1으로 추정되는 탄피 11개와 탄두 1개, 고무신, 혁대 등 수백여 점의 유골과 유품이 발견됐다.


발굴을 마친 박종태 전남대 법의학과 교수는 "오늘 발굴은 시신이 겹겹히 쌓여있다는 증언이 있어 유골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발굴에 참여했다"면서 "총 5기의 시신 유해가 발견됐고 외부 충격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 한 것은 유골 한 점뿐이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넓이가 1m × 1m라는 좁은 폭에서 3기의 유골이 발견됐는데, 좁은 지역에서 많은 유골이 뒤엉켜 발굴됐다"면서 "한편에서 두개골과 다리 부분의 유골이 있는데 또 다른 사람의 두개골이 이 다리와 겹치는 식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시신들이 중첩돼 있는 양상을 보였다"고 밝혔다.


이어 "이는 정상적인 매장 형식은 아니며 급하게 매장이 이뤄졌다는 것"이라며 "6.25 이외에 또 이런 역사적 상황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야 하고, 증언 등을 들어볼 때 '6.25 당시 사망'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소견을 밝혔다. 물론 박 교수는 "육안만으로 정확한 사망원인과 시기를 추정할 수는 없다"는 전제를 달았다.

또 박 교수는 "유골의 모습으로 죽창에 의한 사망인지 과연 총에 의한 사망인지 확인할 수 없다"면서 "총의 의한 것이면 골이 깨져있어야 하는데 깨지지 않은 것만 수습했다"고 덧붙였다.

발굴 소식을 듣고 김지수, 박병화, 최종남, 장재수씨(왼쪽부터) 등이 "가족을 잃었다"며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발굴 소식을 듣고 김지수, 박병화, 최종남, 장재수씨(왼쪽부터) 등이 "가족을 잃었다"며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오마이뉴스 안현주

"시체가 빨래를 널어놓은 듯 너부러져 있었다"

이날 발굴은 이곳을 민간인 학살 현장으로 처음 증언한 최종남(69. 함평 해보면 광암리)씨 뿐 아니라 당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수원(83. 목포시)씨와 유가족, 취재진 등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됐다.

당시 어머니와 아버지 등 6명의 가족을 잃은 최종남(당시 17세)씨는 "광암리 가정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보름날 새벽에 동네에서 총소리가 나니까 용천사 앞 봉우리로 도망을 갔다"면서 "나중에 와서 보니까 온 산천이 송장들로 뒤덮혀 있었고 집터마다 안 죽어 있는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최씨는 '시체를 몇 구 정도 보았느냐'는 질문에 "하도 많아서 몇 백명이 문제가 아니었다, 온 산천이 빨래를 널어놓은 것 같았다"면서 "나중에 나무를 하러다니다 (이곳에) 시체가 잔득 (매장돼)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최씨는 이에 앞서 20연대 2대소속 5중대의 '함평양민학살' 사건 때 어머니를 잃고 '대보름작전'에서 아버지 등 6명의 가족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최씨는 "죄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50년 동안 가슴에 묻고 말 못했다"면서 "발굴 사실을 알고 다소 도움될 것 같아서 왔다"고 말했다.

또 당시 대한청년회에서 활동하다 빨치산에 붙잡혀 있었다는 김지수(74. 함평 해보면 광암리)씨도 "30여명과 갇혀있었는데 그날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들렸고 기회를 엿보다가 도망나왔다"면서 "두 동생이 대보름작전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발굴현장을 찾은 박병화(65. 함평해보면 광암리)씨도 "당시에 고모부 등이 총살 당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군경에 의해서 극심한 폭행을 당해 시름시름 앓다가 3년 후에 죽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발굴현장에는 당시(정확히 대보름작전 중) 조선인민유격대 전라남도 불갑산지구사령부 사령관을 지냈다는 김수원(83. 목포)씨도 52년 만에 전투를 벌이던 현장을 찾았다.

김씨는 '당시 산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냐'는 질문에 "좌익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는데 피난온 사람, 심지어 우익인사들도 있었다"면서 "그 때 민간인들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군'으로 살았다"고 양민들의 처지를 설명했다.

김씨는 "우리는 '220 투쟁'이라고 불렀는데 당시 군경합동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19일(작전 하루 전날) 오후 늦게 알았다"면서 "(군경은) 함평군과 영광군의 젊은 사람들을 총동원해 죽창을 만들게 하고 1m 간격으로 수색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어 "솔직히 개미떼 처럼 양민들이 입산을 해서 올라와 있고 강제로 동원된 젊은 사람들이 수색해 들어오는데 우리는 총을 쏠 수 없었다"면서 "나중에 다시 돌아왔을 때 참호 속에 시체들이 뒤엉켜 있어서 30여명이 500여명의 시신을 얕게 묻어주었다"고 말했다.

발굴 현장을 찾은 이들이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위령제를  지냈다.
발굴 현장을 찾은 이들이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위령제를 지냈다.오마이뉴스 안현주
함평양민학살에 대한 취재와 연구를 해왔던 김영택(67. 전 동아일보기자)씨는 "대보름작전이전에도 육군본부가 54년 발행한 '공비토벌사'에는 51년 2월 20일 불갑산 일대에서 1005명의 공비를 토벌했다고 기록돼있다"면서 "작전은 11사단 20연대 2대대 소속 5중대, 7중대 등 7개 중대가 참여해 불갑산 주위를 포위해 작전을 펼쳤다"고 말했다.

김씨는 "대보름작전 이전에 5중대가 함평에 주둔하면서 50년 12월 6일부터 51년 1월 14일까지 함평군 월양면·나산면 등지에서 민간인학살을 자행했다"면서 "5중대의 학살만행이 계속되면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불갑산으로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 인산인해를 이뤘다는 증언들이 많다"고 민간인들의 입산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1만명에서 수만명의 민간인들이 입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대보름작전에 앞서 벌어진 함평양민학살 사건은 제4대 국회 '양민학살진상조사 특별위원회'가 60년 6월 8일 현장조사를 벌여 "월야면 350명, 해보면 128명, 나산면 46명 등 524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고 조사결과를 보고한 바 있다.

정부차원의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시급

이날 발굴을 주도한 전민특위 광주전남본부, 광주인권운동센터, 평화실천광주전남불교연대 등은 유골을 수습하고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냈으며, 발굴한 유골은 한데 모아 발굴현장에 안장했다. 김규철 전민특위 남측본부 집행위원장은 "50년간의 긴 침묵이었고 억압이었다"면서 "6·15공동선언이 꽁꽁 얼어붙었던 입을 열고있는데 무엇이 이렇게 잔인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김수원씨는 "반세기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서 "220투쟁 이후 죄없는 양민들, 입산자들을 참호 속에 밀어넣고 깊이는 덮을 수 없어 얕게 묻었는데… 이렇게 유골이 많이 나왔다"면서 말을 잊지못하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전민특위 광주전남본부 이신 조사단장은 "정부가 나서서 발굴사업을 진행해 진상을 밝혀야 함에도 통합특별법 제정이 미뤄지고 있다"면서 "진상규명을 위해 발굴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민특위는 발굴현장을 보존해 역사기행 등을 통해서 양민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동시에 발굴된 유품들을 모아 전시회 등을 갖을 예정이다. 또 2004년 유엔인권위원회에 대보름작전 당시 양민학살에 대해 제소할 계획이며, 2004년 8월로 예정된 3차 코리아국제전범재판에 관련 자료 등을 증거로 제시할 방침이다.

이신 조사단장은 "결국 미국이 당시 군사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정부차원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동시에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발굴은 전문가로는 박 교수만 참여하고 그외에는 민간인들로 구성된 발굴팀이 했다. 이날 발굴에 참여한 이들은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발굴사업의 시급성을 촉구했다.
이날 발굴은 전문가로는 박 교수만 참여하고 그외에는 민간인들로 구성된 발굴팀이 했다. 이날 발굴에 참여한 이들은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발굴사업의 시급성을 촉구했다.오마이뉴스 안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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