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소식을 듣고 김지수, 박병화, 최종남, 장재수씨(왼쪽부터) 등이 "가족을 잃었다"며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오마이뉴스 안현주
"시체가 빨래를 널어놓은 듯 너부러져 있었다"
이날 발굴은 이곳을 민간인 학살 현장으로 처음 증언한 최종남(69. 함평 해보면 광암리)씨 뿐 아니라 당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수원(83. 목포시)씨와 유가족, 취재진 등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됐다.
당시 어머니와 아버지 등 6명의 가족을 잃은 최종남(당시 17세)씨는 "광암리 가정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보름날 새벽에 동네에서 총소리가 나니까 용천사 앞 봉우리로 도망을 갔다"면서 "나중에 와서 보니까 온 산천이 송장들로 뒤덮혀 있었고 집터마다 안 죽어 있는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최씨는 '시체를 몇 구 정도 보았느냐'는 질문에 "하도 많아서 몇 백명이 문제가 아니었다, 온 산천이 빨래를 널어놓은 것 같았다"면서 "나중에 나무를 하러다니다 (이곳에) 시체가 잔득 (매장돼)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최씨는 이에 앞서 20연대 2대소속 5중대의 '함평양민학살' 사건 때 어머니를 잃고 '대보름작전'에서 아버지 등 6명의 가족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최씨는 "죄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50년 동안 가슴에 묻고 말 못했다"면서 "발굴 사실을 알고 다소 도움될 것 같아서 왔다"고 말했다.
또 당시 대한청년회에서 활동하다 빨치산에 붙잡혀 있었다는 김지수(74. 함평 해보면 광암리)씨도 "30여명과 갇혀있었는데 그날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들렸고 기회를 엿보다가 도망나왔다"면서 "두 동생이 대보름작전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발굴현장을 찾은 박병화(65. 함평해보면 광암리)씨도 "당시에 고모부 등이 총살 당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군경에 의해서 극심한 폭행을 당해 시름시름 앓다가 3년 후에 죽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발굴현장에는 당시(정확히 대보름작전 중) 조선인민유격대 전라남도 불갑산지구사령부 사령관을 지냈다는 김수원(83. 목포)씨도 52년 만에 전투를 벌이던 현장을 찾았다.
김씨는 '당시 산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냐'는 질문에 "좌익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는데 피난온 사람, 심지어 우익인사들도 있었다"면서 "그 때 민간인들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군'으로 살았다"고 양민들의 처지를 설명했다.
김씨는 "우리는 '220 투쟁'이라고 불렀는데 당시 군경합동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19일(작전 하루 전날) 오후 늦게 알았다"면서 "(군경은) 함평군과 영광군의 젊은 사람들을 총동원해 죽창을 만들게 하고 1m 간격으로 수색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어 "솔직히 개미떼 처럼 양민들이 입산을 해서 올라와 있고 강제로 동원된 젊은 사람들이 수색해 들어오는데 우리는 총을 쏠 수 없었다"면서 "나중에 다시 돌아왔을 때 참호 속에 시체들이 뒤엉켜 있어서 30여명이 500여명의 시신을 얕게 묻어주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