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금곡(金谷)에서 길을 찾다'

석문 안에 감춰진 강진군 금곡사에서

등록 2003.10.22 20:20수정 2003.10.2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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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읍에서 작천면으로 넘어가는 까치내재에 이르면 마치 중세시대 성벽을 마주하는 것처럼 거대한 석문으로 가로막혀 계곡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서는 그 흔적조차 짐작할 수 없는 금곡사라는 오래된 사찰을 발견하게 된다.

금곡사를 감춘 두개의 석문
금곡사를 감춘 두개의 석문김철현
신라말 밀봉대사는 이 절을 지으면서 성문사라 했고 나중에 금곡사라 개칭하게 됐는데 이 사찰 비구니스님 말씀으로는 이곳에 금광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사찰 옆 개울가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이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이 금광이었던 모양이다.


금곡사에는 백제계통의 고려양식인 보물 829호 삼층석탑이 있는데 1985년 복원작업을 하던 중 석가세존진신사리 32과가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을 받기도 했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약수터에서 새풀대로 물을 빨아먹으면 신경통이 사라진다는 전설이 있기도 하다. 아마도 임진왜란 때 왜구를 격파한 이 고장출신 김억추장군의 전설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강진 금곡사에 자리잡은 김삿갓의 시비
강진 금곡사에 자리잡은 김삿갓의 시비김철현
이번 여행은 오로지 방랑시인 김삿갓이 금곡사에 남겼다는 시 한 수를 읽어보기 위함이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 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

아무도 없으려니 하고 다리도 쉬어 갈 겸해서 김삿갓 시비(詩碑) 밑에 철퍼덕 앉아 가수 배호의 '나그네 설음'을 나지막이 부르고 있자니 우두봉에서 하산하시던 60대 어르신이 '허 젊은 사람이 그런 노래도 안가?' 하시며 하늬바람에 감긴 게눈처럼 '씩' 농을 건넨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느리게 보자고 마음을 다잡지만 소금바람에 고물이 다된 96년 식 내 아반떼 차창 밖으로는 '지나 온 자국' 마다 고이는 '설음'이 없다. 왜일까?


"김 선생, 걸어보세요. 찬찬히 사물을 바라보다 보면 차를 타고 지날 때와 전혀 다른 풍경을 발견할 수 있을 거요" 교수식당에서 저녁식사 하던 차에 교수님이 내 조급함에 대해 충고를 하신다. 느리게 보기 위해서는 급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일 것이고 그 마음을 비춰볼 사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걸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雙岩竝起疑紛爭 / 一水中流解忿心 (두 바위가 나란히 솟아 다투는가 여겼는데 한 줄기 물 가운데로 흘러 성낸 마음 풀어주네)


예전이면 사진이나 한 장 찍고 지날 일이지만 김삿갓이 금곡사에 남기고 간 이 열 넉자를 벌써 대여섯번은 읽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서서 금곡과 외부세계를 격리시킨 거대한 쌍바위를 '의심하는 마음'이라 하고, 더디 흐르지만 그 틈을 헤집고만 작은 개울의 힘을 '도피를 끝내고 사람 사는 세상'으로 보고 구도의 길을 떠난 것이리라.

아마도 젊은 날의 그는 삿갓 위 세상에 대한 동경과 분노로 그 후엔 도피와 체념으로 그리고 귀밑머리가 새어지고 나선 하늘을 감히 쳐다 볼 수 없었던 삿갓 아래 사람들과 그들이 걸어다니는 길을 살펴 본 것이었을 것이다.

보물 829호 삼층석탑
보물 829호 삼층석탑김대호
성철스님은 '이 뭐꼬?'라는 말로 화두를 풀어내면서 동정일여(動靜一如 화두라는 의심덩어리가 오나가나, 앉으나 서나, 말할 때나 묵언(默言)할 때나, 조용하거나 시끄럽거나 상관없이 머리 속에 가득한 마음의 경지)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끝없이 의심하라는 말이라고 한다. 문경 봉암사 진제 스님도 '참의심이 지속되면 모든 분별을 잊고 참사람 만 사람 다 진리의 문이 열린다'고 했다.

아마도 신라 말 밀봉대사가 금곡에 사찰을 세운 것은 화두를 벗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불제자들의 염원처럼 이곳의 지형이 '의심의 벽을 뚫고 흐르는 진리의 물줄기'를 닮았기 때문은이 아닐까?

마치 펜티엄 컴퓨터인양 '빠르게 좀더 빠르게' 검색해 통계를 내고 결론을 도출해 타인에게 강요하는 우리 내 속성에 대해 진제스님은 또다시 일갈을 던진다.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무한정진 끝에 진리는 밝혀지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진리를 쉽게 알고자 하는데 이것은 지혜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 진리가 자기 것이 아닌 다음에야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꾸중일 것이다.

나는 다짐한다. 나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자. 빠르게 보지말고 느리게 느끼자. 이렇게 보이는 것들을 느리고 찬찬히 느끼다 보면 빠르게 살며 놓쳐 버린 소중한 추억과 간직하고 가야 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분명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차에서 내려 걷는다. 금곡을 뚫고 흐르는 개울을 본다. 그 개울이 끝나는 지점에 걸린 강진만과 천관산이 이물 없이 계곡으로 빨려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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