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그리기는 일종의 주술같은 치유의식이다김대호
기어코 작가를 만나 따져 보리라 전시회마다 발 품을 팔았지만 그는 마치 잡인의 침범을 금하는 소도(蘇塗)의 천군(天君)인양 은둔해 있었고, 나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 자위하며 3년 세월을 보냈다.
그의 전시회에서 나는 차마 붉지 못하고 차갑게 시들어 가는 '불꽃'과 '비애(悲哀)의 몸체(갈까마귀)'를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벅찬 감동과 우울한 혼미(depressive stupor)가 동시에 밀려왔다. 자유분방하게 하늘을 나는 당신은 도대체 뭐가 그리도 외롭고 그리운 것인가?
그리고 3년 후. 해남군 산이면 대진리 양지뜸에 은둔해 있는 올해 환갑의 심재 조규성 선생을 만났다. 그는 불도 켜지 않은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인불을 켜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상주도 관도 없는 반란군의 시체 무더기에 내려앉아 저승길로 인도하는 '갈까마귀'의 그것처럼 무표정하고 공허해 보였다.
부인이 3년을 묵혔다는 쑥차를 내왔다.
"연대 국문과를 나와서 조선일보에 들어갔는데 박통 때라 기사를 쓰기만 하면 캔슬당하니 화가 나서 8개월만에 때려치웠지. 중국 장대천 화백 전시회에 갔다가 그림을 보고 갑자기 내가 헛살고 있다는 생각이 불쑥 들더라고, 그래서 바로 짐 싸들고 낙향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
그는 처음에는 광주에 가서 의제 허백련 선생이 생전에 만든 연진회에 들어가 그림 공부를 했는데 자꾸 의제 선생 판박이로 그림을 그리라고 해서 다시 그만두고 목포로 내려왔다. 혼자 여관방에 몇 달을 틀어박혀 유명 화가들의 그림 모사를 수백수천번 반복하며 그림 공부를 했는데 범죄자로 오해도 받았고, 종이 살 돈이 떨어지면 신문지고 벽면이고 가리지 않아 여관주인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화실 문이 열리고 장년의 한 사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형님, 수술 끝내고 하도 피곤해서 좀 쉬러 왔소. 차나 한잔 주십시오"
목포한국병원 강철수 원장이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심재의 제목 없는 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