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리 것 드셔 보세요!"

남학생들, 가정 실습 하던 날

등록 2003.10.28 13:43수정 2003.10.2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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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의 남학생들이 가정이라는 과목을 배운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전에는 남학생들은 기술, 여학생들은 가정을 따로 배웠었죠. 그러나 맞벌이 시대가 보편화됨에 따라 제가 교단에 처음 섰던 1995년 무렵 부터 남학생들도 가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유교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무장(?)되어 있었던 저는 남학생들이 가정을 배우는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1년에 한차례 가정 실습을 해서 평가자료로 삼습니다. 그런데 가정 실습을 한다고 하면 학생들은 매우 즐거워 합니다. 앞치마도 두르고 머리에 수건도 두르고… 지금은 그런 모습이 참 보기좋고 귀여워 보이는데 처음에는 그리 좋아보이지 않더군요.

확실히 학생들은 우리 세대보다 유교식 남녀문화에서 자유로운가 봅니다. 우리 어른들이 오히려 배워야지요.

오늘은 제가 담임을 맡고 있는 3학년 5반이 실습을 했습니다. 메뉴는 각종 전이었죠. 보통 가정실습실에서 실습을 하게 되면 담임교사는 격려 차원에서 가봅니다. 가서 맛도 보고 나름대로의 품평회도 하지요.

공교롭게도 어제 제가 술을 많이 먹어서 기름진 전을 먹기가 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냥 한번 둘러보기만할 생각으로 갔습니다.


6개 조로 나누어 실습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저를 붙잡습니다. 자기네 조가 만든 것 한번 먹어보라고요. 학생들의 정성이 고마워서 속이 안좋음에도 불구하고 넙죽넙죽 받아먹었습니다.

제자들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니 맛이 아주 좋더군요. 어제 그리고 오늘 아침에 제게 야단맞았던 녀석들도 자신들이 만든 음식을 권하는 모습을 보고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나 같았으면 이렇게 못할 것 같은데….'

수업을 마치고 제 자리로 와보니 각종 전을 한가득 담은 큼직한 접시가 놓여 있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과 나누어 먹었지요. 학생들의 정성이 담겨 있어서 그런지 과음으로 인해 속이 안좋음에도 불구하고 말끔히 소화가 되는군요.

학교가 무너지고 교육이 붕괴된다고들 하지요. 사람을 소개받거나 만나게 되어 제 직업을 밝히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게 요즘 애들이 그렇게 버릇이 없고 교실 분위기가 엉망이냐고들 묻습니다.

하지만 제가 현장에서 그간 본 모습은 착하고 오히려 어른들보다 편견이 없는 청소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학교와 학생들의 부정적인 모습은 언론의 과대 포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학과 공부는 내가 스승이지만 다른 분야는 학생들이 나의 스승이 될 수도 있음을. 학생들이 만들어준 음식을 먹으며 선생이라는 권위 의식에 빠져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을 제자신에게 주문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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