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국익'과 국민의 '진실지수'

이라크 추가 파병을 바라보는 한 교사의 시각

등록 2003.10.29 10:46수정 2003.11.01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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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제 심사가 그래서 그랬는지, 제자에게 책을 권해주기 위해 잠시 손에 들었던 쌩떽쥐 뻬리의 <어린 왕자>를 읽다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책을 읽다가 어떤 감동에 휩싸여 코끝이 찡해지거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지만, 열 번도 넘게 읽어서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한 편의 동화를 보다가 주르르 눈물을 흘리고 만 것은 제 자신으로서도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혹시라도 학생들이 볼세라 무척 당황하여 눈물을 닦기 위해 서둘러 손수건을 찾다가 책의 뒤 표지에 적힌 다음과 같은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동화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까닭은 어린 왕자라는 연약하고 순결한 어린이의 눈을 통해 어느덧 잊혀지고 일그러진 진실을 일깨워 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가만 들여다보면 그 안에 '진실'이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실종된 진실 대신 '국익' 혹은 '현실'이라는 단어가 시대정신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심각한 것은 '현실'이라는 단어의 참뜻이 왜곡된 채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쭙잖은 시를 쓰는 시인이지만 제게 '현실'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소중합니다. 문학이 우리의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한낱 언어귀족들의 사치행각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보기 도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경림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쓰러진 자의 꿈>에는 이런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밤차를 타고 가면서


밤차를 타고 가면서 보면
붉고 푸른 빛으로 얼룩진
어둠이 덮은 산동네는 아름답다
밤차를 타고 모두들
그 아름다움에 취해 간다
어둠을 한 겹만 들추면 있는
고달픈 삶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괴로움 속에 뒤엉켜 있는
사람들의 깊은 말도 모두 잊었다
밤차를 타고 어둠이 덮은
아름다운 산동네에 그냥 취해 간다
거기 살던 사람까지도
거기 살고 있는 사람까지도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현실(혹은 진실)'입니다. 붉고 푸른 빛으로 얼룩진, 그 어둠을 한 겹만 들추면 있는,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 산동네 사람들의 고달픈 삶의 현실(혹은 진실)과 그 현실에 눈 돌리려 하지 않는 우리 내면의 현실을 목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시인이 '거기 살고 있는 사람'의 고달픈 삶을 외면한 채 '어둠이 덮은 산동네'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시를 쓴다면 그것은 엄연한 현실 왜곡이요, 곧 진실하지 않은 시를 쓰는 셈이 됩니다.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현실은 바로 '남의 아픔'입니다. 그것을 들여다보라는 시인의 간절하고 슬픈 음성이 귓전을 맴도는 것 같습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라는 단어에는 '남의 아픔'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만큼 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니, 오히려 거짓이나 부도덕에 가까운 뜻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가령, 이런 식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이라크 파병에 찬성합니다. 그것은 파병이 우리 국익에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미국이 필요할 때 우리가 도와주어야 미국도 우리를 도와줄 것 아닙니까? 그런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명분론만 내세우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 모 방송사가 마련한 이라크 추가 파병에 대한 토론마당에 방청객으로 참석한 한 대학생의 이라크 파병 찬성 발언 내용입니다. 제가 놀란 것은 그가 말하는 '국익'이나 '현실'이 북한의 핵 문제와 연계된 한반도의 전쟁위기와 같은 현실적 상황보다는, 이라크 파병이 반대급부로 우리에게 안겨줄 경제적 실익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라크 파병이 북한의 문제를 더욱 어렵게 할 수도 있다는 파병 반대론자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그런가하면 파병거부가 미국의 심기를 건드림으로써 한반도에 위기상황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파병 찬성론자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그 방면에는 전문적인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에 양쪽의 주장을 경청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국익'과 '현실'의 개념은 그런 생존을 위한 방어적 개념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이번 파병 결정이 미국의 침략 전쟁을 대리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니냐는 식의 논조가 은연중에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죄 없는 이라크 민중들과 어린이들을 향해서 총부리를 겨누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해볼만한 일이 아니냐는 약육강식의 폭력성이 섬짓하게 느껴진 것입니다.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이라크 추가 파병이 나라의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그 구체적인 수치까지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들은 이라크 파병에 따른 수출 및 해외건설 확대효과가 2008년까지 102억 달러 수준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으며, 아울러 한미공조 지속의 근간이 되고 있는 주한미군의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접하면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꿈나무들인 아이들의 영혼을 책임져야할 교사로서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라크 전쟁이 미국의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 확실하다고 해도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을 도와 파병해야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또한 그 대가로 경제적 실익을 챙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인가?

잠깐 말머리를 돌려 제가 군복무 시절에 만난 상관으로부터 들었던 한 편의 짧은 훈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학구적이고 지적인 풍모가 느껴지는 그 상관은 연병장에 병사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군대는 본질적으로 불합리한 집단입니다. 지휘관은 사랑하는 부하들에게 화력계획에 의해서 누구도 예외 없이 사살될 수밖에 없는 적진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을 내려야만 합니다. 이렇게 본질적으로 불합리한 군대가 와해되지 않고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합리적으로 행동하려는 역설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덧 2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정황이 아직도 눈에 그림처럼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은 그 훈화에 담겨 있는 '진실' 때문일 것입니다. 유사시에는 살인이 허용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상급의 조건이 될 수도 있는, 신체적인 자유가 통제되고 명령과 복종만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군대사회입니다. 그런 곳에서도 참된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건강한 사회를 지향하는 마음이 녹슬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저를 감동에 젖게 합니다.

그에 비한다면 지금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 자신을 허물어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국익이나 현실이라는 허울좋은 핑계거리를 대고 말입니다.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끼니를 거르고 있는 상황에서 연간 수조 원에 달하는 음식쓰레기를 버리는 나라의 국민들이 경제적인 실익을 챙기기 위해 명분 없는 전쟁에서 전리품을 챙기려 한다면 그것은 국가의 수치요, 인간적인 모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같은 핏줄을 나눈 사람들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는 이라크 민중들과 어린이들의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잘못된 처사가 분명합니다.

더욱이 그들의 희생과 아픔을 통해서 나의 재화를 쌓고자 하는 발상을 현실을 직시한 현명한 선택이 아닌, 일그러진 진실조차 버리고 없는 현실주의자들의 탐욕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그들이 현실인식을 가진 사람으로 커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때의 현실인식은 곧 진실인식을 의미합니다. 그가 속해 있는 국가나 사회의 진실을 파악하는 능력 말입니다.

내 나라이든 남의 나라이든 상관없이 동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파악하는 능력 말입니다. 저는 그것을 진실지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자신에게 처한 현실이 조금 가파르다고 해서 인간의 기본을 너무도 쉽게 무너뜨리는 진실지수가 낮은 현실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이야말로 국익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국가에 해를 끼칠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입니다. 오래 전에 우리 국민들을 경악하게 하고 나라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렸던 성수대교의 참극을 돌이켜본다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어른들이 하고 있는 것을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영혼이 깨끗하고 해맑은 우리의 어린 왕자들이 말입니다. 그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일그러진 진실을 드러내 보이고 이를 닮아가게 하는 것만큼 국익에 해를 끼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이라크 파병이 과연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온 국민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합니다. 그리고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라는 결론이 난다면 다시는 국익이 어떻고 하는 말은 이제 삼가야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가장 위대한 유산은 바로 국가적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국익은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 현실인식(혹은 진실인식)이 뛰어난 아름다운 정신과 영혼을 소유한 국민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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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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