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광우신(狂愚神)의 노예?

에라스무스의 <광우예찬>

등록 2003.10.29 11:13수정 2003.10.31 10:38
0
원고료로 응원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우신'의 노예이므로 자연히 가장 나쁜 인간이 가장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들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그 뿐만 아니라 가장 서투른 인간이 역시 가장 자신만만하고 가장 찬미를 받고 있는 터인즉, 참다운 지식에 집착한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참다운 지식이란 터득하기에도 힘이 들고, 따분하고, 소심한 사람을 만들고, 결국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밖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거든요"

a

ⓒ 을유문화사

아마 고등학교 때 세계사 교과서에서였던가 <우신의 예찬>이라고 언급된 책으로 기억한다. 흔히 그렇듯이 고전으로 널리 알려진 책들 치고 실제로는 별로 읽혀지지 않는다. 이 책의 경우도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유럽 최고의 인문주의자로 손꼽히는 에라스무스(1469~1536)의 책이지만, 인터넷 서점에서 겨우 다른 고전들과 합본된 이 책 한 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만큼 찾는 이가 드물다는 거겠지. 그러나 하루만 해도 무수히 쏟아지고 사라지는 신간들보다도 오랜 생명력을 지닌 고전의 가치는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영국까지 여행 중이던 에라스무스는 이 작품을 구상했다가 친구 토마스 모어의 집에 머물면서 단 일주일 동안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것도 참고도서 없이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존해 써내려간 책으로 전해진다. 자신의 말처럼 심각한 책은 아니고, 그저 재미 삼아 심심풀이로 인간 사회를 풍자한 소책자였다.

그러나 이 책은 저자도 놀랄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당시 한창 일고 있던 종교개혁 운동에 힘을 실어 주었으며 에라스무스가 집필한 책 중에 가장 유명해 지기도 했다. 광우(狂愚) 여신(모리아)의 입을 빌어 당시 사회와 인간 조건의 부조리를 예찬한 것이 사람들에게 거꾸로 비판과 풍자로 읽히면서 큰 호응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분명 풍자서이지만 만만한 책이 아니다. 박식한 저자의 그리스-로마 문학, 철학, 성서 등의 광범위한 고전 인용이 처음부터 줄곧 이어져 독자를 당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자의 친절한 각주가 본문 바로 밑 부분에 나오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책에서 말하는 대로 광우신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자는 거의 없어 보인다. 철학자, 여자, 시인, 문필가, 교황, 수도사, 법률학자, 국왕과 제후 등 어떤 자라도 일단 광우신의 "혓바닥에 한번 떠올랐다" 하면 그의 충성스런 신도임이 이내 들통나고 말기 때문이다. 예컨대 광우신이 여자들의 결혼과 출산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읽어보자.


"우리 현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듯이, 결혼 상태의 불편함을 미리 계산한다면 대관절 어떤 사람이 그런 결혼의 멍에에 목을 내밀 것인지 좀 물어 보고 싶군요. 그리고 아기를 낳는 데 어떤 위험이 따르고 그것을 기르는 데는 피로가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본다면, 대관절 어떤 여자가 남자에게 가겠어요? 여러분의 생명은 결혼 덕분에 얻어지지만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은 내 시녀인 '경망'의 덕분이지요. 만약에 여기에 있는 시녀 '망각'이 여자 옆에 붙어 있지 않는다면 대관절 어떤 여자가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난 뒤인데도 또 같은 짓을 하려고 하겠어요?"

이 책이 교회에 대해 뭐라고 했기에 로마교황으로부터 금서처분까지 받아야만 했을까. 저자 에라스무스는 본디 사제와 의사의 딸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돌봐주는 양부모가 죽자 젊은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원 도서관의 책에 파묻혀 살았던 이력을 지니고 있다. 이때의 학문적 바탕으로 유럽 최고의 인문주의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당시 교회 문제에 관한 한, 당대의 어느 신학자 못지 않게 상당한 식견이 있었던 인물이다.


유명한 종교개혁가 루터마저도 그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들의 위선에 대한 그의 신랄한 풍자가 무시할 수 없는 파장을 불러 일으켰던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연 딴판으로 호화로운 의식과 향락에 빠져 거드름을 피우던 당시의 교황을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묘사한다.

"...거의 연극 같은 전례에 '지복'이니 '지존'이니 '지성'이니 하는 칭호를 걸치고 나타나서, 의식에서 축복하고 저주하면서 감시만 하고 있으면 그로써 충분히 그리스도를 섬기는 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기적을 행한다는 것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낡아빠진 관습이고, 민중을 교화한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고, <성서>를 해석한다는 것은 학교에서 하는 일이고, 기도하는 것은 무익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불행한 사람들과 여자들이 할 일이고, 가난하게 사는 것은 업신여김을 사고, 패배를 당한다는 것은, 가장 위대한 왕에게도 여간해서는 자기의 발에 입을 맞추게 하지 않는 교황님으로서는 당치도 않는 치욕이며, 마침내 죽는다는 것은 가혹한 일인데, 십자가 위에서 죽는다는 것은 불명예스럽다는 거지요"

비록 광우신의 입을 빌어서 하는 것일지라도 저자의 교회비판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의 바른 지적처럼 오늘날까지도 교회는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예수)을 따랐습니다"(마가10:28)고 말했던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과는 전혀 딴판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걸핏하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있다고 곧잘 말하면서도 엄청난 토지와 건물 같은 재산을 이 땅 위에 축적하는 데 여념이 없다. 사랑의 화신인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며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라크 전쟁에 파병하는 것쯤 뭐 그리 대수냐고 쌍수를 들고 찬성하고 나선다. 정말 광우신의 노예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을까. 하긴 이것이 어디 기독교만 해당하는 문제이겠냐 마는, 올해도 어김없이 종교개혁 기념일을 맞이하는 교회는 에라스무스의 따가운 비판을 더 곱씹어 보기를 권한다.

광우예찬.군주론.방법서설.잠언과 성찰

에라스무스 외 지음,
을유문화사, 1995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서울대 역사교육과 경쟁률이 1:1, 이게 실화입니다 서울대 역사교육과 경쟁률이 1:1, 이게 실화입니다
  2. 2 "600억 허화평 재산, 전두환 미납 추징금으로 환수해야" "600억 허화평 재산, 전두환 미납 추징금으로 환수해야"
  3. 3 아무 말 없이 기괴한 소리만... 대남확성기에 강화 주민들 섬뜩 아무 말 없이 기괴한 소리만... 대남확성기에 강화 주민들 섬뜩
  4. 4 아내가 점심때마다 올리는 사진, 이건 정말 부러웠다 아내가 점심때마다 올리는 사진, 이건 정말 부러웠다
  5. 5 벌점을 줄 수 없는 이상한 도시락집 벌점을 줄 수 없는 이상한 도시락집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