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이 노년을 흉보니 유쾌한 웃음이 저절로...

책 속의 노년(66) : 〈실버들을 위한 유쾌한 수다〉

등록 2003.10.29 12:50수정 2003.10.29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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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아파트 단지 14동과 21동. 친정에서 우리 집까지는 올해 일흔 여섯이신 어머니 걸음으로 10분이면 넉넉히 도착할 정도의 거리이다. 어머니는 어머니가 이름 붙인 '주말 자유시간'을 빼놓고는 더우나 추우나 매일 아이들 하교시간에 맞춰 우리 집에 오신다.

정수기물을 한 통 가득 받아 손수레에 싣고 도착하신 어머니는, 겉옷을 벗기가 무섭게 부엌 쪽으로 가시거나 아니면 소파 가득 쌓여 있는 마른 빨래를 개키면서 우리 집에서의 일과를 시작하신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할머니 된장찌개'를 한 냄비 가득 끓여 놓거나 생선을 다듬어 냄비에 안치고, 아니면 전날 불려 놓았던 마늘을 까서 갈아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어두시고는 "나, 이제 퇴근한다!" 인사를 하신다.

물론 마늘 같은 것은 갈아서 두 집에서 나눠 쓰긴 하지만, 집에 가셔서 아버지와 드실 저녁 식사 준비를 또 하셔야 되니까 번거로우실 것 같아 된장찌개라도 좀 떠서 담아드리려 하면 손사래를 치며 도망치듯 가버리신다.

매일 반복되는 우리 집 풍경에 누군가, "당신 노인복지하는 사람 맞아?"하고 따지고 들 것 같아 솔직히 지레 주눅이 들기도 한다. 한 때는 나도 어머니 손을 빌리지 않고 살림을 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께는 자유시간을 맘껏 쓰시라 하고는 있는 솜씨 없는 솜씨 다 발휘해서 반찬도 미리 만들고 마늘도 손질해서 넣어 놓고 했는데 한 5일쯤 지났을까. 오신다 말씀도 없으셨던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시더니 괜찮다는 내 말에도 아랑곳없이 보통 때처럼 부엌으로 가셔서 컵 몇 개가 담겨있는 설거지 그릇에 손을 넣으시는 것이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 순간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문득 어머니는 딸인 내게 없어서는 안될, 정말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그 역할 확인이 필요하셨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자식의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라 여길지 몰라도, 아직까지 어머니는 편안하고 좋아 보이셔서 나는 걱정하지 않고 마음을 푹 놓고 있다.


선배 한 분이 말씀해주셨다. 연세 높으신 친정 부모님께서 아마도 알게 모르게 가까이 사는 내게 정서적으로 많이 의지하고 계실 것이므로, 결국 일방적인 의존이 문제일 뿐 상호 의존은 오히려 건강한 관계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면서 다만 상호 의존(Interdependence)이 자립(Independence)이나 의존(Dependence)보다 서로에게 더 유익한 관계가 되려면 '지나치지 않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실버들을 위한 유쾌한 수다〉를 읽을 때도 어머니가 옆에서 빨래를 개키고 계셨는데, 내가 재미있어서 웃음을 터뜨리면 어머니는 무슨 이야기인지 무척 궁금해 하셨다. 책을 직접 읽기에는 눈이 많이 나빠지셔서, 그 자리에서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 드렸다.

내가 웃는 부분은 주로 60대 중반인 저자가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노인 흉을 볼 때이다. 어머니께 그 대목을 읽어드리니 기분 나빠하시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수긍을 하신다.

이 책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40대 중반으로 딸이며 며느리 자리에 있는 내가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아마도 건방지다, 버르장머리 없다는 이야기가 곧장 날아올 것이다. 노년의 저자가 노년 이야기를 하니 더더욱 실감이 날 뿐만 아니라, 이리 저리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시원함과 통쾌함이 있다.

"무얼 하든지, 무얼 사든지, 심지어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자식을 위하여'라는 핑계는 듣기에도 역겹다" "내게서 냄새가 안 나는 것이 아니라, 내 취각이 노화해서 냄새를 스스로 못 맡고 있는 것뿐이다" "아무리 늙었더라도 최소한의 염치는 차려가면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노년이 노년 이야기를 하는 미덕이 바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위로는 90세 친정 어머니와 70대 남편, 아래로는 386 자녀와 N세대 손자 손녀와 부딪치며 살고 있는 저자만의 생생한 경험이 담겨 있어 재미있으면서도 노년기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마음 한 번 고쳐먹는 것, 즉 회심(回心)으로 내 마음의 불편함도 젊은 세대와의 갈등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가족으로부터 홀로 서기, 늙어서도 실천해야 할 것들, 건망증·음식·발 관리·노인 냄새·보청기 사용·눈의 건강·염색법에 이르는 내 몸의 관리, 노년기의 사랑과 결혼, 죽음 준비까지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다.

주변에서 보고 들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사례로 들면서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쉽고 편안해 부모님께 권해 드려도 좋을 만하다. 솔직히 나도 친정 어머니의 눈만 좀 더 좋으셨다면 읽어보시라고 드렸을 것이다.

노년기 남성들이 쓴 책의 대부분이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의 성취나 건강법, 장수 비결 중심인 것에 비해, 이 책은 노년기 여성 특유의 감수성과 세밀한 관찰력이 돋보여 아기자기하고 친절하다. 생활 속에서 길어낸 이야기의 장점이라고 하겠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마침 저자의 남편도 70대에 접어들었다고 하니 노년기 남성의 속내와 남성들이 느끼는 노년 생활 이야기를 좀 더 충분하게 섞었더라면 보다 풍성한 노년 이야기 모음이 되었을 것이다.

노년 세대는 늘 자신들의 문제를 젊은 세대가 나서서 말해 주지 않으면 덮어두고 지내왔다. 이제 노년이 노년을 이야기하니 참으로 속 시원하고 편안하다. 저자가 70대에 이르면 또 어떤 수다를 떨지 기대하는 심정이 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러면서 20년쯤 지난 후, 내가 저자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나는 과연 어떤 실감나는 노년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놓을 수 있을지… 나를 한 번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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