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들이 하룻밤 만에 세운 프람바난 사원

인도네시아 여행기 (2) - 족자카르타

등록 2003.10.30 06:20수정 2003.10.31 16:27
0
원고료로 응원
자바 문화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는 고도(古都) 족자카르타(Jogjakarta)는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걸렸다.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현지 안내인은 뜻밖에도 분명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족자카르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관련
기사
- 거대한 카오스의 도시는 무엇으로 굴러가나

와기여(Wagiyo)라고 자신을 소개한 안내인은 족자카르타에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5명의 현지 가이드 중 하나란다. 시내에 위치한 인도네시아 최고의 국립대학교인 가자 마다(Gadjah Mada) 대학교에 있는 한국문화센터에서 4개월 동안 배운 실력치고는 너무나 유창했다. 덕분에 자카르타에서처럼 말이 통하지 않아 느낀 답답함과 불편함은 면할 수 있었다.


낯선 이국에서 한국말을 제법 잘 하는 현지 가이드를 만나니 반가운 마음과 친근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와기여의 설명에 의하면, 요그야카르타로 불리기도 한다는 족자카르타는 "우정(Yogya)의 도시(Karta)"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족자카르타는 우리에게는 정말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었다.

생김새와 피부색은 우리와 조금 달랐지만 한국말을 서로 주고받으며 그와 함께 한 1박 2일의 족자카르타 여행은 거대한 카오스의 도시 자카르타에서 경험한 유쾌하지 못한 인상을 말끔히 씻어내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인도네시아에 대해서 느끼는 일말의 우정은 족자카르타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혀두어야겠다.

a 멀리서 바라본 프람바난 사원. 정교하게 장식된 거대한 석탑들처럼 보인다.

멀리서 바라본 프람바난 사원. 정교하게 장식된 거대한 석탑들처럼 보인다. ⓒ 정철용

장대한 규모로 우리를 압도한 프람바난 사원

점심을 먹고 제일 먼저 간 곳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힌두 사원으로 손꼽히는 프람바난 사원(Candi Prambanan)이었다. 사원이라면 으레 산 속 깊숙이 자리 잡은 우리나라 사찰이나 자카르타에서 머무는 동안 보았던 회교사원을 떠올리는 것이 고작인 내게 멀리서 바라다 본 프람바난 사원은 사원이라기보다는 정교하게 장식된 거대한 석탑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서 드러나는 그 장대한 규모는 우리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힌두교의 3대 신을 모시고 있는 시바 신전과 그 양 옆의 브라마 신전과 비슈누 신전은 화려한 아름다움과 거대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a 프람바난 사원 중앙의 시바 신전. 높이 47미터의 장대한 위용이 압권이다.

프람바난 사원 중앙의 시바 신전. 높이 47미터의 장대한 위용이 압권이다. ⓒ 정철용

중앙에 위치한 47m 높이의 시바 신전은 힌두 최고신을 모신 신전답게 시바 신을 비롯하여 각기 다른 4개의 신상(神像)들이 봉안되어 있다. 동서남북 방향으로 나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4개의 석실에서 볼 수 있는 이들 신상 중에서 현지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북쪽 석실의 두르가(Durga) 상인데, 그녀는 시바 신의 부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그녀를 전설상에 나오는 아름다운 공주 라라 종그랑(Lara Jonggrang '날씬한 처녀'라는 뜻)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녀를 만지면 예뻐진다고 믿고 있다.

와기여의 이런 설명을 듣자마자 딸아이는 얼른 두르가 상에 손을 갖다 댔다. 나와 아내는 그 모습에 그저 웃고 말았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만졌는지 온통 새까맣게 손때가 묻어 있는 두르가 상은 가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을 터이다.


이렇게 새까맣게 손때가 묻은 신상의 모습은 시바 신전의 서쪽 석실에 봉안된 가네샤(Ganesya) 상에서도 볼 수 있다. 시바 신의 아들인 가네샤는 코끼리 두상을 하고 있는데, 왼손으로 인간의 두개골을 잡고 긴 코로 그 내용물(두뇌)을 빨아먹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이 광경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지만, 그는 지혜의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으며 그 코를 만지면 똑똑해진다는 믿음이 이곳 현지인들에게는 널리 퍼져 있다. 그래서 딸아이에게 만져보라고 하였더니 한사코 거부해서 대신 내가 만졌다.

그 이후로 내가 얼마나 똑똑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손때가 잔뜩 묻어 있는 신상들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내 마음은 썩 개운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문화유산 제642호로 지정되어 있다는 이 훌륭한 세계의 문화재를 이토록 소홀하게 관리해도 되는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a 지혜의 신 가네샤 상. 똑똑해진다고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새까맣게 손때가 묻었다.

지혜의 신 가네샤 상. 똑똑해진다고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새까맣게 손때가 묻었다. ⓒ 정철용

힌두교의 3대 신을 모신 신전 앞에는 흥미롭게도 그 신들이 교통수단으로 이용했던 동물을 모신 신전들이 각각 서 있다. 그 배치에 따르면, 시바 신은 소(Nandi)를 타고 다니고 브라마 신은 백조(Angsa)를, 비슈누 신은 독수리(Garuda)를 타고 다닌다. 인도네시아의 국적 항공사인 가루다 인도네시아의 이름이 어디서 연유했는지를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70년이 넘게 걸린 복원 작업

현재 프람바난 사원에는 이 6개의 신전들과 이들 측면에 각각 2개씩 서 있는 작은 신전들을 포함해서 모두 18개의 신전들만이 복원되어 서 있다. 그러나 9세기 무렵 처음 건립 당시에는 라라 종그랑의 전설이 전하고 있는 1000개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작은 신전들을 포함하여 모두 240개의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6세기에 화산 폭발과 큰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프람바난 사원은 1918년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서 복원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200년이 넘도록 폐허 속에 방치되었다. 무너져 내린 돌조각들을 퍼즐 맞추듯 하나하나 맞추어 쌓아 올려야만 하는 까다로운 복원작업은 쉽지 않은 재정문제로 여러 번 중단되기도 하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70년이 넘도록 계속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복원된 신전은 18개에 불과하며 복원되지 못한 나머지 작은 신전들은 아직도 프람바난 사원 주위에 돌무더기들로 쌓여 있으며 복원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와기여의 말로는 재정 문제 때문에 더 이상 복원작업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다는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 사원 주위에 무너진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신전들의 돌무더기. 언제쯤 제 모습을 찾을까?

사원 주위에 무너진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신전들의 돌무더기. 언제쯤 제 모습을 찾을까? ⓒ 정철용

프람바난 사원을 모두 둘러보고 나오면서 만난 한 할머니가 구걸하면서 한국말을 건네고 있음에도 그 말이 반갑기보다는 아프게 들린 것은 그 때문이었으리라. "잔돈 좀 줘!" 내 뒤통수에 꽂히는 그 말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바틱 공방에서 한없이 느린 시간을 만나다

프람바난 사원에서 만났던 구걸하는 이들의 모습은 시내에 있는 바틱(Batik) 공방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수없이 목격되었다. 우리 차가 신호대기로 정차하고 있으면 작은 기타를 든 아이들과 청년들이 어김없이 다가와 손을 벌렸다. 거부 의사를 밝히면 끈질기게 따라붙지 않고 쉽게 포기하는 것을 봐서는 그러한 구걸행위에 이골이 난 것처럼 보였다.

저렇게 해서 그들이 버는 돈은 하루에 얼마나 될까? 아직 학생들일 텐데, 학교 끝나고 저렇게 거리에서 구걸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부모들은 가만히 놔두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의문들을 나는 쉽게 떨쳐버리지 못했다.

드디어 도착한 한 바틱 공방은 어두운 조명에 흙바닥이 그냥 드러난 것이 공방이라기보다는 낡은 공장이나 헛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열심히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이들의 손놀림은 정교하고 섬세했다. 그 손놀림을 따라 왁스가 옷감에 흘러내리면서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a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바틱 공방의 아주머니들. 정교한 손놀림으로 한없이 느린 시간의 무늬를 그리고 있다.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바틱 공방의 아주머니들. 정교한 손놀림으로 한없이 느린 시간의 무늬를 그리고 있다. ⓒ 정철용

두 가지 색상으로만 이루어진 가장 단순한 바틱의 경우에도 그것을 수작업으로 할 경우에는 도안 작업, 두 차례의 왁스 작업, 두 차례의 염색 작업, 마무리 왁스 작업, 왁스 제거 작업 등 8개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고 하니 바틱 만들기는 인내심을 배우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작업처럼 보였다. 실제로 하나의 바틱을 만들어내는 데 실크의 경우에는 2개월이 걸리고 면의 경우에는 2주일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한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설명을 듣고 보니, 바틱의 그 아름다운 무늬와 색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한없이 느린 그 시간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자카르타의 한 백화점에서 산 바틱 그림 3점의 값이 한국 돈으로 2만원도 안 될 정도로 싸다고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말이다.

싼 것은 이들의 노동력이지 바틱의 값어치가 결코 아닌 것이다! 일일이 사람의 손이 가는 복잡하고 많은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바틱의 아름다움은 정녕 한없이 느린 시간의 아름다움이다.

프람바난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환상의 무대, 라마야나 발레 공연

바틱 공방에서 나와 호텔 체크인을 하고 우리는 잠시 쉬었다. 오후 6시에 호텔 로비에서 와기여를 다시 만나 저녁을 먹고 우리가 향한 곳은 다시 프람바난 사원. 낮에 느꼈던 프람바난에서의 감동을 이번에는 프람바난을 배경으로 삼은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에서 맛보기 위해서였다.

a <라마야나> 무용극의 주인공 라마와 신타. 자카르타의 한 백화점에서 산 바틱 그림 세 점 중 하나다.

<라마야나> 무용극의 주인공 라마와 신타. 자카르타의 한 백화점에서 산 바틱 그림 세 점 중 하나다. ⓒ 정철용

이 공연은 프람바난 사원의 시바 신전과 브라마 신전의 석벽에 부조로 새겨져 있기도 한 힌두신화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 이야기를 타악기를 중심으로 한 이곳의 전통음악 가믈란(Gamelan) 반주에 맞추어 펼쳐 보이는 화려한 무용극이다.

무대의 자연적인 배경을 이루는 프람바난의 시바 신전과 비슈누 신전 사이로 솟아오른 보름달이 환하게 비치는 가운데 무대가 열리면 가히 북경의 자금성에서 열린 오페라 <투란토트>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환상적인 공연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이 공연을 본 날은 그믐에 가까운 날이라서 그렇게 멋진 광경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매일 있는 공연이 아니니, 공연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을 삼을 수밖에….

아요댜(Ayodya) 왕국의 왕자 라마(Rama)가 원숭이 전사들의 도움을 받아 악마의 왕 라바나(Rahwana)를 죽이고 그에게 납치당한 자신의 아내 신타(Sinta)를 구해낸다는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공연의 내용은 다소 호전적이었다. 하지만 야외무대에서 느낄 수 있는 시원함과 무대 뒤에 자연스럽게 배경이 되어 주고 있는 프람바난 사원의 신비스러운 실루엣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살육과 전쟁까지도 아름다운 신화적 세계로 감싸 안아 주었다.

a <라마야나> 무용극의 한 장면. 무대 뒷편 프람바난 사원의 뾰족한 첨탑이 양쪽에 희미하게 보인다.

<라마야나> 무용극의 한 장면. 무대 뒷편 프람바난 사원의 뾰족한 첨탑이 양쪽에 희미하게 보인다. ⓒ 정철용

공연이 다 끝나고 출연 배우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나오는 길에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무대를 다시 바라다보았다. 그 무대의 뒤편으로 프람바난 사원의 시바 신전과 브라마 신전과 비슈누 신전도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언뜻 본 듯했다. 인간의 공연이 끝나고 비로소 시작되는 신들의 공연! 인간이 떠난 무대에 이제 신들이 내려와 한바탕 그들만의 잔치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프람바난 사원의 전설

옛날에 반둥(Bandung)이라고 불리는 한 왕자가 있었는데 그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적국의 아름다운 라라 종그랑 공주에 반해서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공주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와의 결혼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공주는 그의 마력을 두려워해 그의 청혼을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하룻밤 만에 천 개의 신전을 쌓는다면 결혼하겠노라는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다.

반둥은 그의 마력으로 많은 악마들을 불러들여 순식간에 신전들을 쌓아올렸다. 새벽녘에 이 모습을 보고 걱정이 된 공주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침이 밝아오면 신호를 보낼테니 신전 하나를 무너뜨리라고 했다. 드디어 아침이 밝아 오자 1000개의 신전을 모두 세운 악마들은 일을 멈추었고 마을 사람들은 공주의 신호에 따라 신전 하나를 무너뜨렸다. 그래서 천 개에서 딱 하나 모자란 999개의 사원이 세워지게 되고, 뒤늦게 공주의 농간에 의해 자신의 꿈이 무너진 것을 안 반둥은 공주를 돌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석상을 일천 번째 신전으로 삼았다.

이곳 사람들은 그 일천 개의 신전이 세워진 곳이 바로 프람바난 사원이며 사원의 중앙에 있는 시바 신전 북쪽 석실의 두르가 상이 바로 라라 종그랑의 석상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프람바난 사원을 라라 종그랑 사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2. 2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3. 3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4. 4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5. 5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