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을 보니 행복하고 부끄럽습니다

<강바람 포토에세이> 나의 작은 텃밭 이야기

등록 2003.10.30 18:33수정 2003.10.31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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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보리콩-가을에 심었다가 보리를 거둘 무렵에 거둔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 심어봅니다.

보리콩-가을에 심었다가 보리를 거둘 무렵에 거둔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 심어봅니다. ⓒ 김민수

제주는 육지와 달라 겨울에도 평지 지역은 땅이 얼지 않습니다. 덕분에 겨울에도 텃밭에서 배추며 무, 상추 등을 조달할 수 있고 가을이 끝나 가는 요즘도 씨앗을 뿌리느라 한창 분주했습니다.


가뭄 때문에 조금 더디게 나오긴 했지만 김장배추, 알타리무, 김장무가 새싹을 냈고, 부추와 쪽파, 그리고 풋고추도 아직 밭에서 따먹습니다. 물론 감자는 요즘 한창 꽃을 피우고 있고요.

배추씨와 무씨를 오일장에서 사면서 씨앗을 파는 할망께 요즘 무엇을 심는 것이 좋으냐 물으니 보리콩이 좋다고 합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습니다.

"요즘 심으면 보리 거둘 때 수확하는 건가요? 첨 보는 콩인데 맛있어요?"

몇 개 심어보라며 배추씨와 무씨에 덤으로 너댓알을 주셨습니다. 배추씨와 무씨를 뿌리며 혹시나 해서 밭 한켠에 보리콩을 심었더니 하나도 빠지지 않고 새싹이 나왔습니다.

저는 새싹을 보면 설레임으로 가슴이 콩닥콩닥거립니다. 그 콩닥거림은 행복하다고 온 몸이 소리치는 것입니다. 새싹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텃밭에 나오는 잡초도 여린 새싹일 때는 뽑지 못할 정도니까 새싹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시겠지요?


시골생활을 시작한 후 고요한 나무들과 풀들과 꽃, 그리고 별과 달, 나지막한 오름들을 만나면서 어릴적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던 그리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시에서 버는 수입의 삼분의 일로 만족하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2년여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오히려 도시생활보다 풍요롭고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을 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a 마늘싹-제주는 이렇게 가을에 싹이 나서 겨우내 밭에서 자란답니다.

마늘싹-제주는 이렇게 가을에 싹이 나서 겨우내 밭에서 자란답니다. ⓒ 김민수

보리콩도 보리콩이지만 검은콩을 뽑고 난 뒤에 심은 마늘도 가지런히 새싹이 올라옵니다. 쭉정이 검은콩도 물에 불렸더니 밥에 넣어먹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고, 게다가 조금 늦어서 걱정을 했는데 무럭무럭 잘 자라주는 마늘을 보니 고맙기만 합니다.


"마늘, 고맙다. 정말…."

이제 겨울을 보내고 봄이 오면 마늘쫑을 꺾느라고 분주하겠죠. 아직 겨울도 오지 않았는데 미리 봄을 상상하느라고 분주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심을 때는 분명히 한쪽만 심는데 거둘 때는 어김없이 육쪽이니 말입니다. 씨앗이 흙을 만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기적은 그리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아주 가까운 곳에 있고, 어쩌면 내가 오늘 아침 개운하게 일어나 새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 그것도 기적이 아닐런지요.

우리는 너무 큰 것에만 익숙해 있다보니 자잘한 것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립니다. 그 자잘한 것들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기적과 행복들을 보지 못하고 말입니다.

내년 봄에 거둘 행복한 새싹을 보는 일,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을 느끼고 싶어도 빼앗겨 버린 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합니다. 풀과 나무뿌리를 먹을지언정 피가 뭍은 빵은 거절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데, 시대가 악하다 보니 피 묻은 빵을 먹는 것을 당연시하고, 남의 희생을 담보로 자신들의 번영을 구가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의 수고를 가로채고는 몇 마디 고해성사로 모든 것을 다 용서하라고 윽박지르는 어이없는 일도 있고, 내가 책임질테니 다른 사람은 건들지 말라고 용감한 척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영역을 넘어가는데 자신에게만 책임을 물으라는 것은 비리를 덮어두라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피해자가 되었든 가해자이든지 새싹을 본들 거기에서 행복을 느낄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힘이 없어 작은 새싹에도 행복해 할 수 있는 행복을 빼앗긴 이들의 들판에 봄소식이 오기를, 해방이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도 이들의 행복을 빼앗는 일에 동조하지 않기를, 내가 발붙이고 사는 이 나라가 그런 악한 일에 동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봄에 거둘 새싹을 보며 사치를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는데, 나 혼자 봄을 그리며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새싹을 보며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행복조차 사치스러운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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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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