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열등에 필름 확! "왜 안 나왔지?"

필름 세 통 찍고 겨우 사진 세 장 건졌던 사연

등록 2003.10.30 19:38수정 2003.10.31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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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을 확 열어보고 "왜 안나왔지"라고 했던 친구들
필름을 확 열어보고 "왜 안나왔지"라고 했던 친구들김용철

들녘은 누렇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집이 먼 세 동네 아이들의 기숙사인 '비학의 집'쪽에서 바라본 무등산은 어슴푸레 더 멀어 보였다. 백아산(白鵝山) 자락인 바위산 비학봉(飛鶴峰)에도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간다.


2~3학년은 청소는 늘 뒷전이었다. 더러 남녀가 어울려 선생님 몰래 뒷산 소나무 밭에 자리를 깔고 눌러 앉아 놀기도 한다. 학생과장은 이런 아이들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간혹 선생님께 걸리면 호되게 당했다.

그러니 청춘남녀는 안전한 소통 방법으로 버스간에서 마을 친구에게 건네 달라고 편지를 부탁하곤 했다. 우표 값도 아끼고 배달사고가 일어날 염려도 없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조회 시작 전 밀사를 통해 건네지는 편지의 짜릿함. 그렇게 사랑을 키워나갔다.

화순군 북면 이천리 면소재지는 면사무소, 농협, 지서(파출소), 우체국, 보건소, 초등학교, 중학교 각 한 개에 식당 세 곳(식육점을 겸하던 2곳), 다방 두 곳, 주조장 한 곳이 전부였다. 여관 하나 없고 철물점 하나 없는 20여호밖에 안 되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당연히 사진관이 있을 턱이 없었다. 집에 사진기를 갖고 있는 아이도 드물었다. 금요일 정규수업이 끝나자 '집안 일이 있다'며 선생님을 속이고 곧장 학교를 빠져 나왔다. 학교 생활에서 적잖은 신임을 얻었던 터라 아무 의심받지 않고 청소도 거른 채 유유히 학교를 도망쳐 나왔다. 비포장도로를 1시간여 달려 인접 면(面)인 이서면까지 가서 보증금을 맡기고 사진기를 빌리러 가는 길이다.

버스에 올라 산길을 넘고 다리를 몇 번 건넜을까? 면 경계를 넘자 곧 신농중학교 앞에서 두세 아이만 차를 탈 뿐이다. 차안으로 흙먼지가 확 밀려 들어와 창문을 잽싸게 닫고 10여 분 더 달렸다.


어른들을 따라 몇 번 가봤던 도석리 방석굴장(80년대 중반 이후 동복댐 확장 공사로 수몰되어 폐쇄되었다) 근처에 이르러 차안에서 사진관을 찾느라 내리는 걸 까먹을 뻔했다. 화순읍내 같지는 않아도 장날이 아닌 날인데도 장 마당은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두 번째 허름한 사진관으로 가서 자초지종을 말했다.


"아저씨, 북면 중학교 2학년 1반 김규환이라고 합니다."
"그래? 멀리서 왔구만…."

"우리 소풍갈 때나 수학여행 갈 때도 언제나 아저씨가 오셨잖아요."
"용케 알아보는구나."

"다름이 아니라 사진기 하나 빌리러 왔는데요. 차시간이 급하니 얼른 좀 빌려주세요."
"보증금 갖고 왔쟈?"

"여기 3000원 있습니다."
"꼭 3일만에 돌려줘야 한다. 알았제? 안 글면 하루에 벌금을 5백 원씩 물어야 하거든."

"예, 알겠습니다. 저는 집도 머니 이틀만 늘려 잡아 주세요."
"그렇게 하자."

부리나케 사진기를 받아들고 차부(車部)로 갔다. 막차를 타기 위해서 뛰었다. 표를 끊고 한시도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1개 군(郡)만을 통과하는 80여km의 가까운 거리인데도 3시간30분이나 걸리는 산길. 여차해서 차를 놓치면 아는 집도 없어 낭패가 따로 없다.

광주공용터미널, 남광주, 화순읍과 묘치재를 넘어 달리면 우리마을 바로 위쪽이 종점이다. 도착할 무렵 벌써 날은 저물어 캄캄하다. 나만 혼자 태운 가벼운 버스는 덜커덩거리며 자갈길을 달린다.

두 손으로 손잡이를 꼭 부여잡아도 엉덩이를 잠시도 가만 두지 않는다. 들썩들썩 위로 솟구쳤다 의자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를 반복한다. '아이들은 학교 앞 가게에서 맛있는 고구마 튀김을 먹고 있겠지.' 때도 때인지라 배고픔이 몰려왔다.

학교 앞과 면사무소 앞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차에 오른다. 까만 교복을 입은 120여 명의 학생들로 꽉 찼다. 콩나물 시루가 따로 없었다.

"야! 나 왔어. 내일 학교 파하고 사진 찍을랑께 각자 최고로 좋은 옷 입고 와라."

7km를 더 달려 집에 도착했다. 토요일 아침 사진기를 챙겨 학교 가는 버스에 올랐다. 작전회의는 맨 뒤칸에서 이뤄졌다. 이미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으니 오전부터 공부가 될 턱이 없었다.

그 시절이 참 아름답고 그립습니다.
그 시절이 참 아름답고 그립습니다.김용철

청소 시간에 남학생 몇몇과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골짜기로 들어가서 머루를 따먹으며 몇 방 박고 필름을 아껴뒀다. 종례를 마치자마자 여학생들도 합류했다. 코스모스, 국화가 흐드러지게 핀 화단에 모여서 갖가지 포즈를 취한다.

"자, 활짝 웃어봐야."
"야야~ 니기덜 너무 붙는 거 아냐? 쬐까 수상한데…."
"꿔다 놓은 보릿자루냐? 그렇게 딱딱하게 꼿꼿이 서 있으면 사진이 나오냐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36판짜리 2통을 허비했다. 다들 즐거웠지만 웃는 척 할 뿐 내 속마음은 울적했다. 소녀가 끝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를 한 대 보내고 4시가 가까워지는 시각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아이들이 바쁜 농사철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니 어른들은 집집마다 화가 잔뜩 나있을 것이다. 아랑곳 않고 인근 두 마을 소녀들과 우리 마을 근처에서 경치 좋은 곳만 골라 다니며 해질녘까지 사진을 찍어 나갔다. 병석이는 "하나, 둘, 셋" 외치며 사진기마저 아래로 푹 숙여서 하반신과 발을 찍는 통에 핀잔을 들었지만 다들 즐거워했다.

"잘 나왔으려나?"
"한 번 꺼내서 펼쳐봐."
"잠깐만. 이상하네. 하나도 안 나왔어야. 우리 집으로 가서 등에 비춰보자."

예닐곱 남녀 학생들이 내 방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자 침침하던 방이 환해졌다.

"잘 나왔냐?"
"일에도 다 순서가 있는 것 아녀? 지다려봐."

필름을 꺼내 쫘악 길게 펼쳐 뽑아서 백열전등에 갖다 댔다. 모두 서서 골똘히 쳐다보니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 걸까?

"야, 잠깐만. 너무 설쳐대니까 사진이 잘 안보이잖아. 차분히 앉아 있어봐."
"…."
"엉? 이상허네…. 불빛에 비추면 사진이 나와야 되는 것 아닌가?"
"아따 환장하겄구만…. 뭐가 잘못된 것이다냐?"
"야, 그냥 얼른 필름 집어넣어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누구에게도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두 통을 그렇게 열어보고 말았다. 촌놈들이 얄팍한 지식으로 덤벼든 웃지 못할 사건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월요일 학교 앞 가게에 태연하게 필름을 맡기고 나흘이 지난 후 싸움이 벌어졌다.

"아줌마 사진 나왔어요? 지난번에 세 통 맡겼구요, 오늘 찾을 수 있다고 했어요."
"어디 보자…. 여기 있다. 그런데 왜 이리 가볍다냐?"
"아줌마 이리 줘보세요. 엉? 왜 사진이 안나왔어요?"
"몰러."
"얼마나 정성 들여 찍었는데 이게 뭐예요. 분명히 나와야 될 사진이 하나도 안 나왔네."
"사진관에서 그러는디 빛이 죄다 들어갔다는구만…. 열어 본 거제? 그래도 현상료는 줘야 한단다."
"나 몰라요. 아무 문제없던 필름이 이렇게 됐으니 저는 돈 못 냅니다. 책임지세요."

한 시간 넘게 소리소리 질러가며 싸웠다. 추가 요금은 물지 않았지만 사진 석 장 건지는 걸로 만족했다. 여학생들이 주고객인 가게에서 내 이미지도 많이 구겨지는 수난까지 감수해야했다.

세 장 건진 사진 중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머루를 따서 즐거워 하는 모습, 제일 오른쪽이 글쓴이 김규환입니다.
세 장 건진 사진 중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머루를 따서 즐거워 하는 모습, 제일 오른쪽이 글쓴이 김규환입니다.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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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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