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월출산의 철 이른 동백꽃

폐허로 남은 월출산 월남사지에서

등록 2003.11.03 22:00수정 2003.11.0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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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월출산에 꽃망울을 터트린 동백
가을 월출산에 꽃망울을 터트린 동백김대호
한 절기나 앞서 월출산에 동백꽃이 피었다. 볕 좋은 곳을 마다하고 유독 그늘진 월남마을 진각국사비 주변에만 피었는데 이상하게도 벌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다. 아마도 가을 동백엔 향기가 없는 모양이다.

가을볕에 달아오른 따신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천년 전 월남사를 상상해 보았다. 월출산 골짜기를 거침없이 에돌아 오는 수백 스님들의 우렁찬 아침 예불소리며 두 개의 석탑을 밤새도록 밝히는 탑돌이 연등행렬, 초파일 사찰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벼슬아치들과 귀부인의 행렬들과 진각국사 혜심. 이 모든 것들이 눈을 뜨고 나면 신기루처럼 사그라진다.


보물 313호 진각국사비
보물 313호 진각국사비김대호
담쟁이 넝쿨로 쪽을 튼 토담을 돌아가니 담벼락에 끼인 탑석들과 빈터에 덩그러니 몸을 세운 석탑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3만3106㎡의 방대한 크기로 강진군 월남리 경포대 계곡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는 월남사 터에는 이제 그리움에 사무처 돌이 된 부인의 화신(化身)을 쪼개 세웠다는 삼층석탑(보물 298호)과 진각국사비(보물 313호)가 월남사 흔적의 전부다.

보물 298호 월남사지3층석탑
보물 298호 월남사지3층석탑김대호
사찰과 탑신의 흔적은 마을 담벼락에 혹은 여염집 장독대 밑에 깔려 있을 뿐 3층석탑을 제외하고는 천년 고찰의 흔적을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절이 있음직한 곳에는 사람들이 집을 지었거나 밭으로 일구었다.

무위세상을 도모하던 이웃 무위사와 달리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창한 스승 보조국사 지눌에게 조계종을 물려받은 진각국사 혜심은 유불일치(儒佛一致)를 통해 하늘을 열고자 했다.

화려한 꽃대가 때로는 허무하다. 철 이른 동백에는 향기가 없다. 일본에 빼앗긴 류큐왕국의 류큐산성에서도 그랬고 백제의 부소산성과 신라의 반월산성에서도 그랬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어 태평연월이 꿈과 같다’는 길재선생의 시처럼 박제된 조형물로 부활한 옛 도읍지들에는 손때 묻은 역사가 없다. 차라리 폐허의 월남사지가 인간적이다.

마을 담벼락에 흔적으로 남은 탑석
마을 담벼락에 흔적으로 남은 탑석김대호
폐허로 남은 월남사지가 아버지가 말년에 즐겨 부르시던 ‘황성옛터’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스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서 잠 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황성옛터>(노래 이애리수)


‘황성옛터(1928년)’는 순회극단 연극사(硏劇舍)가 개성공연을 하고 있을 때 전수린(曲)과 왕평(詩)이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滿月臺)를 찾아 느낀 허무한 감회를 노래로 만든 곡으로 당시에 5만장을 넘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던 곡이다.

월남사지 주변의 녹차밭
월남사지 주변의 녹차밭김대호
첫눈이 오기 전 월남사지 동백은 꽃바람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선운사와 백련사의 동백꽃이 천지를 붉게 물들이고도 남는다면 월남사지의 동백은 잔뜩 주눅 들어 차마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소리 없이 지고 말 슬픔이다.

밤이 익자 초생달이 석탑에 걸린다. 노랫말처럼 사찰은 허물어져 빈터로 남아 잡초만 무성하고 밤이 되니 석탑에 걸린 월색만이 서린 회포를 대신해 준다.

녹차와 허브로 만든 밥상
전라도식을 거부한 '자연과 사람들' 윤현경씨

▲ 녹차와 허브로 만든 윤현경씨의 퓨전요리

서울 여자가 전라도 와서 음식장사 한다면 십중팔구 사람들은 ‘망하려고 작정을 했다’고 핀잔을 놓을 것이다. 거기다 5천원짜리 백반이면 20여가지 반찬을 내어놓는 전라도 밥상과 달리 야박하게 양도 적어 젓가락질 몇 번이면 바닥을 드러내고 설상가상으로 담박에 끌어당기는 첫맛도 없는지라 볼멘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그러나 잠시 후 서서히 입안에 번져오는 속 깊은 향내에 ‘어! 이게 뭐야’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이 깊은 맛의 비밀은 녹차와 허브, 유자, 무, 겨자와 같은 자연 향신료에서 번져 나오는 맛이다. 애당초 인공조미료는 사놓지도 않았다.

월출산이 좋아 무작정 남편과 함께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산자락에 ‘자연과 사람들’이라는 식당을 연 윤현경(41·여)씨. 윤씨는 조리기구를 제외한 모든 음식재료를 자연에서 얻는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먹을 만큼만 만들어 내어 놓는다.

간장도 10여가지 야채를 섞어 몇 시간을 끓여 맛을 내고 음식에 따라 페퍼민트, 캐모마일, 라벤다, 타임 같은 허브로 향을 낸다. 삼치는 유자소스에 24시간을 재워 사용하고 갓 볶아낸 커피와 겨자를 사용해 돼지의 누린내를 없앴으며 홍차잎과 청주를 이용해 가을빛 계란찜을 만들어 낸다.

식사 전 허브차로 입안의 미각을 자극하고 진달래·들국화 화전부터 시작해 겨자소스 돼지편육, 유자소스 삼치구이, 이태리 롬바르다식 스테이크, 그리고 곡우에 딴 야생 녹차잎으로 지은 녹차밥에 우렁된장국이면 황후의 밥상이 부럽지 않다.

반찬으로는 단풍빛을 닮은 허브 물김치에 표고버섯·토란대나물, 매실장아찌, 녹차계란말이, 홍차계란찜 등이 제각각의 독특한 맛과 향으로 미식가들을 유혹한다.

전라도식을 거부한 고집 때문에 문을 연 지 2년을 넘어서지만 여전히 경영은 힘들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전해지면서 하나둘 단골이 늘어가고 있다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

올 가을이 가기 전 황토염색으로 치장한 월출산 ‘자연과 사람들’에서 잃어버린 입맛을 찾아오는 것이 어떨까? 그리고 주인 아주머니가 차안에 넣어주는 허브화분을 콘크리트 베란다에 놓아 집안 가득 상쾌함으로 채우는 것도 좋을 듯하다. / 김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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