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허씨가 수능시험 포기한 까닭

[수능날 또다른 풍경] "수능 관문보다 차별 관문이 더 높아요"

등록 2003.11.05 15:37수정 2003.11.08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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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허광훈씨

허광훈씨 ⓒ 오마이뉴스 이승욱

"어제 예비소집 때문에 고사장을 찾았을 때는 앞이 캄캄했어요. 완전히 나 같은 장애인에게는 시험을 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 같았어요."

전국적으로 대학입시 수능시험이 치러지고 있던 5일 오후 1시40분경 대구 경북대사범대부속고등학교(사대부고. 남구 봉덕동 소재)에서 시험을 치르던 허광훈(37. 뇌성마비장애 1급)씨는 고사장의 장애인 편의시설 미비 등에 대해 항의하고 자진 퇴장했다.

그는 이날 오전 선-후배들의 '응원'을 받으며 고사장으로 들어섰지만 막상 '장애인'으로 수능시험을 치러야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a 허광훈씨가 시험을 치르는 건물에는 장애인용 화장실이 없다

허광훈씨가 시험을 치르는 건물에는 장애인용 화장실이 없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사실 시험 중도포기는 수능시험 전날인 지난 4일 예비소집에 맞춰 고사장을 둘러보면서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허씨는 "고사장이 마련돼 있는 학교 건물에는 장애인 화장실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고사장 내에 있는 책상은 휠체어 장애인이 사용하기엔 비좁고 불편한 일반책상(폭 51cm)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고 밝혔다.

결국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아 휠체어에 의존해 살아왔던 허씨로서는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또 다른 좌절감을 맛봐야 했던 셈이다.

그는 "그 난관은 수능시험이라는 관문보다 더 높은 것이었다"고 토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장실 문제가 가장 심각했어요. 10시간 넘게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 없다면... 국가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권리까지 주지 않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구 장애인지역공동체가 운영하고 있는 질라라비 장애인 야간학교(동구 효목동 소재)를 다니고 있는 허씨는 용인대 특수체육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올해 수능에 응시했다.


a 각종 편의시설 뿐만 아니라 책상마저도 휠체어 장애인들에겐 불편한 비좁은 일반 책상만 있다. 교육청 측은 "장애인 본인이 직접 가져온다"고 말하지만 장애인들은 "국가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각종 편의시설 뿐만 아니라 책상마저도 휠체어 장애인들에겐 불편한 비좁은 일반 책상만 있다. 교육청 측은 "장애인 본인이 직접 가져온다"고 말하지만 장애인들은 "국가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허씨의 꿈은 장애인들이 즐기는 '보치아' 경기(공을 굴려서 멀리 떨어진 상대편의 다른 공을 맞추는 경기) 선수들을 길러 내는 교육자가 되는 것. 사실 허씨는 보치아 부문에서 그간 두각을 나타냈다. 지난 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에서 4위에 올랐고, 이보다 앞선 97년 세계보치아 선수권대회에서는 개인전 은메달을 따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자질을 살려 지난 2년 동안 대학 입시를 준비해오고 있었던 것.

"2년 동안 공부해왔던 시간들이 아깝긴 하죠. 하지만 내가 항의해서 관청과 사회에서 장애인들에 대한 조금의 배려가 더 생겨날 수 있다면 기꺼이 1년은 더 감수할 수 있습니다."

허씨는 지금 당장은 보치아 교육자가 되겠다는 꿈을 잠시 접고 수능시험을 포기했다. 항상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인 권익 문제에 대해 고민해왔던 허씨로서는 수능시험 고사장에서 느낀 참담한 심정을 다른 장애인들이 겪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아요. 장애인 인권, 이동권, 교육권에 대해 배려해 주는 것 보다는 복지국가라고 말만 앞세우죠. 진정한 복지국가는 장애인들도 마음놓고 돌아다니고, 공부하고, 시험도 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닌가요."

장애 수험생 화장실은 120m 떨어진 별도 건물에...

▲ 사진 중앙에 있는 건물이 장애인용 화장실이 있는 신축 건물. 고사장과는 약 120미터 떨어져 있다.

뇌성마비 장애인 허광훈(37)씨가 5일 대학입시 수능시험을 치르는 대구 사대부고는 중증 장애인 수험생 등을 위해 별도로 마련된 고사장이다.

이 고사장에는 시각, 청각 장애인들을 포함해 지체장애와 허씨와 같은 뇌성마비 장애인 수험생 등 32명이 시험을 치른다.

이날 허씨와 장애인지역공동체 관계자들이 고사장을 찾자 고사장 관리를 맡고 있는 교육청 관계자 등은 "휠체어 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없다는 것은 오해"라면서 "별도 건물에 장애인 화장실이 마련돼 있다"고 해명했다.

교육청 관계자가 말한 장애인용 화장실은 고사장 건물 바깥쪽 약 120m 정도 떨어진 별도 건물 1층에 마련돼 있었다. 이 건물은 11월 들어 완공된 신축 건물.

교육청 한 관계자는 "수능시험 도중 쉬는 시간이 20분, 점심시간이 50분 정도"라면서 "별도의 건물에 다소 떨어져 있긴 하지만 장애인들이 화장실을 이용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반면 장애인지역공동체 윤삼호 간사는 "뇌성마비 장애인들의 경우 대필자들이 답안을 작성하는데 쉬는시간 10분을 이용한다"면서 "그만큼 쉬는 시간은 줄어들게 돼 있다"고 주장했다. 또 "교육청의 이야기는 장애인들의 생리적인 어려움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면서 "휠체어 장애인들이 화장실까지 도착했다 치더라도 용변을 보는 것 자체가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가뜩이나 별도 건물의 화장실을 써야 한다면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받지 않겠냐"고 반박했다.

또 장애인지역공동체는 화장실 문제 외에도 고사장 건물에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점자블럭이 없고, 책상 등 고사장 내 기자재 등이 장애인들의 편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사대부고 김태달 교장은 "10년 전부터 장애인들이 수능시험을 치르기 위해 학교를 찾았지만 별다른 항의했던 분들은 없었다"면서 "직접 용변기를 가져오거나 책상 등도 교육청의 허가를 받아 본인이 가지고 와서 치렀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한 장애인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경우 용변기든 책상이든 가져올 수 있겠지만 원칙적으로 장애인들을 위한 배려는 국가에서 책임져야 한다"면서 "10년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장애인들을 위한 고사장에 편의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는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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